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42] 쌍봉사와 보림사를 통해 본 마한의 정체성(하)

선종 사찰의 구심점인 쌍봉사는 장보고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며, 보림사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성장했다.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국보 57호)
선종 사찰의 구심점인 쌍봉사는 장보고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며, 보림사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성장했다.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국보 57호)

최근 ‘마한의 심장, 영암’과 관련하여 반가운 뉴스가 있었다. 이미 보도된 바 있듯이 시종면 옥야리 고분군 가운데 17호분 발굴조사 결과 대표적인 영산강식 토기인 유공광구소호를 비롯하여 여러 유물이 출토되었고, 특히 이번 17호분에서도 인골이 출토되어 앞서 나온 19호분의 인골과 유전자 비교를 통해 고분 간의 친족 관계를 유추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고분 발굴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이렇듯 시종을 중심으로 한 영암 일대는 고대 마한 유적의 보물 창고이다. 

이들 유적·유물이 지닌 가치를 제대로 정리한다면 ‘마한의 심장, 영암’의 영광이 머지않아 재현되리라 믿는다. 필자가 자주 강조하고 있지만, ‘영암 마한’은 영암인의 정체성이자 전라도, 나아가 한민족의 정체성의 근원이다. 이 점을 깊이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군민 스스로 점차 마한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는 비율이 늘어나고 있어 고무적으로 여긴다.
 
장보고와 쌍봉사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보물 157호).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보물 157호).

지난 호에 장보고가 선승들을 후원하였다는 얘기를 하였다. 무주지역의 내륙 깊숙한 곡성 태안사의 단월도 장보고였다. 운주사도 천불천탑에도 장보고 전승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형태로든지 관계가 있다고 본다. 운주사와 그리 멀지 않은 쌍봉사 또한, 장보고가 후원자일가능성이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혜철은 장보고 선단을 통해 중국의 새로운 선풍을 쉽게 접하고 있었다.

쌍봉사는 장보고의 도움을 받고, 혜철과 같은 훌륭한 선승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문(山門)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혜철이 846년 무렵 태안사에 주석한다. 혜철이 쌍봉사를 떠났음을 말해준다. 혜철이 쌍봉사를 떠난 것은 장보고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쌍봉사는 장보고 사후 경제적 기반이 크게 약해졌다. 쌍봉사는 장보고와 관련된 사찰이기 때문에 장보고 난 이후에 신라 중앙정부의 심한 견제를 받았음에 틀림이 없다. 혜철이 쌍봉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쌍봉사와 가까운 곳에 있는 장흥 보림사가 주목된다. 보림사는 가지산문을 연 대표적인 선종사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원래 보림사는 759년 비(非) 의상계 화엄승려인 원표 대덕이 창건한 교종사찰이다. 가까운 지역에 성격이 다른 선종 사찰(쌍봉사)과 교종사찰(보림사)이 경쟁하고 있는 형상이다.

쌍봉사가 장보고라는 무주 호족세력의 후원을 통해 성장하였다면, 보림사는 왕실의 후원을 통해 성장한 셈이다. 장보고가 중앙 정부와의 권력 싸움에서 패배한 것은 곧 쌍봉사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 보림사는 중앙정부의 많은 후원을 받으며 날로 세력이 커졌다. 당시 신라 불교는 선종 계통 불교의 도전이 거세게 나타나고 있어 교학의 재정립이 시도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보림사의 쌍봉사 견제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장보고 난에 무주인들이 많이 가담하였다. 장보고의 난에 마한인들의 정체성이 깃들어 있다. 무주인들은 난이 실패한 이후에도 계속 정치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다. 신라 중앙정부가 무주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청해진을 혁파하고, 그 지역인들을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문성왕13년, 851)을 폈던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이 지역의 불만을 더욱 강하게 표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문성왕은 사신을 보내 이들 지역을 위무하였다(855).보조선사 체징이 859년 보림사에 주석하면서 보림사는 화엄종에서 선종사찰로 바뀌었다. 왕실 지원도 계속되었다. 왕실이나 중앙귀족들의 도움을 받으며 보림사는 산문(가지산문)을형성하였다. 선종 사찰로 바뀐 화엄종 사찰을 국가가 후원한 것은 아무래도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이것은 무주 지역에서 장보고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한 선종 세력을 견제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다. 

무진주 지역 불교 세력을 보림사를 통하여 통합하려 하였던 것이다. 보림사가 비록 쌍봉사와 같은 선종 계통 사찰이라 하더라도 화엄종의 교주인 비로자나불이 보림사에 조성돼 있는것으로 볼 때, 여전히 화엄의 영향력이 온존하여 있었다고 본다. 김헌창의 난으로 표출된 무주 지역의 반 신라 정서는 그 밑바탕에 마한 정체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지역에 형성된 이러한 정서를 무마하기 위해 신라 중앙정부는 청해진을 설치했다. 하지만 청해진을 거점으로 무주인의 반 신라 정서가 폭발하자, 중앙정부는 청해진 세력을 김제 지역으로 분산시키는 정책을 썼다. 그럼에도 무주인의 반 신라 정서는 여전하였다. 이 지역에 형성된 반 신라 정서 중심에는 장보고와 연결된 선종 사찰들이 있었다. 이들선종 사찰의 구심점이 쌍봉사였다. 

신라 중앙정부는 쌍봉사의 반 신라적 성격을 제어하는데깊은 관심을 가졌다. 인근에 있는 화엄사찰인 보림사를 선종사찰로 전환시키고 체징을 절에주석하게 하고 적극적인 후원을 하였다. 대부분의 선종사찰이 지방호족의 후원을 받은 것과비교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이러한 중앙정부의 집중적인 견제에도 불구하고 쌍봉사의반 신라적인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에 중앙정부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였다. 다음 기록을 주목해 보자.

회창 7년(847) 4월에 (도윤 선사가)다시 청구로 돌아와 풍악에 머무르니 귀의하려는 이가운무와 같이 모였고, 배우러 오기를 바라는 이가 별똥과 파도같이 몰려들었다. 이때 경문대왕이 귀의하여 받들고 은혜를 베풂이 날로 융숭하였다. 함통 9년(868) 4월 18일 갑자기 문인들에게 하직을 고하였다.(조당집17, 쌍봉화상)

도윤과 쌍봉사의 인연

쌍봉 화상 곧 도윤 선사가 귀국하여 풍악에 머물렀다고 하는 데서 금강산에서 활동하였음을알 수 있다. 그의 명성에 신도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이에 경문왕도 도윤 선사에게 귀의하였다는 것이다. 경문왕은 헌안왕을 이어 861년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경문왕이 도윤 선사에게 귀의한 것은 861년 이후부터 열반한 868년 사이에 쌍봉사에 주석한 것으로 보인다. 쌍봉사에 도윤의 부도가 있는 것으로 보아 금강산에 주석하던 철감선사가 열반 무렵에는 쌍봉사에 주석하였음은 분명하다.

황해도 봉산 출신으로 금강산 장담사에서 주석한 도윤이 멀리 떨어져 있는 무주 쌍봉사로 거처를 말년에 옮긴 까닭은 도윤과 쌍봉사의 인연이다. 그가 중국에서 귀국할 때 영산 지중해의 나주 회진이나 영암 나루터를 이용하였다면, 인근의 쌍봉사에서 잠시 주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쌍봉사는 혜철 등이 귀국 길에 머물렀을 정도로 선승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보고의 후원을 받았던 쌍봉사는 승주지역의 박씨 집안이 또 다른 단월이었다.

이러한 점이 박씨(俗姓)인 도윤이 쌍봉사와 인연을 맺는 배경이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일단 쌍봉사를 떠나 금강산에서 주석하던 도윤이 다시 쌍봉사에 오게된 데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반 신라적인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쌍봉사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 중앙정부가 인근의 보림사를 선종의 거점 사찰로 후원하였지만, 그러한 의도가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은가 한다. 가지산문을 통하여 쌍봉사를 제어하려 한 중앙정부의 의도가 쉽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신라 중앙정부는 쌍봉사를 직접적인통제에 두려 했다고 보여진다. 김헌창의 난·장보고의 난으로 표출된 무진주 지역의 강고한 마한 계승의식을 어떻게든 약화시키고, 그 지역의 반신라 정서를 달랠 인물로 쌍봉사와 인연이 있는 도윤을 주목하고 쌍봉사에 파견하였던 것은 아닐까 추측된다.

그러나 도윤이 쌍봉사에 주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입적하였기 때문에 실제 주석 기간은 길지 않았다. 따라서 반 신라 정서는 여전하였다. 한편 도윤 사후 쌍봉사에 제자들이 세운 부도와 비를 세운 것을 보면 도윤의 제자들이 꽤 있지 않을까 추정되지만, 활동 기간이 짧아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고 보기 어렵다. 도윤의 수제자 절중(折中)의 언급은 이를 짐작케 한다.

“빈도는 이제 늙어서 쌍봉사에 가 친히 동학(同學)하던 사람들을 찾아보고 선사(도윤)의 탑에 면례(面禮)를 드리려고 합니다. 이에 남행을 주저할 수 없습니다.” 절중은 도윤을 도와 강원도 영월 흥녕사를 중심으로 사자산문을 개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선승이다. 영월 흥녕사에서 주석하던 절중이 쌍봉사를 찾아 스승의 탑비를 참배하겠다는것이다. 절중이 ‘친히 同學’하던 사람을 찾겠다는 것이 주목된다. ‘친히 동학’이라 한 것으로보아 아마 금강산에서 스승 도윤 밑에서 공부하던 제자를 말하는 것이라 여겨진다.곧 그들 중 일부가 스승을 따라 쌍봉사에 내려와 주석을 하였던 것은 아닐까 짐작된다. 그러다 보니 비록 도윤이 명성이 높고 쌍봉사와 일정 부분 인연이 있다 하여도 쌍봉사가 지닌반 신라적인 정서를 완전히 바꾸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쌍봉사의 오랜 단월로, 승주 호족 박영규 집안이 주목된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기 이전부터 쌍봉사의 단월이었다. 장보고 세력이 무너진 후에도 승주 호족의 강력한 경제기반으로 세력을 유지해나갔다. 그리고 중앙정부의 끊임없는 견제를 이겨낼 수 있었다. 견훤왕 시절 많은 경제적 후원을 받은 쌍봉사는 무진주 지역에서 그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반면 신라중앙정부의 많은 도움을 받았던 보림사는 후백제가 건국된 후, 도리어 쇠락의 길을 걸었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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