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77)
■ 도갑리1구 죽정마을(21) - 문산재2

구림 대동계에서 보관하고 있는 성기동 서숙 건립 및 강당 이건 관련 문서  정유년(1657), 무신년(1668), 병오년(1726), 정미년(1727), 무신년(1728)(빨간 실선) 연도 이름이 차례로 나열되어 있다. 이 중에서 정유년과 무신년은 성기동 서숙을 설치하여 관리할 때이고, 병오년·정미년·무신년은 1684년(갑자년, 숙종10년)에 성기동 서숙을 문수암이 있던 현재의 월대암 아래로 이건한 이후로 문수서재를 개보수하면서 관리해오던 때를 일컫는다. 문수서재는 나중에 문산재로 불리어졌다.  사진자료 – 최기욱 훈장 제공)
구림 대동계에서 보관하고 있는 성기동 서숙 건립 및 강당 이건 관련 문서  정유년(1657), 무신년(1668), 병오년(1726), 정미년(1727), 무신년(1728)(빨간 실선) 연도 이름이 차례로 나열되어 있다. 이 중에서 정유년과 무신년은 성기동 서숙을 설치하여 관리할 때이고, 병오년·정미년·무신년은 1684년(갑자년, 숙종10년)에 성기동 서숙을 문수암이 있던 현재의 월대암 아래로 이건한 이후로 문수서재를 개보수하면서 관리해오던 때를 일컫는다. 문수서재는 나중에 문산재로 불리어졌다.  사진자료 – 최기욱 훈장 제공)

문산재 연혁

위의 문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현재의 문산재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여러 차례의 변천 과정을 겪었다. 문산재의 모태는 1657년(효종 8년) 창녕인 태호 공 조행립(1580~1663)이 성기동에 설립했던 성기서숙(聖起書塾)으로부터 출발한다. 

지난 호(죽정마을 20)에 해주인 최필흥이 ‘우리 구림마을은 평소에 경치 좋은 물형이 있다고 칭해 왔어도 전고 때부터 홀로 글 닦는 곳이 없었으나, 옛날 우리 태호 조행립 공이 마음속으로 교훈할 뜻이 있어 간절하게 작흥하여 곡식, 재목을 모아 성기동에 처음으로 창건하고 선생을 모시고 학생들을  모아 비로소 오로지 학문을 닦는데 진력하도록 하였다.’고 강당상량문에서 밝힌 바와 같다. 

위의 문서 사진을 보면 ‘정유년집임서재증사상량상’이라는 문구가 첫머리에 등장한다. ‘정유년에 임사를 맡았던 분들의 명함이 승사(僧舍) 들보 속에 있었다.’라는 뜻이다. 승사(僧舍)는 절을 뜻하는데, 최기욱 훈장님 말씀에 의하면 ‘그 당시 성기동에 있었던 관음사에 성기서재를 설치했었다’고 한다. 관음사는 박이화가 쓴 ‘낭호신사’에도 나오는 사찰 이름이다.

바로 이어서 ‘무신성조시성기초창시’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무신년은 1668년(현종9년)을 말한다. 문서에 나오는 도유사 조경찬(1610~1678)은 태호공 조행립의 셋째 아들로 호가 안용당이다. 그는 부친의 뜻을 받들어 성기서재를 지극정성으로 관리하고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기동에서 문수암 터로 강당 이건

하지만 성기동 서당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정황상 강당을 이건할 필요가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호에 소개했던 최필흥이 쓴 강당 상량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연주인 죽림공 현징을 중심으로 동리 사람들이 모두 힘을 합하여 갑자년(1684)에 월대암 아래의 문수암 터로 강당을 이건하였다. 이때부터 문수서재 시대를 열게 되었으며, 문수서재는 다시 문산재로 불리다가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과 부침을 겪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이어져 왔다. 

한편, 병술년에 최명흥(1690~1767) 이 쓴 상량문을 보면 보다 자세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최명흥은 해주인으로 최필흥의 동생이다. 최필흥이 병오년(1726년)에 강당 상량문을 썼으니 40년 만에 동생 최명흥이 또 새롭게 상량문을 쓴 셈이다.

병술년(1766년) 최명흥이 쓴 상량문

“서재를 문산국내에 옮겨 세운 후 그 아래 곁집 상량문 등을 썼으며 다시 옛터에 옮겨진 강당의 상량문 등은 우리 형 동계 공(최필흥)께서 지으셨으니 문사가 풍요롭게 보였다. 
가히 그 밑 열서를 보니 성기동에다 정유년(1657)에 창시하였다가 갑자년(1684)에 문산으로 옮겨 세울 때 임사를 맡았던 분들과 선생 및 학생과 더불어 목수 등의 이름들을 썼던 것은 이제 옮기면서 한 통을 등출하여 후인들이 상고하여 볼 수 있도록 제공하면서 다시 중첩되지 않게 하노라.

아! 우리 마을에 서숙이 있어 후생들을 인도하고 진취시켜 왔으나 이것이 누구의 힘이었으리요. 선배의 근력이 아닐 수 없었다. 후인으로서 길게 생각하건데 이제까지 계술을 준행하고 있으면서 선배들의 뜻과 일들을 상량에 기록해 놓았었다. 

그 중에 또한 기이한 일은 고산 윤선도 선생의 성명이 실려 있었으며, 정유년(1657) 창시할 때 생도 몇 첩 중에는 윤씨 친구 계문(季文)이 주동하였고 병오년(1726)에 원재(原齋)와 강당의 일과 이제 병술년(1766)을 당하여 이건하려고 할 즈음 윤경승이 또 그 일을 주동하니 경승은 곧 계문의 조카였다. 삼대의 성명이 함께 들보에 올라 있으니 어찌 기이하지 아니하고 또한 이상하지 아니하리오. 명흥이 이건한 상량문을 졸문이나 가형과 함께 강당 상량문에 서로 안팎이 되었으니 어찌 또한 이상하지 아니하리.

병술년(1766) 4월 21일 해주 최명흥 삼가 기록함.”
(자료 제공- 현삼식 전남종가회 회장/ 원문 번역 일초 박준섭)
  
태호공 조행립이 남긴 성기동 서당과 관련한 시 두 수

한편, 태호선생기념사업회가 발간한 ‘국역 태호집’을 펼쳐보면 성기동에 서당을 설치한 것과 관련하여 태호 공 조행립이 직접 쓴 시가 두 편 나온다. 이 두 편의 시만 봐도 그가 얼마나 고향 구림마을을 사랑했는지, 어떤 취지와 목적을 가지고 마을 서당을 설치했는지, 또 지역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다. 

마을에 서당을 설치하며(置閭塾) (태호집 제2권 587쪽)

배움은 나 자신을 위함이고 남을 위함이 아니며
예로부터 모든 행동은 천륜에서 시작되지
십 년 동안 외우고 읽는 것 마음 비록 괴로우나
하루에 뛰어 오르면 뜻을 펼 수가 있어
남자는 현인과 성인되기만을 기약해야 하고
제자와 스승은 지혜와 인을 겸해서 힘써야 하네

청지의 송별시를 차운하다(4수 중에서) (태호집 제1권 111쪽)

서당을 설치하여 마을 수재를 가르치며 
세상 도의가 쇠락함을 몹시 걱정하였네
사람이 만일 배우지 않는다면
매사에 누구를 스승으로 일컫겠나
선비를 기르면 마침내 모두 쓰여졌으니
성취를 도모하는 일이 어찌 더디겠는가
장한 길은 첫걸음부터 시작하는 법이니
학업에 부지런하고 의심하지 말지어다

문곡 김수항의 묘지명
한편, 문곡 김수항이 쓴 태호 공 묘지명에도 성기동 서당 건립 내용이 나온다. (태호집 690쪽)

“(중략) 그리고 또 곧장 몇 리 쯤 떨어진 곳에 서숙(書塾)을 건립하여 스승을 배치하고 마을의 수재를 가르치니 모두 조 공께서 창설하여 풍속을 두텁게 하고 인재를 양육하려는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바로잡습니다] 

지난 호에 최필흥이 쓴 강당상량문에서 “아희들아, 떡을 ~쪽으로 던지려 하니” 표현은 “어영차! 들보를  ~쪽으로 던지려하니”로 정정합니다. 원문에 나온 한자 아랑(兒郞)은 ‘아희들’이 아닌 ‘어영차’의 뜻으로 바로잡습니다.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