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70)
■ 도갑리1구 죽정마을(14)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 벽화 / 세조와 문수동자에 얽힌 설화를 그렸다.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 벽화 / 세조와 문수동자에 얽힌 설화를 그렸다.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에 의해 정착

우리나라의 문수신앙은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에 의해서 정착되었다. 『화엄경』에 의하면 문수보살의 상주처(常住處)가 중국의 청량산이라고 한다. 자장이 청량산의 태화지(太和池)에 있는 문수보살 석상 앞에서 7일 동안 기도하여 보살로부터 범어로 된 사구게(四句偈)를 받았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범어로 된 내용이어서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때 한 노승으로부터 꿈(범어 게송)에 대한 해석을 듣고 부처님의 가사(袈裟)와 발우를 받았다. 노승은 신라의 왕이 여성이라 위엄이 없기 때문에 이웃 나라들이 얕보는 것이라고 하면서 조국으로 돌아가 구층탑을 세워 나라를 편안하게 할 것을 부탁했다. 이때 그 노승에게서 우리나라의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상주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자장율사는 643년(선덕여왕 12) 귀국하여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고 오대산 중대(中臺)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건립하여 오대산을 문수신앙의 중심 도량으로 만들었다. 이후로 고려 시대까지 문수신앙이 널리 유행했다. 특히, 조선 세조가 등창으로 고생할 때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문수동자의 감응을 받아 병이 낫게 되었다는 소문이 난 뒤부터 문수신앙은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의 벽화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 벽에는 세조와 문수동자에 얽힌 설화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자신이 죽인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혼백이 꿈에 나타나 세조의 몸에 침을 뱉었다. 다음 날, 꿈에 현덕왕후가 침을 뱉은 자리마다 종기가 돋았다. 전신에 등창이 생기는 괴질에 걸린 그는 명의와 신약 모두 효험이 없자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기 위해 오대산 상원사를 찾았다. 

월정사에서 참배를 올린 뒤 상원사로 가던 중 물 맑은 계곡에 이른 그는 좌우를 물리치고 혼자서 목욕을 하였다. 

그때 숲 사이로 동자승이 지나가자 세조는 그를 불러 자신의 몸을 씻게 했다. 목욕을 마친 뒤 세조는 ‘임금의 옥체를 씻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발설하지 말라’고 일렀다. 그러자 그 동자승은 ‘왕께서도 문수동자를 보았다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에 놀란 세조는 주위를 살피다가 자신의 병이 깨끗이 나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세조는 자신이 직접 보았던 모습 그대로 동자상을 조성하게 하였는데 국보 221호로 지정되어 있는 목조 문수동자 좌상이 바로 그것이다.”

세조와 신미대사

신미대사는 한글 창제에서도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속가의 동생이었던 집현전 학자 김수온을 비롯해 여러 학자와 스님들과 함께 세종을 도왔다. 이때 수양대군, 양평대군, 문종, 정의공주 등 가족들이 신미대사와 함께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노력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영화가 송강호 주연의 ‘나랏말싸미’이다. 신미대사의 역할이 돋보이는 영화다. 

김수온의 ‘식우집’에 신미대사와 세종대왕이 어떻게 만났는가가 나온다. 

「최만리의 반대 상소가 있자 세종은 새로운 문자 제정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출가한 효령대군이 "신미라는 스님이 있는데 그 사람을 불러서 한번 얘기를 들어보라"고 하자, 세종은 수양대군을 복천사로 내려보내 신미 대사를 모셨다. 세종을 만난 신미대사는 불가의 비가라론 즉 '성명기론' 등 불경 관련 음성학적 지식을 이야기했다. 세종은 신미대사를 궁으로 모셨고, 내불당을 만들어 거기에 상주케 하면서 '훈민정음' 제정을 전면적으로 돕게 했다.」 여기에서 보듯이 세조는 왕이 되기 전에 한글 창제를 매개로 이미 신미대사와 인연을 맺었던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월출산과 문수신앙

「동국여지승람」에는 월출산을 일러 ‘본국 밖(국외)에서는 화개산(華蓋山)이라 칭한다’는 문장이 있다. 여기에서 말한 ‘국외(國外)’는 중국을 뜻한다. 화개산과 월출산 명칭에 대해서는 1663년에 간행된 ‘영암지도갑사사적’에 언급되어 있다. ‘옛날 문수대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구름이 항상 산의 제일 높은 곳에 떠 있으므로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서 화개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또, 「월출산」은 달이 떠올라서가 아니라 ‘옛날에 지혜와 용맹을 주관하면서 석가모니불을 왼쪽에서 모시는 문수대사가 월지국에서 나와 이곳(월출산)에 살았으므로 월출산이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문수사 터에 지은 도갑사

원래 이곳에는 문수사(文殊寺)라는 절이 있었으며 도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도선의 어머니 최씨(崔氏)가 빨래를 하다가 물 위에 떠내려오는 참외를 먹고 도선을 잉태하여 낳았으나 숲속에 버렸다. 그런데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그를 날개로 감싸고 먹이를 물어다 먹여 길렀으므로 최씨가 문수사 주지에게 맡겨 기르도록 하였으며, 장성한 그가 중국을 다녀와서 문수사 터에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도갑사 사적기, 최씨원 전설)

동갑내기 도반 신미와 수미

인조 11년(1633) 완공된 「월출산 도갑사 왕사 묘각화상(妙覺和尙) 비명(碑銘)」에 ‘13살 때 낭주의 서쪽 월출산 도갑사로 가서 스님이 되었다. 20살 때 비구계를 받은 다음 지체없이 여러 강원(講院)을 다니면서 삼장(三藏)을 공부하였다. 속리산 법주사에 이르러 나이도 같고 이름도 같은 신미(信眉)라는 사미(沙彌) 스님을 만나 막역한 사이가 되어 서로 탁마하면서 대장경을 배우고 계율을 익혀서 자비한 얼굴과 도골(道骨)로서 눈의 광채는 별빛처럼 빛났고, 목소리는 낭랑하며 온화하고 말재주가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1653년(조선 효종 4년)에 세워진 ‘도선수미대사비’에도 신미(信眉)·수미(守眉) 두 스님이 도갑사를 중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비문 역시 수미왕사가 신미라는 동갑내기 스님과 절차탁마하였다고 전한다. 신미와 수미 두 스님은 평생을 두고 도반으로 지냈으며 서로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세조와 수미 왕사

앞에서 언급했듯이 오대산 상원사와 월출산 도갑사는 조선 세조 때 왕실의 문수신앙의 기도처로 대표되는 사찰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도갑사는 조선 시대에 들어서 영암 출신인 수미왕사의 원력에 의해 중창됐다. 세조실록에는 세조가 1464년(조선 세조10년) 전라 감사에게 수미왕사가 도갑사를 중창하는데 돕도록 명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전라도 관찰사 성임(成任)에게 어서(御書)로 유시(諭示)하기를, “전 선종 판사 수미는 나의 잠저(潛邸) 때부터 구면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다. 화려한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서 떠난 뒤로 음신(音信)(먼 곳에서 전하는 서신이나 편지)이 서로 끊겼다. 지금 들으니, 도갑사를 중건한다고 하는데, 지금 여름철안거와 경찬(慶讚)에 자기 스스로 비록 말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어찌 부족한 바가 없을까 생각한다. 나의 옛날 아는 사람인 것을 생각하면 더욱 개탄이 앞선다. 감사(監司)(관찰사)가 나의 뜻을 받아 수시로 마땅히 연화를 도와주라고 하였다.」 - 「세조실록」 권33, 10년(1464, 갑신) 4월 13일
 
세조는 당시 뛰어난 학승이자 신미 대사의 절친인 수미 대사를 흠모하고 존경해마지 않았다. 도갑사 수미왕사 비문에 ‘세조께서 예를 갖추고 스님을 영접하여 왕사로 책봉하고, 묘각왕사라는 호와 함께 자색 가사 한 벌을 올렸다. 그 후 왕은 자주 편지를 보내어 위문하였고, 상모 불자와 유리 염주도 선사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세조가 수미 왕사를 얼마나 존경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세조가 오대산 상원사 문수동자상(국보221호, 1466년)을 조성할 당시 신미 대사가 상원사에 주석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과 수미와 신미의 관계로 판단해 보면, 도갑사에 문수·보현동자상을 조성할 때 보살상이 아닌 동자의 모습으로 조성하는데 상원사 문수동자상이 모티브로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창건 당시부터 문수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월출산 도갑사는 조선 전기 세조의 후원을 받아 크게 중창한 후부터 문수신앙이 다시 부흥한 것으로 보인다. 당대의 뛰어난 학승이었던 수미와 신미의 운명적인 만남은 운 좋게도 월출산 도갑사의 중흥과 문수신앙의 부흥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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