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39] 고구려와 동맹을 결성한 마한대국 ‘침미다례’(하)

최근 필자는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작성한 ‘백제계 도래인 정체성에 대한 일 고찰’이라는 논문(선사와 고대 70, 2022)을 학회지에 게재하였다. 도래인(渡來人)은 한반도에서 왜(일본)에 건너간 이주민을 지칭하는 말이다. 도래인 대부분이 마한·백제계 출신이어서 ‘도래인’ 그러면 마한·백제계를 생각한다, 하지만, 백제와 통합 이전인 6세기까지는 도래인을 구성하는 대부분은 마한계라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영산강식 토기’라 명명하는 토기들이 일본에서 대량 확인되고 있는 데서 이러한 추측을 할 수 있다. 박사 왕인도 당연히 마한계 인물이라 하겠다. 다른 지자체는 몰라도 영암군·영암사람이 왕인을 마한계 인물로 강조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우리 집에 귀하게 큰 자식이 밖에서 대접을 받는다는 옛말을 재론하지 않겠다. 

침미다례는 고구려·백제와 대등한 관계

이전까지는 백제계보다는 기원후 369년 그러니까 근초고왕 24년에 백제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면서 마한이 완전히 백제에 복속되었다고 1950년대 말 이병도가 주장한 이래 적지 않은 문헌학자들이 동의하고 지금도 교과서에 정설로 남아 있다. 하지만, 필자가 누차 강조했지만 고고학적으로 6세기 중엽까지도 마한의 독자적 문화요소가 영산강 유역에 그대로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양직공도 백제국사 방소국에 마한왕국 이름이 보여 4세기 후반 마한 병합설은 사실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이에 따라 기존의 4세기 후반 전라도 지역의 마한이 백제에 복속되었다는 주장을 한 학자들도 그들의 주장을 점차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 지역 역사학자들조차 4세기 후반 마한 병합설을 아직도 신뢰하고 있어 적이 우려스럽다.

필자가 예전에 지금 살피고 있는 이 주제를 언급할 때 고구려–백제–침미다례의 삼자 관계를 함께 살펴야 함을 언급한 바 있다. 침미다례가 고구려·백제와 대등한 나라였음을 함축한다. 최근 침미다례를 살핀 연구자는 강진·해남 지역의 포구 세력인 침미다례가 왜와 통교하는 백제가 지배할 필요가 있어 공략했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의 주장을 보면 침미다례는 작은 포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연 포구에 불과한 곳을 도륙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까지 공격을 하였을까 의문이다. 강진·해남반도의 대국인 침미다례를 마한 연맹체를 구성하는 국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강진·해남반도에 대국이 분명히 존재하였다고 믿는 필자는 마한과 백제의 관계를 다룰 때는 주변 이해 당사국인 가야·왜·고구려와의 관계도 함께 살펴야 함을 이야기한 바 있다. 예컨대 필자가 살핀 대로 6세기 중엽까지 영산강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서남부에 마한의 세력이 강대하게 버티고 있었다면, 백제는 기존의 서남해로 즉, 낙랑-서해안-남해안-김해-쓰시마섬-왜로 이어지는 해로를 통해 이루어졌던 왜나 가야와 통하는 경제활동이나 교류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그것이 백제가 내륙을 통한 진출, 즉 마한과 가야의 변경에 속한 섬진강을 거쳐 경상도 남해안을 우회하는 새로운 루트를 개발하려 한 것이다. 백제가 침미다례 등 영산강 유역의 마한 세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를 좀 더 살피기 위해 당시의 외교 관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366년 근초고왕 21년, 368년 동 왕 23년 두 차례에 걸쳐 백제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고 있다. 

① 3월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에 예를 갖추어 빙문(聘問)하였다.
② 신라에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주었다.

백제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고 있는 내용이지만, 신라는 이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고구려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고구려와 신라가 백제를 견제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양국이 백제를 견제하였던 것은 백제가 목지국을 멸하고 마한의 맹주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342년 고국원왕 때 중국 전연에 패한 고구려가 요동으로 진출이 차단되자 남쪽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한 군현인 대방을 무너뜨리고 북상 중인 백제와의 일전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한편 같은 삼한연맹체로 백제와 경쟁하고 있던 신라 역시 백제의 팽창을 우려스럽게 보고 있었다. 백제를 견제하려는 신라와 고구려의 인식이 서로 일치한 셈이다. 이러한 양국의 관계는 4세가 말 내물왕 때 신라가 가야와 왜 연합군의 공격을 받자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게 된 배경이다.

치열한 경쟁 관계의 고구려와 백제 

침미다례 역시 마한의 새로운 맹주로 들어서는 백제에 대한 견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침미다례는 한반도 서남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어 백제의 대왜 진출을 견제하는 데 가장 유효한 왕국이었다. 백제가 침미다례를 ‘남만(南蠻)’이라 하여 비칭을 사용한 것은 양국 관계가 매우 불편함을 말해주고 있다. 즉, 백제의 입장에서 침미다례가 그들의 국익에 충실한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고구려, 신라, 침미다례 등 마한 남부 세력으로부터 철저히 견제를 받았던 백제로서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이들 가운데 왜와 연결될 수 있는 해상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침미다례에 대한 공격이 시급하였다. 특히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밀접한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던 고구려는 침미다례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때 주목되는 것이 369년 3월에 이어 벌어진 9월, 고구려와 백제의 치열한 전투였다. 특히 9월 전투에서는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무려 2만여 이상의 군대를 동원하여 백제를 압박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가 침미다례를 지속적으로 압박할 상황이 되지 못하고, 그 압박 강도도 그리 강력하지 못하였다. 

백제가 침미다례와 전투에서 침미다례를 ‘도륙(屠戮)’을 했다는 표현을 썼다. ‘도’란 짐승을 잡는다는 뜻이다. 백제가 이러한 표현을 침미다례에게 썼다는 것은 침미다례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음을 말해준다. 어쩌면 369년 9월에 있었던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대규모 공격도 백제가 침미다례에 집중한 틈을 타서 고구려가 백제를 압박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고구려의 남진에 맞서 백제가 북방 영역에 관심을 기울일 때, 침미다례를 포함한 마한 남부연맹은 그들 중심의 강력한 연맹체를 건설하여 갔다.

백제는 왜와 연합전선을 펴면서 시도한 마한 정벌은 성공하지 못한 채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투에서 사살하는 전과를 냈으나 고구려의 강한 반발만 불러일으켰다. 광개토왕·장수왕 때 이루어진 대규모 백제 공격이 이를 잘 말해준다.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차단하고자 국력을 소진하고 있을 때 영산강 유역의 마한 세력은 옹관으로 대표되는 영산강 유역의 정체성이 깃든 고유의 문화를 더욱 발전시켜나갔다. 고구려와 백제의 치열한 경쟁과 세력 쟁패전은 해남반도에 위치한 침미다례나 영산강 유역의 내비리국 등 마한 연맹체의 강국들이 그들의 세력을 확대해나가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침미다례는 369년 이후에도 해남반도에서 마한 연맹왕국의 리더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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