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43] 선각국사 도선과 고려왕조(上)

광양시 도선국사 마을 /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도선국사마을. 백운산 자락에 자리한 이 마을은 도선국사가 마지막으로 주석한 옥룡사가 있으며 동백나무숲이 천연기념물(제489호)로 지정되어 있다. 광양시는 농촌체험과 도선국사 유적체험 등을 즐길 수 있는 ‘도선국사마을’을 조성,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광양시 도선국사 마을 /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도선국사마을. 백운산 자락에 자리한 이 마을은 도선국사가 마지막으로 주석한 옥룡사가 있으며 동백나무숲이 천연기념물(제489호)로 지정되어 있다. 광양시는 농촌체험과 도선국사 유적체험 등을 즐길 수 있는 ‘도선국사마을’을 조성,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전라남도 ‘2월의 으뜸숲’으로 1만여 그루 동백나무 숲이 아름다운 ‘옥룡사 동백나무숲’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도선국사가 마지막 주석한 절로 유명한 옥룡사를 감싸고 있어 더 유명한 동백나무숲은 아름다운 경관을 인정받아 천연기념물(제4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숲이 있는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에 농촌체험과 도선국사 유적체험 등을 즐길 수 있는 ‘도선국사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영암출신 인물이 다른 지역에서 추앙을 받는 사례는 이례적이다. 

필자는 작년 늦가을 도선국사의 창건설화가 있는 도갑사에서 열린 산사음악회를 다녀온 적이 있다. 깊은 가을밤 산사에 울려 퍼지는 가곡과 대중가요를 들으며 대중과 호흡하는 불교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였다. 산사음악회가 세속적인 느낌이라기보다 장엄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도선국사가 이 모습을 보았으면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생각해보았다. 마침 산사음악회가 열린 날 도선국사의 불교사상을 재조명하는 학술세미나도 열려 관심을 끌었다.

도선국사는 영암을 대표하는 인물의 한사람이라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도선국사에 대해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하고 그저 ‘풍수지리설’을 성립한 승려 정도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칭호가 ‘국사(國師)’ ‘성승(聖僧)’ ‘선승(禪僧)’ ‘도승(道僧)’ ‘신승(神僧)’ ‘풍수도참승‘ ’술승(術僧)’ ‘권승(權僧)’ ‘간승(奸僧)’ 등 극과 극을 달리하고 있다. 심지어 도선국사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지배 권력에 의해 가공된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을 정도이다. 이렇듯 스님을 보는 시각이 일정치 않기 때문에 ‘도선’이라는 인물에 접근하는 것을 조심스러워 한다. 이제 도선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때가 되었다. 불교사적인 측면을 떠나 ‘역사의 고장, 영암’을 구성하는 데 있어 영암인에게는 도선국사가 ‘마한’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역사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기를 바란다. 이미 필자는 본란을 통해 도선국사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 바 있다. 최근에 도선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 앞서 살핀 내용을 재정리하고자 한다.
 
백계산옥룡사승선각국사비명

도선국사에 대해서는 스님 자신이 남긴 사료는 없다. 그를 알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사료라고 하는 ‘백계산옥룡사승선각국사비명(白鷄山玉龍寺僧先覺國師碑銘)’조차 스님이 입적한 후, 250년이 지난 1150년에야 찬술되었다. 스님을 연구하는데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스님은 고려건국에 기여한 공으로 현종 대에 대선사, 숙종 대에 왕사, 그리고 인종 때 선각국사로 추증되었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오히려 승직이 높아지고 있다. 시대마다 스님을 필요로 하였음을 말해준다. 이는 스님을 이해할 때 반드시 그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을 함께 고려해야 함을 시사해준다. 

스님을 연구하는 이들이 자료 부족을 호소한다. 즉 스님 사후 250여 년이 지나 작성된 비문을 가지고 해석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연구가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1차 사료라고 하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역시 신라가 멸망(935)하고 200여 년이 지난 1145년과 300여 년이 지난 1281년에 각각 편찬되어 엄밀히 1차 사료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2차 사료라고 부르는 사람도 없다. 따라서 스님이 입적한 지 250여 년이 지나 비문이 찬술되었다 하여 사료적 가치를 의심하며, 설화와 관련된 해석에 치우쳐 스님의 행적을 살피려는 일부 연구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설사 설화적인 요소가 있다 하여도 설화가 전달하려 하는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백계산옥룡사승선각국사비명(白鷄山玉龍寺僧先覺國師碑銘)’은 고려 의종 4년 문신 최유청이 왕명으로 찬술하였다. 비명 머리말에 “생각하건대, 선각국사의 높은 도덕이 장하여 국가에 공업이 가장 깊으므로, 우리 선왕(인종)께서 여러 번 봉증(封贈)을 더하여 극도로 존숭하였으나, 그 행적을 지금까지 문장으로 전하지 못하는 것을 짐(朕)은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인고(父王 인종)께서 벌써 너에게 비명을 지으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공경히 할지어다”라고 하여 실질적인 논의는 이미 인종 때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인종 때는 1126년 이자겸의 난, 1135년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등으로 정국이 어수선한 때였다. 당시 인종은 외척 이자겸 가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는 조치들을 취하였다. 서경 세력을 끌어들여 이자겸 세력을 제거하고, 다시 김부식 등 개경파를 이용하여 묘청 등의 서경파를 견제하려는 과정에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일어났다. 인종 때는 고려 역사상 정치사적으로 혼돈과 격랑의 시기였던 셈이다.

이 무렵인 1145년, 인종의 명으로 찬술된 것이 유명한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 편찬은 어수선한 정치 질서를 유교의식의 고양을 통해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1281년 일연 스님이 편찬한 삼국유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의 전통과 관련된 이야기를 모아 놓은 ‘유사(遺事)’로, 삼국사기가 유교적 관점에서 생략한 전승들을 담았다는 점에서 높은 가치가 있다.

특히 삼국유사는 단군 건국신화가 최초로 수록되어 있는데, 단군을 하늘의 손자로 연결을 지음으로써 독자적인 역사의식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엿보이고 있다. 우리의 전통 계승을 강조하며 독자적인 역사의식을 주창하는 ‘삼국유사’가 나오게 된 데는, 고려가 원 간섭을 받으며 민족의 정체성이 상실되고 있는 것에 대한 위기감이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역사서를 포함하여 모든 기록이나 상징들은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물이나 사물을 분석할 때, 그 시대 상황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풍수지리학의 대가, 도선

도선국사 비명 편찬 논의가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이 이루어지던 인종 말엽에 이루어졌다는 것이 주목된다. 그리고 인종 말 편찬된 삼국사기에 이어 의종 초에 도선비명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곧 인종이나 의종 모두 유교와 불교를 통해 정치적 격동기에 휩싸인 고려사회를 헤쳐나가려는 의도가 있었다. 최유청이 찬한 ‘백계산옥룡사승선각국사비명’이 나오게 된 배경이라 하겠다. 이 비명 내용을 살필 때,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스님은 통일신라 말 전남 곡성을 중심으로 ‘동리산문’이라는 선종 종파를 형성하였던 혜철 스님의 제자였다. 유명한 선승(禪僧)이었다. 하지만 일반 대중들에게는 교과서에서 학습한대로 ‘풍수지리학의 대가’라는 단어에 익숙하다. 특히 고려 태조 왕건의 정치적 입지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해준 ‘송악길지설’을 주창한 인물로 더 알려져 있다. 많은 사찰이 풍수지리설을 근거로 터를 잡았고, 오늘날에도 묘(墓)를 쓸 때 이를 바탕으로 하는 등 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까지 나온 스님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풍수지리설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영암군이 일찍이 학자들의 학설을 묶어 편찬한 ‘선각국사도선의 신연구’(1988)라는 책도 크게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풍수지리설도 중요하지만, 선승으로서의 스님의 위치를 찾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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