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41] 쌍봉사와 보림사를 통해 본 마한의 정체성(상)

보림사 일주문 통일신라 말 ‘교종’ 중심의 불교계에 새롭게 ‘선종’ 불교가 들어왔다. 이때 전남지역에서는 곡성 태안사를 기반으로 ‘동리산문’, 장흥 보림사를 기반으로 ‘가지산문’ 등 2개의 선종 종파가 있었다. 당시 9개의 종파 중 2개의 종파가 전남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은 전남이 불교계의 새로운 변화를 주도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보림사 일주문 통일신라 말 ‘교종’ 중심의 불교계에 새롭게 ‘선종’ 불교가 들어왔다. 이때 전남지역에서는 곡성 태안사를 기반으로 ‘동리산문’, 장흥 보림사를 기반으로 ‘가지산문’ 등 2개의 선종 종파가 있었다. 당시 9개의 종파 중 2개의 종파가 전남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은 전남이 불교계의 새로운 변화를 주도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최근 영암군은 ‘외국인 주민 군정 모니터링단’을 출범하고 발대식을 가졌다고 한다. 1년 이상 영암에 거주하고 한국어 구사가 가능한 외국인 주민 가운데 12명을 선발, 운영할 계획이다. 이들의 국적은,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네팔, 중국, 캄보디아, 필리핀 등 8개 국적의 외국인 근로자, 통·번역사, 결혼 이민자 등 다양한 계층이 포함되어 있다. 최근 노동력의 부족 및 국제결혼 등으로 인해 한국에 이주하거나 귀화하여 국적을 취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문화인들이 10여 년 전에 100만 명을 훨씬 넘어섰다는 통계가 있다. 영암은 대불산단의 배후도시로 외국인 근로자들이 다른 지역보다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외국인들을 영암인으로 받아들이려는 영암군의 정책은 시의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본란을 통해서 이미 언급한 바 있거니와 2년 전 영암군의 지원으로 추진된 마한답사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참여한 삼호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의 지역 구성을 살폈더니 영암 원주민보다 경상도 등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학생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필자는 이들 학생에게 자기 출신지의 전통을 간직하되 새로 이주한 영암인이 되어야 함을 역설한 바 있다. 곧 이들이 진정한 영암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 이때 이들에게 영암의 정체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말하자면, 고유의 문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마한문화가 곧 영암의 정체성이라 하겠다. 논어에서 공자가 강조한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자아를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마한문화의 특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고, 이러한 특징이 오늘의 영암의 역사성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고 믿는다.

전남은 불교계 개혁도 앞장서

지난 10월 영암출신 광주 남구문화원장, 역사학자인 무진향토문화연구소장과 같이 오랜만에 장흥 보림사를 찾았다. 대표적인 선종 사찰인 보림사는 국보급 문화재가 가장 많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보림사가 국보급 문화재가 가장 많이 소장된 까닭은 무엇이며, 교종사찰이었던 보림사를 선종으로 바꾸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 궁금하다. 이런 문제를 이미 본란을 통해 살핀 바 있었는데도 이를 기억하는 독자들이 거의 없다. 이에 앞서 살폈던 보림사와 쌍봉사를 재론하며 독자들의 기억을 환기하고자 한다.

통일신라 말 ‘교종’ 중심의 불교계에 새롭게 ‘선종’ 불교가 들어와 ‘9산선문’이라 하여 새로운 종파들이 나타난다. 이때 전남지역에서 곡성 태안사를 기반으로 ‘동리산문’, 장흥 보림사를 기반으로 ‘가지산문’ 등 두 개의 선종 종파가 성립되고 있다. 아홉 종파 가운데 두 개 종파가 전남지역에 있다는 것은 이 지역이 새로운 불교계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고려 시대에도 무신정권 시대에 교종 중심의 불교계에 선종 중심의 불교계로 재편되는데 그 중심에 ‘수선결사’와 ‘백련결사’ 등의 불교 결사가 있었다. 이들 결사가 모두 전남지역에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 개혁을 전남지역이 앞장서고 있음을 말해준다. 결국, 전남지역은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이러한 지역의 특성이 해상강국 마한의 정체성을 계승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통일신라 시대에 선종 불교가 수용되고 정착되는 과정에 장보고가 일정부분 연관되어 있다. ‘완도’ 출신으로 알고 있던 장보고가 실은 ‘영암’ 출신인 가능성을 얼마 전 거듭 설명한 바 있다. 장보고는 전남지역 주요 사찰들의 단월(檀越), 곧 후원자였다. 그가 불교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세운 중국에 있는 ‘법화원’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포교당을 만들어 ‘엔닌’ 등 선승들을 후원하였다. 그가 ‘도선’과 관련되어 있고, ‘운주사’ 혜철 스님이 주석한 곡성 태안사의 단월이었다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운주사의 와불이 장보고 부부와 관련이 있다는 전승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화순 이양에 ‘쌍봉사’라는 유명한 사찰이 있다. 쌍봉사에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면 잘 아는 통일신라 시대 유명한 선승 철감선사 도윤의 ‘부도’(국보57호)가 있어 더욱 유명해졌다. 이 부도를 가지고 필자는 대학 재학 중 첫 탁본을 한 기억이 있다. 지금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죄를 당시에는 버젓이 하였다. 한때 보물로 지정된 쌍봉사 3층 석탑은 1984년 소실되어 보물 지정은 해제되었다. 쌍봉사가 있는 ‘쌍봉’ 지역은 1906년 양회일·이백래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연합의병부대 ‘호남창의소’ 본부가 있었다. 영암에 있는 ‘호남창의소’와는 별개이다. 지금 그곳에는 당시 의병들이진지를 구축한 흔적들이 발굴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절이 장보고와 관련이 있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선종 사찰의 쌍봉사와 혜철스님

동리산문을 열었던 도선의 스승 혜철스님이 중국에서 공부하고 839년(신문왕4) 귀국하며 잠시 쌍봉사에 머물렀다. 쌍봉사는 혜철스님 귀국 이전에 창건된 사찰이었다. 혜철이 그가 태어난 경주로 가지 않고 쌍봉사에 머무른 이유는, 무려 25년간 중국에 머무른 관계로 경주에는 마땅한 후원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종 승려인 혜철로서는 교종 세력이 선종보다 강한 경주에서는 활동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다. 혜철이 귀국하면서 주석의 대상으로 삼은 쌍봉사는 선종 사찰이었다.신라에는 이미 통일 무렵 선종 계통의 불교가 유입되어 있었다. 중대 말 기록을 따르면, 혜공왕대에 이미 북종선이 전파되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하대에 이르러 북종선은 세력이 약해져 지리산 기슭을 중심으로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다. 남종선 계통의 선종이 중국에서 들어오면서 북종선 중심의 선종에 변화가 나타났다. 혜철스님은 남종선 계통의 승려이다. 쌍봉사는 원래 북종선 계통의 선종 사찰로 창건되었다고 믿어진다. 쌍봉사가 선종과 관련되어 있어 혜철이 쉽게 그 절에 주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쌍봉사는 점차 남종선 계통의 사찰로 변모하였다. 혜철이 쌍봉사에서 주석할 때, 신이한 행적을 보였다. “무주 관내의 쌍봉(蘭若)에서 여름 결제 때, 날이 가물어 산이 마르고 매가 말랐으며, 비가 오지 않을 뿐아니라 조각구름조차 없었다. 왕사(主司)가 선사에게 간절히 청하니 선사가 고요한 방에 들어가 좋은 향을 사르며 하늘과 땅에 빌었다, 잠시 후 단비가 조금씩 내려 무주 관내의 들을적시더니, 얼마 후 큰 비가 내렸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다.쌍봉사에 승려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혜철이 그러한 일을 맡은 것은, 그가 상당히 이름이 알려져 있고, 영향력도 있는 승려임을 알겠다. 그가 기도하니 비가 내렸다고 하는데서, 이 지역의 자연환경에 대한 이해도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혜철이 쌍봉사에 머물고 있을 때, 절의 위상은 한층 높아졌다.혜철이 쌍봉사를 주석의 대상으로 삼은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쌍봉사가 중국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점도 작용하였을 법하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상무역을 장악한 장보고는 무주 일대의 사찰들을 많이 후원하였다. 장보고는 중국을 왕래하는 선승들의교통 편리를 도와주며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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