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갑사 도선국사비 ②
월출산 벚꽃 백 리 길(73)
■ 도갑리1구 죽정마을(17)

매년 새해 아침이면 연하장을 보내주시는 선생님이 한 분 계신다. 
전국귀농운동본부를 창설하여 초대 본부장님을 맡아 귀농귀촌운동을 선도하셨던 여류 이병철 선생님이 그분이시다. 

2023년 한 해 동안 마음에 새겨둘 글자로 ‘성(省)’이라는 글자를 택하셨다고 한다. 
손수 쓰신 글씨와 함께 시 한 편을 보내주셨다. 도갑사 도선국사비 만나러 가기 전에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이 지면에 싣는다.

2023년, 새해를 품고 갈 한 글자를 생각하다가 ‘성(省)’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성(省)’의 자전적 의미는 ‘살피다. 깨닫다. 명심하다. 분명히 하다.’ 등으로 풀이되어 있는데 나에게 ‘멈추어 자세히 살펴본다. 돌아보며 살핀다.’라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며 살핌’, 또는 ‘자기의 마음을 반성하고 살핌’이라는 뜻의 ‘성찰(省察)’과 같은 의미로 여겨집니다.

「성(省)

언제쯤이었을까
어디쯤에서였을까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던 
그때, 그곳이

한사코 달려오기만 했을 뿐
여태 제대로 한번 살펴본 적 있었던가
지나왔던 그 길
달려가고 있는 이 길

갈수록 캄캄한 앞날
막다른 벼랑 길 위에서
달려가던 길 우선 멈추어
숨결을 고르고 다시 살펴보자

우리가 누구였던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자 했던지
달려왔던 그 길에 남겨진 것이 무엇인지

맨발로 땅을 딛고
푸른 들녘을 뜀뛰며
삶의 기쁨에
온몸 떨며 춤추었던 적이 언제였던지를」

- 이병철 여류(如流) 이병철. 시인, 스마트폰 사진가

도갑사 도선국사비 

좌기(左記)

영암(靈巖)과 강진(康津) 두 고을 사이에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이름은 월생산(月生山)이다. 이 산의 서쪽에 큰 가람(伽藍)이 있으니, 세상에 전하길 신라의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절 뒤쪽에 고비(古碑)가 하나 있는데, 세운지 오래되어 돌이 떨어지고 마멸되어 거의 글자를 식별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옥습(玉習)이라는 스님이 개탄(慨嘆)한 나머지 분발하여 석장(錫杖)을 짚고 멀리 서울로 와서 진신(縉紳)들을 찾아가 사유를 설명하고 비문을 청탁하였다. 백헌(白軒) 이상국(李相國)[李景奭]이 비문의 글을 짓고, 상서(尙書) 오준(吳竣)이 글씨를 썼으며, 한성부윤(漢城府尹) 김광욱(金光煜)이 전액을 썼다. 이들은 모두 국내에 제일가는 대가들이므로 더 이상 훌륭한 분을 찾을 수 없으리라.

그 해 9월 드디어 여산(礪山) 동쪽에서 채석(採石)하였다. 이때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 및 여산·익산(益山)·용안현(龍安縣) 등의 수령들은 농번기를 피하여 민력을 동원해 일을 도왔으며, 총림(叢林)의 석도(釋徒)들은 시골 벽촌의 어려운 집까지 돌아다니며 불사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니, 비록 가난한 사람들이지만 모두 재물을 내놓고 주머니를 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와 같이 일을 적극 추진하여 이듬해 초여름에 빗돌을 황산(黃山)의 선박장에서 끌어서 운반하여 가림군(加林郡) 남당포(南塘浦)에서 배에 싣고 군산(群山) 칠산포(七山浦)를 거쳐 서호(西湖) 앞바다에 배를 대었다. 그로부터 7개월 만에 석공(石工) 일이 끝났다. 귀부와 이수가 각각 그 정묘함을 드러내어 절 뒤편 북쪽 언덕 위에 우뚝하게 서서 위엄을 자랑하였다. 천순연간(天順年間)에 명승(名僧) 수미화상(守眉和尙)이 도갑사의 법당을 중건하였으나, 도선국사의 비는 다시 세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드문 일이로다. 이름 없는 납자(衲子)가 수백 년 동안 이룩하지 못한 일을 몇 년 사이에 추진하여 앞일과 뒷일을 모두 빛나게 하고 무궁하게 이어지도록 하였으니, 어쩌면 그리 빠르게 일은 또 이루었단 말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국사는 동국(東國)의 신인(神人)이시다. 스님은 태어난 과정이 인도(人道)가 아니라 하여 부모가 낳자마자 숲속에 버려두고 돌보지 않으니, 많은 비둘기들이 날아와 날개로 덮어서 보호하는 이적(異蹟)이 있었다. 지금도 버려두었던 바위 위에 옛 자취가 마치 어제의 일과 같이 완연하게 남아 있으니, 그 마을 이름을 구림촌(鳩林村)이라 하고 아이를 버렸던 바위를 국사암(國師岩)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이때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국사는 나이가 동년(童年)이 되기 전에 월남사(月南寺)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 후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선사(一行禪師)를 찾아 참문(叅問)하여 지술(地術)에 대한 그의 법을 모두 전해 받았다. 동쪽 우리나라로 돌아온 뒤에는 이름난 절 거대한 탑, 언덕 하나 물줄기 하나에 이르기까지 국사가 창건하거나 점지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으며, 이미 지나간 천백 년 옛일과 아직 다가오지 아니한 천백 년 미래의 일을 마치 눈앞에 나열된 듯 소상히 알았으니, 어찌 불교에서 말하는 이른바 상승(上乘)을 초월한 신비하고도 신비한 분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신라와 백제 이후로 신승(神僧)이라는 호칭을 받은 원효(元曉)와 의상(義相) 같은 스님들이 실로 한두 분이 아니지만, 그러나 걸연(傑然)하다고 일컬을 만한 분은 한두 손가락을 꼽을 정도일 뿐이리라. 늙어서 백운산(白雲山)에서 입적(入寂)하였으며, 사리(舍利)[靈珠]를 석감(石龕) 속에 안치하였다. 대사의 평소 행적은 최유청(崔惟淸)이 지은 비문 《白雞山玉龍寺贈諡禪覺國師碑銘》에 자세히 실려 있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 이수인(李壽仁)이 글을 짓고, 성균진사(成均進士) 김시간(金時暕)이 글씨를 쓰다.(출처–국립문화재연구원)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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