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산재(3)
월출산 벚꽃 백 리 길[78]
■ 도갑리1구 죽정마을(22)

태호공 조행립이 1657년 성기동에 설치했던 성기서재는 안용당 조경찬 사후에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성기서재는 1684년 월대암 아래 문수암 옛터로 이건되었는데, 그 당시의 시문을 보면 연주인 죽림공 현징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1684년 강당을 문수암 터로 이건한 직후에 쓴 것으로 보이는 죽림공 현징의 시가 남아 있어 그 당시의 정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문수서재는 경인년(1830)에 화재를 만나 큰 화를 당하여 임진년(1832)에 다시 지어졌다. 이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을 기록한 해주인 최호와 연주인 현보철의 기문이 남아있어 본지에 소개한다. 

죽림 현징 시(竹林 玄徵 詩) ( 죽림공 현징: 연주인 1629-1702 )
癸亥重移聖起書齋于文殊000墟 00  事在不計風雨寒暑遂000 役偶
吟二首役于告 訖於甲子初夏

  계해년(1683)에 성기서재(聖起書齋)를 문수암 옛터로 옮겨 중건하는 역사(役事)에 비바람과 더위를 헤아리지 아니하였고....시 두수를 우연히 읊었다. 역사는 갑자년(甲子年 1684) 초여름에 준공을 고(告)하였다. 

學齋僧舍世間餘 학재나 절간이 세상에 남
아 있었으니.
經始0 0 0 0 初 경영을 시작하기를 000년
에 처음하였네.
先輩刱營將癈矣 선배들이 처음 세웠으나 
장차 폐회되어 
此身偏苦敢0 歟 이 몸이 남보다 괴로움 
더 받고 감히 이룩하였네.
往來不憚家人讁 가고 오는 것을 꺼리지 
않고 집안사람 꾸짖으며 
奔走非要當友譽 분주하게 가리지 않음이 
마땅히 사우들의 영예 일세
寄語二三年少者 두세 살 연하에게 주의 
말을 주노니
勉㫋須讀五車書 부지런히 다섯 수레 책 
힘써 읽게나. 
重營齋舍闢崇阿 재사를 높이 열려있는 언
덕에 중건하니
徙倚高樓得日哦 높은 다락 옮겨 기대어 
날마다 읊네.  
躑躅成山春色晩 철쭉꽃 산을 이루니 봄
빛이 늦은 듯.
江湖滿地夕陽多 강호에 가득하게 저녁노
을 많네. 
殊庵事蹟階猶在 문수암의 지나온 자취 
오직 섬돌에 있으니.
臺石風光客幾過 대석과 풍광에 몇 손님이
나 지냈을까
造物至今慳秘意 조물주가 지금까지 비밀
로 아껴 온 뜻있으니. 
祗緣吾輩不由他 우리는 이곳을 공경하고 
다른 곳 말미암지 말자  

최호 기(崔琥  記)  

우리 마을에 서재가 있어 온 지 오래되었다. 문수라고 부르게 된 것은 옛날 문수암 터에 서재를 지었기 때문이며 전에 선배들께서 창설하셨음이 아름답고 또 훌륭하기가 이 같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경인년(庚寅年 1830) 봄에 회록지변 즉 화재를 만나 남아있는 것이 이 강루(講樓) 사오 칸뿐인즉, 강의하고 배울 곳이 거의 없어졌으므로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동중(洞中)에 여러 어른들께서 중건할 논의를 발의하고 재물을 약간씩 모아 길거(拮据)하여 현보해(玄溥海 연주인, 1770-1839)씨를 성조도유사에 정하고 나에게 성조별유사의 책임을 맡게 함으로 사양하지 못하고 이 役事(역사)를 시작하였다.

조형 홍규(鴻圭)씨는 본 서재 도유사요 박친구 귀환(龜煥)씨는 본 서재 유사로써 동심협력하여 역사를 임진년(壬辰年 1832) 정월 보름을 지나 시작하여 오월에 이르렀으나 농사에 힘써야 하고 더위 또한 심하였으므로 정지를 시켰다가 팔, 구월 두 달 며칠에 준공하였으므로 시월 십육일 낙성 잔치를 베풀고 동중(洞中)과 향중 어른들이 다 모여 즐기니 아름답고 훌륭하도다. 
 
선배들의 규칙을 이에 계술(繼述)하니 후진들은 이에 쫓아 흥기 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며 어찌 다행하지 아니하랴.

임진년 시월 최호(1787-1862, 해주인, 구림 대동계원임) 기록하다.

*주(註)  - 회록지변(回祿之變) : 화재를 말함. 회록은 불의 신.
  - 계술(繼述) : 선인의 업을 계승하여 조술함. 조상의 뜻과 사업을 이음.  

‘我洞之有書齋久矣以文殊爲號者以古之文
殊庵墟爲齋之然也先輩刱
設莫此爲盛且美矣不幸庚寅春偶有回祿之
變所餘者只是講樓四五間
而已則講學無所莫不興歎於是洞中諸長老
乃發重建之論聚財拮据而
以玄溥海氏爲成造都有司以余爲成造別有
司之任故辭不獲已経始是
役也曺兄鴻圭氏則本齋都有司朴友龜煥甫
則本齋有司也而同心協力
始役於壬辰正月旣望而至於五月以農務與
暑熱姑爲停止矣八九兩月 
幾乎訖功故以十月十六日因設落成之宴洞
中與鄕中長老與暑熱咸集 
而樂之猗歟盛矣先輩之規於斯繼述後進之
學從此興起豈不美哉豈不
幸也哉
          歲 壬辰 十月 日 崔琥 拜記’

문수서재중수기략(文殊書齋重修記略)
현보철(玄溥澈)(연주인, 1776-1851, 구림대동계원임) 

문수암은 옛날부터 구림에 강학하던 곳이다. 세전에 의하면 도선사가 터를 잡았다고 하며 선배 어른들이 성기동으로부터 이곳으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이 땅에 이건할 때에 동중에 모든 장로들과 우리 죽림공께서 그 역사를 감독하고 서재를 이미 이룬 후 문곡 김수항 선생이 그 자취에 대하여 서문을 쓰시었고 삼연 김창흡 선생께서 그 아름다움을 시로 읊으셨으며 또한 죽림공(현징)께서 읊으신 시운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그로부터 이후로 수백 년이 지났으나 지세가 혐오스럽고 또한 오습(汚濕)함으로 서쪽 가로 옮긴 후에 내 조부 되시는 심초공(현명직)께서 그 사실을 기(記)하신 그 운고(韻稿)가 남아있어 진사(進士) 죽호(竹湖) 박공이 죽림공(현징) 운에 차운을 하였다.      

또한 사운과 칠영(七咏)이 옛 시축 가운데 기록되어 있어 당시 제현(諸賢)들이 부르고 화답한 바 많이 있으나 옛 종이라 분명치 않아도 손때는 진실로 새로웠는데 불행하게도 경인년(1830) 봄에 문득 성문에 화를 당하여 불살음을 당하였다.

그 후 동중 늙으신 모든 어른들이 그 인몰(湮沒)될 것을 개탄하였으므로 중창하여 옛터에 다시 세우자는 의논을 모아서 우리 중씨(仲氏=현보해) 및 친구 조홍규(曺鴻圭 1776-1837), 최호(崔琥 1787-1862) 씨가 감독하니 임진년(1832)정월 보름에 시공하여 이해 10월 보름께 준공을 하고 동중 모든 분들이 협조를 하지 않은 이가 없이 혹은 재물을 돕고 일을 맡아 도왔다. 이때 오직 조, 최 두 친구는 몸을 던져 담당하여 비바람을 피하지 아니하고 왕래하기를 꺼리지 않았었다.

우리 죽림공께서는 왕년에 집사람들에게도 꾸짖기를 꺼리지 아니하시지 않았던가. 진실로 조, 최 두 친구의 일도 가히 앞뒤가 한가지로 궁그러 가는 것 같았었다. 

나무 대와 돌을 써서 목수 장인들을 불러 준공 낙성한 후 잔치를 겸하여 행하고 백일장을 열어 조씨 어른이신 영진(榮進 1759-1836) 씨, 백형 검희(儉凞) 씨, 문씨 친구 즙(檝) 씨께서 그 글을 검고하시니 원근 사우(士友)들이 다 모여 들고 동서 어른들이 제회(齊會)하여 북을 치고 젓대를 불며 즐거워하고 시를 짓고 노래를 불렀었다. 아! 아름답고 훌륭하도다.

우리 마을이 처음 창건하여 부지런하게 지켜 온 지 수백 년래에 성쇠(盛衰)도 무상하게 육, 칠 대를 지내왔으나 그 규모를 잃지 않고 일으켰으며 혹은 폐했다가도 다시 일으켜서 이와 같이 무릇 세 번에 걸쳐 선배들의 뜻과 업적을 계술하여 후진들의 학업을 흥기 시키니 어찌 그 우연이라 하겠는가. 

이로부터 이 집에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은 이 글을 읽고 외어 갈고 닦아 우리 후배나 후손들에게 전할 것이니 후손들은 그 전함을 받아 지키고 발전시키는데 더욱 힘쓴다면 이 서재의 모든 것이 썩지 않을 것이다.  
 
현보철 근기          

‘文殊書齋重修記略(문수서재 중수기 략)
文殊庵者古鳩林講學之所也世傳道詵師卜
其基而先輩長者移建聖起 
齋於此地者也其時經始卽洞中諸長老而我
竹林公董其事齋旣成文谷
金先生序其蹟三淵金先生詠其美而竹林公
又有四韻至今膾炙自是厥
後數百年而嫌其地勢之汚濕建于西邊而我
王考尋初公記其事殘其韻
至今流傳竹湖進仕朴公次竹林公韻又述四
韻七咏書在古軸中而當時
諸賢唱而和之者亦多矣古紙漫漶手澤尙新
不幸庚寅春忽値城門之禍
奄被崑玉之焚洞中諸長老慨其先蠋之湮沒
爰謀重刱之復建于舊基乃
命我仲氏及曺友鴻圭崔友琥甫敦事而壬辰
正月之望始其役是歲十月
之望訖其功則洞中諸員莫不憚而叶謀或出
財而助之或幹事而補之惟
曺崔兩友則挺身擔當不避風雨不憚往來則
我竹林公往來不憚家人適
之句實符於曺崔兩友之事而可謂前後一轍
也木石已畢工遧已竣而因
誠落成宴兼行白塲會曺丈榮進氏白兄儉熙
氏文友檝氏考其文而遠近
士友咸集東西長老齋會管鼓而樂之文賦而
歌之猗歟盛矣我洞刱守之
勤也歷數百年盛衰無常經六七世規模不失
興而或廢廢而復興如是者
凡三而繼述先輩之志興起後進之業者豈其
偶然哉玆心性昇此堂入此
室者讀其書誦其文而我輩傳之後昆後昆傳
之來修世世遵守久久益勉
則庶斯齋之不朽也
  玄  溥  澈   謹 記’

(원문번역 일초 박준섭, 자료 제공 현삼식 전남종가회 회장)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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