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45] 선각국사 도선과 고려왕조(下)

도갑사 해탈문 / ‘비보사찰’은 중국에는 거의 없는 것으로, 우리나라 풍수의 커다란 특징이다. 도선 스님은 국가의 힘을 이용하여 수많은 사찰과 탑을 세워 불교를 일으켰다. 도갑사 역시 신라 말 국사 도선(道詵)이 창건했다. 국보 제50호로 지정된 도갑사 해탈문은 1473년(성종 4)에 중건됐다.
도갑사 해탈문 / ‘비보사찰’은 중국에는 거의 없는 것으로, 우리나라 풍수의 커다란 특징이다. 도선 스님은 국가의 힘을 이용하여 수많은 사찰과 탑을 세워 불교를 일으켰다. 도갑사 역시 신라 말 국사 도선(道詵)이 창건했다. 국보 제50호로 지정된 도갑사 해탈문은 1473년(성종 4)에 중건됐다.

도선 탄생설화에 대한 의미

지난 호에 도선과 주몽의 탄생설화가 비슷한 구성요소가 있음을 언급했다. 이처럼 고려의 전신인 고구려의 건국 시조인 주몽을 도선과 비교하려 한 것 자체가 도선이 고려 사회에서 차지한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스님이 기존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과정에서 풍수지리 이론을 끌어들여 왕건의 집권을 합리화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스님은 왕건과 대립하고 있던 후백제 출신이기 때문에 그가 갖는 상징성은 더욱 컸다.

국초부터 고려는 국가 차원에서 스님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과정에서 신화적 구성요소가 담긴 스님의 탄생설화가 만들어졌을 법하다. 더구나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탄생신화와 연결을 지음으로써 고구려 계승의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이중효과까지 노렸다. 스님이 고려 건국 이전에 이미 입적하였기에 그의 탄생과정 등에 극적인 요소를 가미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에서 풍수지리설이 강조되고 있다. 이후 서경 길지설, 남경 길지설, 그리고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에 이르기까지 풍수지리설이 고려왕조 내내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이용되고 있었다. 비문에 스님이 옥룡사에 주석하기 이전에 지리산 ‘異人’으로부터 풍수법을 전수받는 이야기, 태조 왕건이 태어날 집터를 보아주어 고려 건국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는 내용, 후세 사람들이 지리를 말하는 자는 모두 도선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고 하여, 스님이 ‘지리의 종조’라는 평가를 받는 내용 등이 있다. 스님이 풍수지리를 알게 된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도선이 아직 옥룡사에 주석하기 이전에 지리산 구령(鷗嶺) 암자에 머물러 있을 때였다. 어떤 ‘異人’이 다가와 참배하고 도선에게 아뢰기를, ‘저는 세상을 멀리하고 깊은 곳에 산 지 수백 년 가까이 됩니다. 인연이 닿아서 조그마한 재주를 바치려 하오니 존사께서 혹시라도 저급한 술법이라 비천하게 보지 않으신다면 다음 날에 남해의 강변에서 마땅히 전해드리겠습니다. 이 역시 대보살(大菩薩)이 세상을 구제하고 사람을 제도하는 법입니다.’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도선은 이를 기이하게 여겨 약속 장소로 찾아갔더니 그 사람이 있어 만났다. (그 사람은) 모레를 모아서 산천의 순(順)하고 거역하는 형세를 보여줬는데 돌아보니 이미 없었다. 그곳이 지금 구례 현의 경계에 있고, 마을 사람들이 ‘사도촌’이라고 부른다. 도선은 이에 활연히 깨달음이 생겨 더욱 음양오행의 술법을 연구하여 비록 금단(金壇)과 옥급(玉笈)의 깊은 비결이라도 모두 가슴 속에 새겨 두었다.” 

도선과 풍수지리

스님이 이인(異人)으로부터 풍수법을 전수받은 시기는 옥룡사에 주석하기 이전이니까 대략 38세 이전의 시기임을 알 수 있다. 15세 되던 해에 화엄사로 출가하여 화엄학을 공부하였던 스님이 20세 때 “대장부가 마땅히 법을 떠나서 고요히 살아야 할 것인데 어찌 문자에만 부지런히 종사할까”라고 하며 언어와 문자를 강조하는 교종(敎宗)을 거부하고 선종(禪宗)으로 개종하며 혜철의 문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서 “말 없는 말과 법 없는 법을 가르치니 환하게 깨달았다”는 데서 스님이 선(禪)의 깊은 경지에 도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스님이 풍수지리학도 함께 배웠을 것이라 생각된다.

비문에는 ‘異人’으로부터 스님이 풍수지리를 배웠다 한다. 조선 초 학자 서거정은 ‘필원잡기’에서 “도선이 출가하여 입산 수련하는데 어떤 하늘의 신선이 하강하여 천문·지리·음양의 술법을 전수해주었다”하여 지리산의 산신에게 배운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산신에게 배웠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우므로, 스승인 혜철로부터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곧 혜철은 중국 유학 과정에서 당시 중국의 풍수법을 습득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 말 선승들은 풍수지리에 대해 나름대로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풍수지리학의 대가인 최창조 교수는 만약 스승 혜철로부터 풍수학을 공부하였다면 당연히 이 사실을 밝혔을 것이다. 따라서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단순하게 ‘異人’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도선에게 풍수지리학을 전수한 ‘異人’은 혜철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지리학을 공부하였던 전통 풍수학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이야기한다. ‘異人’이 ‘세상을 멀리하고 지리산의 깊은 곳에 산 지 수백 년이 되었다’는 것에서, 그리고 異人이 도선을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보이는 신비로운 행태 등은 어쩌면 ‘異人’이 전수한 풍수지리는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지리 체계일 가능성이 있다.

중국의 음양오행설에 의한 풍수지리설이 불교의 전래와 함께 전래되기 훨씬 이전에 우리나라에도 고유의 전통적인 지리 관념이 있었다. 국도(國都)를 정할 때 경제적·군사적 요건을 살핀다든가, 산천신앙 같은 것이 그러한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 이론적 체계를 갖추고 유입된 중국의 풍수지리설이 더해지면서 토착화된 풍수지리 사상이 형성되어 왕국이나 왕릉을 세우는 데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한다. 태종 무열왕릉이나 김유신릉의 배치구도에서 보이는 풍수지리학적 흔적들을 통해 이러한 추측을 하게 된다.

도선과 비보사찰

비문에 도선 스님이 ‘異人’을 만나고 나서 깨달음을 얻어 더욱 음양오행을 공부했다고 하는 언급된 부분을 필자는 주목하고 싶다. 말하자면, 이미 스승 혜철을 통해 중국의 풍수지리학에 대한 식견을 가졌던 도선 스님은, ‘異人’으로부터 전통적 지리학 체계를 습득하며 본격적으로 풍수지리학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도선 스님의 풍수지리학은 중국의 풍수지리학을 우리의 전통 풍수체계에 융합시켜 우리 실정에 맞는 풍수지리학을 체계화했다고 본다. 여기에 도선스님의 풍수지리학의 특징이 있다 하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도선 스님의 풍수지리학은, 지리산의 ‘異人’이 도선에게 전하며 “이 역시 대보살(大菩薩)이 세상을 구제하고 사람을 제도하는 법입니다”라고 한 말에서, 대승적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말하자면, 도선 풍수의 지향하는 바가 적극적인 사회성의 실천에 있음을 말해준다. 곧 풍수지리설이 중앙정부로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려는 지방 호족들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사회성이 구체적으로 반영되어 나타난 또 다른 사례가 ‘비보(裨補)’ 사찰이 아닌가 한다. 비문에 “신인(異人)이 모래를 모아 삼국도(三國圖)를 그린 곳에 삼국사(三國寺)를 개창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초기의 사찰비보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를테면, 자연적 형국이 좋지 않은 곳에 탑이나 사찰을 세워 좋은 것으로 바꾼다는 것이 ‘비보’인데, 이를 통해 수많은 사찰과 승탑, 불상 등이 세워졌다. 광양 백계산 운암사, 나주 금성산 심향사 등을 비롯하여 확인되고 있는 것만 해도 수백 개에 달하는데, 대부분 도선과 연결되고 있다. 훈요십조 등을 통해서 ‘비보’ 이념이 고려의 국가이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풍수지리설과 불교가 결합하면서 나타난 특징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찰비보는 중국에는 거의 없는 것으로, 우리나라 풍수의 커다란 특징이다. 국가에서는 ‘비보’의 목적이 아닌 사찰의 창건은 금지했다. 이는 ‘비보’를 통하여 현실 정치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국가 의도의 반영인 셈이다. 반면 도선은 국가의 힘을 이용하여 수많은 사찰과 탑 등을 세워 불교를 일으켰던 것이다. 여기에 도선의 풍수지리학이 지닌 정치사회적 의미가 있다 하겠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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