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38-마한의 정체성 상징, 영암 고분

신연리 고분 / 1993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신연리 9호 고분은 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곱은옥, 대롱옥, 흙구슬 등 여러 종류의 구슬이 다량 출토되었다. 출토된 구슬은 '마한인은 금은보다 구슬을 더욱 중시했다'는 중국 기록으로 보아 마한을 상징하는 중요한 표식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신연리 고분 / 1993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신연리 9호 고분은 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곱은옥, 대롱옥, 흙구슬 등 여러 종류의 구슬이 다량 출토되었다. 출토된 구슬은 '마한인은 금은보다 구슬을 더욱 중시했다'는 중국 기록으로 보아 마한을 상징하는 중요한 표식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필자는 요즘 들어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부쩍 강조한다. 정체성은 자존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상대를 존중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기 열등감이 강하여 늘 욕구 불만에 가득하고 남에 대한 배려도 약하다. 논어에서 말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은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말라는 말이다. 곧 주체성을 지니되 상대에 대한 배려를 이야기하고 있다. 글로벌 사회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공자님 말씀을 현재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이 상호 유기적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화이부동’의 단어 하나로 확인할 수 있다. 영암은 지리적으로 해상으로 열려있어 외래문화와 교류·융합이 활발히 이루어져 지역민들이 개방적인 사고를 지녔다. 이러한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현재 서울 숭실대 박물관에 있는 ‘傳 영암출토 거푸집’이다. 왜 트롯가수 하춘화가 영암이며, 바둑 천재 조훈현이 영암인인가 하는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는 마한시대의 역사적 전통이 현재에 오롯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영암신문 1면 머리기사에 미암중학교 신입생이 1명도 들어오지 않아 학교를 휴교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영암이 마한의 영광을 찾기는커녕 역사에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영암역사를 보존하면서 발전할 수 있겠는가 하는 방법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필자는 그 실마리를 마한에서 찾으려 한다. 곧 상대에 대한 배려가 넘쳤던 이 지역의 개방성은 외지인들이 이 지역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여기게 할 것이다. 삼호읍이 영암인구 절반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다. 그들이 마한의 역사를 그들의 역사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암은 국내 최대의 옹관묘 집단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마한의 문화유산을 어떻게 정리하고 콘텐츠화하여 우리 지역의 정체성을 밝히고 나아가 마한문화가 한국 고대사의 원형임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일을 체계적으로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미 발굴 조사된 마한의 유적·유물에 역사적 생명력을 불어넣어 마한사회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야 할 것이다.영암지역은 우리나라 최대의 옹관묘가 집단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유적의 규모에 비해 마한 유적 발굴사업은 상대적으로 미치지 못하고 있다. 영암군이 주도적으로 나서 전라남도와 힘을 합하여 체계적인 발굴, 조사하여 마한유적을 정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는 최근 영암의 어느 지역에서 주민들에게 마한을 설명할 기회를 가졌다. 그들에게 필자는 마한이 대한민국의 뿌리이고, 그 마한의 중심지이자 문화의 발상지가 영암임을 강조하였다. 

사실, 사람들에게 마한은 너무나 먼 이야기이고, 더구나 그동안 백제 중심으로 인식된 탓에 마한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더욱 영암의 마한은 심지어 영암인들에게조차 낯선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현재까지 확인된 고분 수효나 규모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대표적 지역이고, 출토 유물에서 확인된 특징들은 이 지역이 마한의 중심지임을 입증할 뿐 아니라 마한의 정체성을 밝히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하겠다.  

옹관 2개 이은 합구식 금계리 유적

이미 본란을 통해 살핀 바 있지만, 오늘은 쌍무덤 외에도 영암 마한을 특징 짓는 유적을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금계리에 있는 ‘금계리 유적’이 있다. 이 유적은 2004년 목포대 박물관에서 발굴보고서가 나왔는데, 주구토광묘(26기), 토광묘(5기) 그리고 옹관묘(11기)가 확인되었는데 주구토광묘→옹관, 토광의 순으로 조성되었다. 이 고분에서 주목되는 것은 단옹식 합구식, 삼옹식의 옹관의 형식 가운데 목의 구분이 확연한 전용 옹관 2개를 연이어 만든 합구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조영 시기는 출토 옹관들이 대부분 선황리식으로 알려진 고식 옹관을 이용하였다는 점에서 기원후 3세기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조영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전용 옹관 고분의 시작인 선황리와 거리가 불과 4㎞도 안되는가까운 거리라는 점을 고려할 때 두 고분의 축조 세력이 동일한 집단은 아닐까 추정된다. 선황리 유적과 함께 필자가 영암의 마한 유적에서 가장 강조하는 고분 유적은 옥야리 방대형 고분이다. 5세기 중반 조영된 것으로 보이는 이 고분의 주구에서 다량의원통형 토기가 나왔는데 영암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된 원통형 토기이며 호형과 통형의 속성이 결합된 상태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옥야리 방대형 고분의 축조 과정에 사용된 회색 점토 덩어리(토괴)로 분구를 방사상과 동심원상으로 구획한 후에 분할하여 성토하는 방식은 왜계 양식과 가야계 양식을 융합하여 독자적인 옥야리식으로 완성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옥야리식 토괴 양식은 다시 일본의 고분 축조과정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처럼 옥야리 방대형 고분의 축조과정에서 보이는 양상은 토착문화를 바탕으로 외래문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고유문화로 만들어내는 능력이 영산강 유역의 고대 마한의 문화 수용성을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필자는 주목하는 것이다.

한편 남해만과 삼포강이 바라보이는 구릉상에 있는 신연리 고분군은 15기 이상의 고분이 열을 지어 있는 신연리 1151-2번지 일원의 고분군과 역시 같은 신연리242-2번지 일원의 연소 고분이 있다. 이 두 고분은 같은 신연리 행정구역 안에 있어 언뜻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조영 시기가 다르다는 점에서 단순 비교하는 것은 성급하다.

독립된 상태의 연소 고분

영암지역은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내동리 고분군, 와우리 옹관묘, 신연리 고분군, 자라봉 고분군, 옥야리 방대형 고분 등 49건, 187기의 고분들이 산재되어 마한왕국의 중심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들 고분이 대체로 군집을 이루고 있는데 반해 연소 고분은 독립된 상태로 위치하고 있어 주변 고분과는 분포양상에서 차이를 보인다.1993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신연리 9호 고분은 4세기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고 곱은옥, 대롱옥, 흙구슬 등 여러 종류의 구슬이 다량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특히 구슬은 누차 언급하였다시피 ‘마한인은 금은보다 구슬을 더욱 중시했다’는 중국 기록에 있는 것처럼 마한을 상징하는 중요한 표식이었다. 이구슬이 신연리 9호분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은 이곳이 마한의 심장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더구나 이 지역에 많은 고분이 밀집 조영되어 있는 것은 이곳이 정치적으로도 강력한 세력의 근거지였음을 말해준다.그런데 신연리 9호분의 고분 조영 시기가 4세기라는 추정이 일리가 있다면, 이미 4세기에 마한의 강력한 왕국이 이곳에 형성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곧 필자가 추정한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을 포함하는 내비리국의 초기 모습을 신연리 9호분 고분에서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3세기 후반 백제가 목지국을 멸하면서 남하하는 것에대항하여 3세기 말 결성된 마한 남부 연맹들의 모습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2017년 전남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한 연소 고분은 선분구 후매장형이고 일정한범위의 정지면을 구축하고 그 위에 성토한 후 매장 주체 시설을 구축하고 마지막에성토하는 분구 동시형이다. 특히 분구는 1단계 정지작업→2단계 구축묘광→3단계 매장주체 시설 축조 및 분구 성토 →4단계 분구 완성의 단계로 조영되었다. 이 고분은 시기가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어 앞의 신연리 9호분보다 시기가 훨씬 뒤떨어진다. 따라서 두 고분의 성격을 현재의 행정구역이 같다는이유로 쉽게 동일시하는 것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다만, 다른 고분의 밀집 지역과 떨어져 있는 것은 기존 세력과는 다른 것으로 보이나 이 고분 역시 호형 토기, 장란형 토기, 유리구슬 등 마한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는 유물들이 출토된 것으로보아 같은 마한 세력이 축조한 고분임이 분명하다.이렇듯 영암지역의 마한 고분은 비록 조사는 많이 되어 있지 않지만, 고분 하나하나가 모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대부분임을 확인할 수 있겠다. 마한 시대의 도래를 맞이하여 새로운 고분의 발굴조사도 중요하지만 기 발굴된 고분에서출토된 유물들을 문헌 기록과 비교하며 그 유물·유적의 성격을 찾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스토리텔링하여 영암인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쉽게 알게 하는 작업도 함께 해야 한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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