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76)
■ 도갑리1구 죽정마을(20) - 문산재

문산재는 태호공 조행립 선생이 정유년(1657년 효종8년)에 구림리 성기동에 처음으로 창건한 서당이다. 그러다가 서당이 낡고 허물어지려 하자 월대암 아래에 있던 문수암 터로 갑자년(1684년 숙종 10년)에 옮겨 세워 문수서재라 부르다가 나중에 문산재로 칭했다.
문산재는 태호공 조행립 선생이 정유년(1657년 효종8년)에 구림리 성기동에 처음으로 창건한 서당이다. 그러다가 서당이 낡고 허물어지려 하자 월대암 아래에 있던 문수암 터로 갑자년(1684년 숙종 10년)에 옮겨 세워 문수서재라 부르다가 나중에 문산재로 칭했다.

문산재 강당 상량문

대범 이로부터 기술한다. 옛날 상서학교의 제도를 폐하고 행하지 않으므로 이미 교도와 훈회의 방법이 쇠퇴하여 드디어 끊기니 오직 시끄럽고 번잡하여 분화 속에 스스로 성취한 재목이 뽑혀 나온 이가 적었다.

국가나 시골 마을까지도 유랑하고 포기한 부류가 많으니 옛 현철들의 세상을 개탄하는 민망한 풍속을 궁구하고 정중하게 경계를 정하여 방을 두어서 훈몽에 나아갔다.

송나라 때 있었던 회암 주선생의 백록동서원에서의 강연과 같이 열고 고려 조정 때 문헌공 최충선생에 이르러 자하동에 구재를 설하였듯 계왕계래 후세에 성현의 도를 전하기 위하여 학생들을 나누어 비로소 가르쳐 동방인의 의리 방향을 알게 하였다.

우리 마을은 평소에 경치 좋은 물형이 있다고 칭해 왔어도 전고 때부터 홀로 글 닦는 곳이 없었으나, 옛날 우리 태호 조행립공이 마음속으로 교훈할 뜻있어 간절하게 작흥하여 곡식, 재목을 모아 성기동에 처음으로 창건하고 선생을 모시고 학생들을  모아 비로소 오로지 학문을 공부하려고 하였다. 

갑자년(1684)의 봄이 돌아오니 문산의 위에 옮겨 세우고자 이내 묵은 재목을 베어 의뢰하여 지붕을 잇고 죽림옹께서 일을 주관하여 이루었으니 새롭게 배우게 하여 장차 어느 곳에서나 나아가게 하니 곧 호남에 명승지로다. 

해가 지나고 달을 넘겨 작철하는 탄식이 차라리 없어 위로는 비가 세고 겉으로는 바람이 불어 이미 무너지고 기울어져 가며 동양은 썩고 끊어져 한 기둥에 지탱한 것과 다를 바 없으며 금신들도 산산히 흩어져 오직 빈 칸에 중이 홀로 지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중수할 의론이 중심에서 피어나 오래토록 개수할 계획을 세워 뒤로 함께하여 재앙 있는 해를 피하고 바르게 앉아 정년을 맞고자 해를 보내다 구림의 노소가 감독을 맡고 학암 사람들의 지휘로 사업을 의론 우러러 승사하여 재우(齋宇)가 있던 옛 터에 옮기는데 생기복덕을 다취하였고 서실은 마당가에 두어서 오로지 보호하며 지켜 나아가는 편의를 삼으니 규모는 처음 새로 세웠던 것에 증감하여 넓게 파 들어간 기가 있고 제도는 옛 것에서 변형하여 방정의 형태를 합당하게 하였으니 모든 사업 이 다단하고 공사역정이 중간을 이루니 가람은 겨우 쌀과 소금 다함의 근심이 있고 강당은 미황하므로 물력이 풍요한 날을  기다려 오직 천하에서 하나인 재주로 이내 선대로부터의 공을 이어 두 사람의 장재를 얻어 이미 범백의 구획을 다 부담하고 일년을 넘겨 시역하였다.

다시 옛과 같이 경영하여 남과 북 두 모퉁이에 많은 선비들이 쉬고 자는 방문턱을 짓고 중간의 세 칸을 합하여 그 곳에서 강송하는 루헌(樓軒)을 하니 높이 출세하는 사람이 날로 우주에 형승으로 점쳐지고 궤와 안상에 문을 가까이 대하게 하여 아침 저녁으로  연파를 대하며 범을 보듬고 용이 돌아쳐 비로소 한 고을의 기가 모아드는 것 같고 기묘한 봉우리와 빼어난 묏 부리에 조물주의 정을 바야흐로 깨닫겠네. 미더움이 영이하게 이곳에 있는 것 같고 제생들이 매양 이곳에 있는 것을 알겠도다. 

오직 일어나 먹고 마시는 즈음에 어찌 기체에 옮김이 없으랴. 글 읽고 시 지어 노래할 때는 반드시 강산의 도움을 얻으리라. 개근에 식실은 반드시 사림들의 으뜸을 지을 것이요. 

몸을 닦고 재목이 되어 장차 국가에 쓰이게 되리라. 우리 남쪽에 인재가 성한 것을 가히 이제 볼 수 있고 저 호남 학풍의 흥이 어찌 옛과 같이 오로지 아름답지 않으리. 

후진들은 크게 더함이 있을 것이요 선배들을 보드라도 부끄러움이 없으리. 들보를 들어 올리려고 공경스럽게 좋을 선송을 베푸네.

아희들아! 떡을 동쪽으로 던지려 하니 청산은 뜻이 있는 듯 람롱으로 둘려있네. 알겠노라 방박의 기가 부여하고 있으니 천만년 지켜감이 끝없이 이으리라.

아희들아! 떡을 서쪽으로 던지려 하니 한 글자 문자성이 바라보는 속 얕게 비치고, 재주 있는 학생들은 이제부터 운세를 타고 우우하게 서로이어 구름사다리 올라가네.

아희들아! 떡을 남쪽으로 던지려 하니 대나무 봉우리 절개나서 하늘 높이 솟아있네. 때로는 강을 파하고 창문을 여니 화창한 날 가벼운 바람 짙푸른 아지랑이 쓸어가네.

아희들아! 떡을 북쪽으로 던지려 하니 저 건너 대 바위는 북극을 향해 솟아있네. 오늘의 제현에 마음을 그치고 우러르니 다른 날 언로가 충직을 본 받으리.

아희들아! 떡을 위로 던지려 하니 넓고 넓은 푸른 하늘 몇 자 몇 질에 임해 있네. 건너를 상대하여 항상 마음 건재하니 자강하며 따르는 곳 마다 부지런히 수양하네.

아희들아! 떡을 아래로 던지려 하니 뜰아래나 마당 사면에 소쇄한 바람 지극하네. 이곳에서 전수하고 이곳에서 기술하며 공부를 불철하여 밤낮이 없네.  

엎드려 원하옵건데, 상량을 한 뒤로는 지붕과 기둥이 고쳐지지 아니하고 학생과 선비들이 오래토록 거하면서 여력이 있으면 학문을 공부하고 다 경술을 이룬 선비가 될 것이요. 

사업을 맡은 주역들도 다 포부와 재주를 펼치게 하고 이제부터 당장이라도 시작 될 것이며 내세에도 바꿔지지 말도록 기하옵소서.

최 필 흥 지음 (원문번역 일초 박준섭)  (자료제공: 현삼식)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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