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44] 선각국사 도선과 고려왕조(中)

선각국사 도선 진영 선암사에 소장된 선각국사 도선의 진영. 보물로 지정된 도선국사 진영은 지난 1805년 중수(重修)된 것으로 양식이나 색감 등이 뛰어나며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도선국사는 신라 말기 동리산문(桐裏山門) 계통의 선승으로 선암사의 제2차 중창주이다.
선각국사 도선 진영 선암사에 소장된 선각국사 도선의 진영. 보물로 지정된 도선국사 진영은 지난 1805년 중수(重修)된 것으로 양식이나 색감 등이 뛰어나며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도선국사는 신라 말기 동리산문(桐裏山門) 계통의 선승으로 선암사의 제2차 중창주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도선 스님은 당대의 평가보다 후대의 필요에 따라 훨씬 강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그에 관한 설명이 모순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전승이 나오게 된 배경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러할 때 역사적 진실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다. 

도선 스님의 출계(出系)에 대해 “국사의 휘(諱)는 도선이요, 속성은 김 씨이며, 신라국 영암사람이다. 그 선대와 부조(父祖)는 역사에서 기록이 빠졌다. 혹은 태종 대왕의 서손이라고 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 설을 따를 때 스님은 영암지역으로 이주한 신라 중앙귀족 후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후대에 신라 왕실과 연결을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한편 898년 옥룡사에서 열반하였다고 한다. 당시 옥룡사가 있는 광양지역은 후백제 견훤의 세력권이었다. 따라서 스님이 왕건과 정치적으로 연결 짓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논란도 있다. 특히 비문 앞부분의 출생과 관련된 설화적인 내용에 주목하다 보니 비명을 통해 알 수 있는 여러 사실을 놓치기도 한다. 

최유청이 쓴 비명이 적힌 비석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비명의 내용만 조선 성종 때 문신 서거정이 펴낸 ‘동문선’에 수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이 비명은 ①비문의 찬술 배경 ②선승으로서의 도선의 일대기 ③도선이 풍수지리설을 터득하게 된 내력 ④도선이 왕건 탄생을 예언하고 고려 창업에 조력한 이야기 ⑤찬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스님의 탄생에 대해 세계(世系)와 부계(父系) 기록이 빠졌다고 하면서도, 모계를 중심으로 출생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모친 강 씨의 꿈에 어떤 사람이 광채 나는 구슬을 한 개 주면서 삼키라 하였는데 삼킨 후 태기가 있었다. 만삭이 되도록 매운 것, 비린내 나는 것들을 가까이하지 않고, 오직 독경과 염불에만 뜻을 두었다. 이미 젖 먹을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아주 달랐고, 어릴 때 장난을 하든지 울 때도 그 의향이 마치 불법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음이 있었다. 그의 부모가 반드시 유명한 승려가 될 줄 알고 마음속으로 중이 되기를 허락했다.”

주몽의 탄생신화와 도선의 출생설화

도선의 모친 강씨가 꿈속에서 구슬 하나를 삼킨 후 도선을 낳았다는 위 얘기는 도선의 출생과 관련된 태몽이라고 처리될 정도로 지극히 단순하여 설화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같은 도선의 출생과 관련된 얘기가 조선 시대의 여러 기록에 있는 점이 주목된다. 즉, ‘세종실록지리지’(전라도 나주목 영암군 조), ‘신증동국여지승람’(영암군 최씨원) 등 조선 초기의 역사서를 비롯하여 ‘해동역사’ ‘지봉유설’ 등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역사서, 그리고 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부에서 간행한 ‘일행선사전발록’ ‘고려국사도선전’ 등 여러 문헌에 보이고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나타난 도선의 출생 관련 이야기는 최유청의 서술과는 차이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영암군 고적 조에 “민간에 전하기를 신라인 최 씨 집 정원 가운데 길이가 한 장쯤 되는 오이가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최 씨 딸이 그것을 먹었더니 임신이 되었고 얼마 안 있어 아들을 낳았으나 부모가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밖에 내다 버렸다. 그랬더니 비둘기(학, 독수리, 갈가마귀)들이 보호하여 기르고 있었다. 이를 본 최 씨 부모가 괴이하게 여겨 데려다 키우니 장성하여 승려가 되었다. 도선이라 이름 불렀다 한다. 도선은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선사에게 지리에 관한 법을 배우고 돌아왔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말하자면, 도선의 출생에 관한 조선시대의 기록이 ‘오이를 먹고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비둘기와 같은 새들이 키웠다’는 등, 최유청이 찬한 비문의 내용보다 설화적인 요소가 많음을 보여준다. 유교적 이념이 강조된 조선시대의 기록이 고려시대의 그것보다 오히려 전승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점에서 의아하게 생각된다. 조선시대에 설화적인 모티브가 강조된 출생 설화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설화의 모티브가 고구려 계통의 신화와 신화적으로 볼 때 유사성이 많다는 연구가 있다.

가령 “부여 하백의 딸 유화에게 햇빛이 비추더니 임신을 하였다. 그리고 닷되들이 만한 큰 알을 낳았다. 금와가 이를 이상히 여겨 그 알을 개와 돼지에게 주었더니 다 먹지 아니하였고, 또 이를 길바닥에 버렸더니 소와 말이 밟지 않고 피해갔다. 다시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아와 날개로 덮어 안았다. 왕이 그 알을 쪼개보려 하되 잘 깨어지지 않으므로 드디어 그 어미에게 도로 주었다. 그 어미가 물건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데기를 깨뜨리고 나왔다.”는 삼국사기에 기술되어 있는 주몽의 출생 설화와 구조가 비슷하다.

도선 설화와 주몽 신화는 약간의 소재의 차이만 있을 뿐, 큰 틀에서의 구조가 동일함을 볼 수 있다. 두 신화 모두 모친은 결혼하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게 된다. 임신한 계기 역시 ‘해’나 ‘오이’로 남성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주몽과 도선은 태어나자 마자 모두 버려지지만, 새와 짐승들이 보호해주어 살아남게 된다. 이렇게 신기하게 태어난 주몽은 건국 영웅이 되고, 도선은 불교 영웅이 되고 있다. 이처럼 두 영웅들이 비슷한 설화 구조를 갖게 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

삼국사기에 수록된 고구려의 건국신화인 주몽 탄생신화는 오래 전부터 구전되고 기록에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주몽의 탄생신화와 도선의 출생설화 모티브가 비슷한 것은 후대 어느 시기에 이르러 도선을 주몽과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생기며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이를테면, 국초부터 태봉이라는 국호를 고려로 바꾸는 등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시대에 따라 나타나곤 하였다. 무신 정권기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편찬한 것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김부식이 찬술한 삼국사기가 교과서에도 나와 있듯이 신라 중심 사관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통설에 대해 한마디 하고자 한다.

고구려 건국과 관련된 신화적 사실을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상세히 다루고 있는 것을 볼 때, 김부식이 단순히 신라 중심 사관에서 벗어나 있다고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선적인 해석이라 생각한다. 김부식은 유교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면서도 고려 건국의 모델이 되었던 고구려 역사의 신비성을 부각시킴으로써 고려역사의 상징성을 부각하려 했었던 것이다.

결국, 도선의 탄생설화가 주몽의 탄생신화가 비슷한 구성을 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역사 인식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도선의 출생과 관련된 모티브가 주몽과 비슷하다는 것은 도선의 출생설화가 형성된 시기가 적어도 고구려 계승의식이 강조되었던 고려시대로 보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도선과 관련된 출생설화의 원형은 아무래도 최유청이 찬한 비문에 있는 내용이 아니라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시대의 문헌에 남아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최유청이 비문을 작성할 때 주몽 신화와 유사한 도선 탄생설화가 전승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비 부분은 생략한 채 선승으로서 풍수지리 및 태조 왕건과의 관계만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도선의 비문이 찬술되기 직전에 완성된 삼국사기에서 주몽의 출생신화가 자세히 다루어졌기 때문에 그와 유사한 구조를 지닌 도선 설화를 가지고 비문을 지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최유청은 도선의 탄생설화를 보다 현실적인 표현으로 바꾼 대신에 풍수지리를 끌어들여 도선과 태조 왕건과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려 하였다. 유교적 통치질서를 강조함으로써 요동치는 고려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완성되고 있던 인종 말에 도선의 비문 찬술 작업이 추진되었다는 것은 도선을 통해 고려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말하자면, 삼국사기나 도선비문 편찬이 모두 통치체제 재정비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설화적인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본래 편찬의 목적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최유청은 이 점에 대해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라 하겠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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