한 지역이나 문화가 세계유산에 지정되면 그것의 역사적 가치는 물론, 역사관광자원화하는 데 매우 유리하다. 여러 지역에서 그 지역의 문화유산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려는 이유이다. 유네스코 한국위원장을 역임하며 한국의 사찰과 서원 등을 세계유산에 등재한 경험이 있는 현 정부의 교육정책을 총괄하는 이배용 국가교육위원장은 마한유산의 세계유산 등재 준비를 서두를 것을 필자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다.영암군에서는 이미 마한역사문화연구회를 통해 이와 관련한 학술대회를 열어 이 지역의 마한유산 가치를 학술적으로 조명해보기도 하였다. 오늘은 앞서
■ 문산서재기와 문산재 8경함양인 박귀주(1715~?, 구림대동계원)가 1769년에 쓴 문산서재기에 ‘문수재’에서 마침내 ‘문산재’라는 재호를 사용하게 된 연유가 드러나 있다. 그는 이와 아울러 문산재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여덟 가지 경치를 읊은 시를 남겼다. 이번 호에는 박귀주(朴龜冑)가 쓴 문산서재기와 문산재 8경을 소개하고자 한다. 문산서재기(文山書齋記) 문산서재는 옛 문수암이다. 월출산 서쪽에 있으며 월출산에서 가장 기묘한 곳으로 일컫는 곳이 대암 즉 대 바위다. 대 바위로부터 그 아래로는 한 산이니 층암절벽으로 이루어졌다.
도선 탄생설화에 대한 의미지난 호에 도선과 주몽의 탄생설화가 비슷한 구성요소가 있음을 언급했다. 이처럼 고려의 전신인 고구려의 건국 시조인 주몽을 도선과 비교하려 한 것 자체가 도선이 고려 사회에서 차지한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스님이 기존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과정에서 풍수지리 이론을 끌어들여 왕건의 집권을 합리화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스님은 왕건과 대립하고 있던 후백제 출신이기 때문에 그가 갖는 상징성은 더욱 컸다.국초부터 고려는 국가 차원에서 스님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태호공 조행립이 1657년 성기동에 설치했던 성기서재는 안용당 조경찬 사후에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성기서재는 1684년 월대암 아래 문수암 옛터로 이건되었는데, 그 당시의 시문을 보면 연주인 죽림공 현징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1684년 강당을 문수암 터로 이건한 직후에 쓴 것으로 보이는 죽림공 현징의 시가 남아 있어 그 당시의 정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문수서재는 경인년(1830)에 화재를 만나 큰 화를 당하여 임진년(1832)에 다시 지어졌다. 이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을 기록한
앞서 언급했지만, 도선 스님은 당대의 평가보다 후대의 필요에 따라 훨씬 강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그에 관한 설명이 모순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전승이 나오게 된 배경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러할 때 역사적 진실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다. 도선 스님의 출계(出系)에 대해 “국사의 휘(諱)는 도선이요, 속성은 김 씨이며, 신라국 영암사람이다. 그 선대와 부조(父祖)는 역사에서 기록이 빠졌다. 혹은 태종 대왕의 서손이라고 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 설을 따를 때 스님은 영암지역으로 이주한 신라 중
문산재 연혁위의 문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현재의 문산재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여러 차례의 변천 과정을 겪었다. 문산재의 모태는 1657년(효종 8년) 창녕인 태호 공 조행립(1580~1663)이 성기동에 설립했던 성기서숙(聖起書塾)으로부터 출발한다. 지난 호(죽정마을 20)에 해주인 최필흥이 ‘우리 구림마을은 평소에 경치 좋은 물형이 있다고 칭해 왔어도 전고 때부터 홀로 글 닦는 곳이 없었으나, 옛날 우리 태호 조행립 공이 마음속으로 교훈할 뜻이 있어 간절하게 작흥하여 곡식, 재목을 모아 성기동에 처음으로 창건하고 선생을 모시고 학생
전라남도 ‘2월의 으뜸숲’으로 1만여 그루 동백나무 숲이 아름다운 ‘옥룡사 동백나무숲’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도선국사가 마지막 주석한 절로 유명한 옥룡사를 감싸고 있어 더 유명한 동백나무숲은 아름다운 경관을 인정받아 천연기념물(제4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숲이 있는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에 농촌체험과 도선국사 유적체험 등을 즐길 수 있는 ‘도선국사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영암출신 인물이 다른 지역에서 추앙을 받는 사례는 이례적이다. 필자는 작년 늦가을 도선국사의 창건설화가 있는 도갑사에서 열린 산사음악회를 다녀온 적이 있다. 깊
문산재 강당 상량문대범 이로부터 기술한다. 옛날 상서학교의 제도를 폐하고 행하지 않으므로 이미 교도와 훈회의 방법이 쇠퇴하여 드디어 끊기니 오직 시끄럽고 번잡하여 분화 속에 스스로 성취한 재목이 뽑혀 나온 이가 적었다.국가나 시골 마을까지도 유랑하고 포기한 부류가 많으니 옛 현철들의 세상을 개탄하는 민망한 풍속을 궁구하고 정중하게 경계를 정하여 방을 두어서 훈몽에 나아갔다.송나라 때 있었던 회암 주선생의 백록동서원에서의 강연과 같이 열고 고려 조정 때 문헌공 최충선생에 이르러 자하동에 구재를 설하였듯 계왕계래 후세에 성현의 도를 전
월출산 억새밭에서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어찌 억새꽃 뿐이랴.너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막 흔들리더라.흔들리지 않으면중심을 잡을 수 없다.세상 모든 물상들은 흔들리며 중심을 잡나니그대, 마음껏 흔들려라.지나가는 산들바람에도거대한 태풍에도작은 한숨에도일단 흔들려라흔들려야 사는 것이다흔들려야 중심이 잡히고손님처럼, 가을처럼고요가 온다도선국사비문에 적혀있는 내용을 세 차례에 걸쳐 상세하게 소개했다. 월출산과 도갑사뿐만 아니라 우리 영암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인물 중 도선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구림마을은 도선
최근 ‘마한의 심장, 영암’과 관련하여 반가운 뉴스가 있었다. 이미 보도된 바 있듯이 시종면 옥야리 고분군 가운데 17호분 발굴조사 결과 대표적인 영산강식 토기인 유공광구소호를 비롯하여 여러 유물이 출토되었고, 특히 이번 17호분에서도 인골이 출토되어 앞서 나온 19호분의 인골과 유전자 비교를 통해 고분 간의 친족 관계를 유추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고분 발굴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이렇듯 시종을 중심으로 한 영암 일대는 고대 마한 유적의 보물 창고이다. 이들 유적·유물이 지닌 가치를 제대로 정리한다면 ‘마한의 심장,
도선의 마을 구림(鳩林)도선국사비는 1636년(인조 14년) 4월에 시작하여, 1653년(효종 4년) 4월에 완공했다. 무려 17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기계 장비 하나 없이 오직 수공으로만 제작했으니 옛사람들의 수고로움과 정성이 어떠했을지 상상하면 절로 감탄이 나온다. 그런데 비문 끝에는 다음과 같은 특이한 내용이 적혀 있다.“청음(淸陰)과 신독재(愼獨齋) 양(兩) 선생의 성(姓)과 휘(諱)는 언젠가 무도한 자가 깎아 없앴다. 무진년(숙종 14, 1688) 10월 김기창(金箕昶)이 고쳐 새긴다.”청음은 김상헌의 호이고 신독재는 김집
최근 영암군은 ‘외국인 주민 군정 모니터링단’을 출범하고 발대식을 가졌다고 한다. 1년 이상 영암에 거주하고 한국어 구사가 가능한 외국인 주민 가운데 12명을 선발, 운영할 계획이다. 이들의 국적은,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네팔, 중국, 캄보디아, 필리핀 등 8개 국적의 외국인 근로자, 통·번역사, 결혼 이민자 등 다양한 계층이 포함되어 있다. 최근 노동력의 부족 및 국제결혼 등으로 인해 한국에 이주하거나 귀화하여 국적을 취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문화인들이 10여 년 전에 100만 명을 훨씬 넘어섰다는 통계가 있다. 영암은 대
매년 새해 아침이면 연하장을 보내주시는 선생님이 한 분 계신다. 전국귀농운동본부를 창설하여 초대 본부장님을 맡아 귀농귀촌운동을 선도하셨던 여류 이병철 선생님이 그분이시다. 2023년 한 해 동안 마음에 새겨둘 글자로 ‘성(省)’이라는 글자를 택하셨다고 한다. 손수 쓰신 글씨와 함께 시 한 편을 보내주셨다. 도갑사 도선국사비 만나러 가기 전에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이 지면에 싣는다.2023년, 새해를 품고 갈 한 글자를 생각하다가 ‘성(省)’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습니다.‘성(省)’의 자전적 의미는 ‘살피다. 깨닫다. 명심하다.
최근 필자는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작성한 ‘백제계 도래인 정체성에 대한 일 고찰’이라는 논문(선사와 고대 70, 2022)을 학회지에 게재하였다. 도래인(渡來人)은 한반도에서 왜(일본)에 건너간 이주민을 지칭하는 말이다. 도래인 대부분이 마한·백제계 출신이어서 ‘도래인’ 그러면 마한·백제계를 생각한다, 하지만, 백제와 통합 이전인 6세기까지는 도래인을 구성하는 대부분은 마한계라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영산강식 토기’라 명명하는 토기들이 일본에서 대량 확인되고 있는 데서 이러한 추측을 할 수 있다. 박사 왕인도
월출산 도갑사 도선국사비명과 서문(비석 앞면)금산(金山)에 사찰을 건립함으로써 숭두타(崇頭陀)라는 이름을 길이 남겼으며, 강물에 떠내려온 오이는 도리어 대사의 이름을 널리 전하게 되었다. 진리의 문을 열고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서 천지의 조화를 무시하고 그의 신비함을 나타냈다. 도갑사를 창건하여 수도 도량을 개설하여 팔부신장(八部神將)의 옹호를 받아 모든 불자들이 복을 닦게 되었다. 이와 같이 위대한 대사의 업적은 마땅히 비석에 새겨서 길이 후대에 전해야 하므로 감히 기존에 있던 마멸된 비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국사의 휘(諱)는
‘서기’ ‘국사’ ‘신집 5권’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다. 독자들이 초중고 시절 귀가 아프게 외웠던 삼국의 역사서이다. 백제, 신라, 고구려 역사서이다. 근초고왕, 진흥왕, 영양왕 때 저술된 책들이다. 이 역사서는 모두 삼국의 국력이 왕성할 때 편찬되었다고 배웠다. 우리가 출세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과거의 나를 그럴듯하게 세탁한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그의 선대 이야기를 신화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대표적 예이다. 일연도 삼국유사 서문에서 한 나라를 건국한 인물은 보통사람과는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출생과 관련된 얘
필자는 요즘 들어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부쩍 강조한다. 정체성은 자존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상대를 존중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기 열등감이 강하여 늘 욕구 불만에 가득하고 남에 대한 배려도 약하다. 논어에서 말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은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말라는 말이다. 곧 주체성을 지니되 상대에 대한 배려를 이야기하고 있다. 글로벌 사회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공자님 말씀을 현재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이 상호 유기적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화이부동’의 단어 하나로 확인할 수 있다. 영암
도갑사와 조선 시대 선비들구림마을에 살았던 향촌 선비들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월출산을 유람하러 온 시인 묵객들이 남긴 시문을 읽으면서 새삼 새롭게 느낀 것은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되고 있던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사찰의 스님들과 생각보다 많은 교류와 소통을 했었다는 사실이다. 셀 수없이 많은 시문이 있지만 여기 대표적인 글 몇 편을 소개한다. 구암(龜岩) 임호의 유고(遺稿)구암공 임호는 1540년 진남제를 축조하여 간척지를 조성한 월당 임구령의 장남으로 회사정을 짓고 구림 동계를 중수하여 구림 사회의 기틀을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던 사람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에 의해 정착우리나라의 문수신앙은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에 의해서 정착되었다. 『화엄경』에 의하면 문수보살의 상주처(常住處)가 중국의 청량산이라고 한다. 자장이 청량산의 태화지(太和池)에 있는 문수보살 석상 앞에서 7일 동안 기도하여 보살로부터 범어로 된 사구게(四句偈)를 받았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범어로 된 내용이어서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때 한 노승으로부터 꿈(범어 게송)에 대한 해석을 듣고 부처님의 가사(袈裟)와 발우를 받았다. 노승은 신라의 왕이 여성이라 위엄이 없기 때문에 이웃 나라들이 얕보는 것이
‘혁신으로 도약하는 더 큰 영암’의 군정 목표 아래, 우승희 군수가 10개 분야, 120개 공약을 확정하고,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혁신 시책 발굴과 군민소통 창구를 만드는 의미 있는 한 해를 마무리했다.큰 위기 속에서 변화와 혁신으로 미래성장기반을 구축하며 군민과 함께하는 새로운 혁신 영암군의 2022년 한 해를 결산해 본다.▣ 위기 속에서 속도감 있는 행정올해 영암군은 제3회 정리 추경 기준 7천998억원으로 8천억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대폭적인 재정 확장 속에서도 영암군은 채무 제로를 유지하고 있다. 복지, 문화관광, 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