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갑사 도선국사비 ③
월출산 벚꽃 백 리 길(74)
■ 도갑리1구 죽정마을(18)

도선국사비각 전경  400년 가까이 거북 비만 덩그러니 남아 소풍 나온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이곳에 보호각이 세워진 것은 불과 20여 년 전 일이다.
도선국사비각 전경  400년 가까이 거북 비만 덩그러니 남아 소풍 나온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이곳에 보호각이 세워진 것은 불과 20여 년 전 일이다.

도선의 마을 구림(鳩林)

도선국사비는 1636년(인조 14년) 4월에 시작하여, 1653년(효종 4년) 4월에 완공했다. 무려 17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기계 장비 하나 없이 오직 수공으로만 제작했으니 옛사람들의 수고로움과 정성이 어떠했을지 상상하면 절로 감탄이 나온다. 그런데 비문 끝에는 다음과 같은 특이한 내용이 적혀 있다.

“청음(淸陰)과 신독재(愼獨齋) 양(兩) 선생의 성(姓)과 휘(諱)는 언젠가 무도한 자가 깎아 없앴다. 무진년(숙종 14, 1688) 10월 김기창(金箕昶)이 고쳐 새긴다.”

청음은 김상헌의 호이고 신독재는 김집의 호이다. 척화파 김상헌은 문곡 김수항의 조부이며, 우암 송시열의 스승인 김집은 사계 김장생의 아들이다. 둘 다 우계 성혼의 학통을 이어받은 서인에 속한 사람들로 북벌론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인조반정 공신들의 특권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계로 반대파 사람들이 도선국사비에 있던 이름을 훼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도선국사비 후면에 기록된 내용을 알아보기로 한다.

[후면]
국사(國師) 도선(道詵) 비음명(碑陰銘)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전라도(全羅道) 영암군(靈巖郡) 월출산(月出山) 도갑사(道岬寺) 국사(國師) 도선(道詵) 비음명(碑陰銘)과 그 서문.

영암군에 월출산이 있는데, 산이 매우 기이하고 수려하여 한 도(道)의 으뜸이다. 국사(國師) 도선스님은 영암군 사람이다. 산속에 절이 있으니, 이름은 도갑사(道岬寺)이다. 세상 사람들이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천순(天順) 원년(元年)인 정축년(세조 3, 1457)에 신미(信眉)와 수미(守眉) 두 스님이 합심하여 중창하였고,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윤사균(尹士昀)이 그 기문(記文)을 지었다. 천순 정축년은 올해 임진년으로부터 190여 년 전이 된다. 절에 도선국사의 비가 있다. 언제 처음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이미 마멸이 심하다. 옥습(玉習)이라는 스님이 이를 다시 세우면서 백헌(白軒) 이상국(李相國)[李景奭]으로부터 비명(碑銘)을 받았는데, 대사는 또 나에게 비음(碑陰)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일찍이 『천중기(天中記)』를 보니 구림(鳩林)에 대한 기록이 있었는 바, 구림에 대해 『천중기』에서도 기록하였으니, (구림이) 천하에 알려진 지는 오래된 일이라 하겠다.

도선국사는 출생 과정에 이미 기이함을 보였으며, 또 그의 이름이 천하에 두루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지혜가 명민(明敏)하여 미래에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여 5백년간 사직이 공고(鞏固)할 터임을 알았으니, 이른바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천안天眼)을 통득한 대사를 어찌 지술(地術) 일면(一面)만을 정통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또한 기이한 일이리라. 이를 명(銘)하여 이르노니,

월출산의 높고 기이한 바위와 바위
생각건대 이 영산(靈山)이 신령한 분 탄생
시켰네
신령한 분 내렸으니 어떤 분인가
그 인물 도선국사 그 분이라네.
국사 이 분 처음으로 탄생할 때에
범인들과 아주 달리 기이하여서
빨래하던 어머니가 오이를 건져 먹고
감응하여 국사의 몸 임신하였네.
낳자마자 숲속에 던져버리니
비둘기들 날개 펼쳐 품어주었네
이를 보고 그의 부모 이상히 여겨
다시 거두어 아이를 양육하였네.
국사께서 태어난 일 신라 때지만
그 일은 지금까지 전하여 오니
버려졌던 바위 이름 국사암(國師巖)이고
태어났던 마을 이름 구림리(鳩林里)라네.
새들이 후직(后稷)을 덮어준 일과
차가운 얼음 위에 버려진 일이
생각건대 여기 이곳 구림의 일과
그 기이함 무엇이 다르랴.
예전에 신령한 스님이 있었다더니
도선국사 바로 그런 분이 아니랴
아름답고 아름답다 도선국사여,
용상(龍象)들 가운데서도 걸출한 분이라
네.
통달 못한 학술이 하나도 없어
청오(靑烏)[風水]는 그 가운데 하나였을 

꿈속에서 당(唐) 황제를 감응케 하여
조서(詔書) 내려 찾아와 초빙해 갔네.
국사 이에 중국에 들어가서는
일행(一行)에게 술법 배워 뒤를 이었네
국사께서 묘한 비결 남김없이 터득하고
다시금 우리나라 동국(東國)으로 돌아왔
다네.
이윽고 송악(松嶽)의 터를 살펴서
오백년 이어질 나라 기반 닦게 하였네.
국사는 진리의 눈 법안(法眼)이 있어
대천세계(大千世界) 환하게 꿰뚫어 보았
으니
길함과 흉함, 융성함과 쇠퇴함 따위
일어나기 이전에 미리 알았네.
국사께서 말하길 우리 동국은
그 형국이 마치 배와 같으니
배에 만일 진추(鎭硾)가 없다면
표류하지 아니할 리 어찌 있으랴.
땅의 형세 또한 그러하거니
지세를 누르는 일 어찌 그칠까
동국 우리나라 모든 국토인
사방 수천여 리 방방곡곡을
멀거나 가까운 곳 가리지 않고
국사께서 찾지 않은 곳 없었으니
곳곳마다 절을 짓고 탑을 세워서
높은 산과 큰물을 진압하였네.
월출산에 자리 잡은 절이 있으니
그 절 이름 바로 도갑사라네
달이 솟는 월출산은
국사께서 탄생한 곳
도가 머무는 도갑사는
국사께서 경영한 곳
국사는 비록 떠나갔지만
어찌 무정하게 잊을 수 있을까
절에 한 조각 빗돌을 세워
국사의 자취를 새겨두었네.
그 빗돌 이미 심하게 닳고 떨어져
문도들이 힘을 모아 다시 세우니
상국(相國)이 찬술한 그 비문이여
절묘하고 격조 높은 명문이거늘
청탁의 말 거듭 헛되게 하였기에
비문에 잇대어 비음명(碑陰銘)을 덧붙이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겸 지제교(知製敎) 정두경(鄭斗卿)이 비문을 짓고, 성균진사(成均進士) 김비(金棐)가 글씨를 쓰고, 성균진사 김시간(金時暕)이 전액을 쓰다.

숭정(崇禎) 병자년(인조 14, 1636) 4월 일에 시작하여, 계사년(효종 4, 1653) 4월 일에 세우다. 비의 높이는 18자이고 너비는 9자이다. (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원)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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