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71)
■ 도갑리1구 죽정마을(15)

 

도갑사와 조선 시대 선비들

구림마을에 살았던 향촌 선비들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월출산을 유람하러 온 시인 묵객들이 남긴 시문을 읽으면서 새삼 새롭게 느낀 것은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되고 있던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사찰의 스님들과 생각보다 많은 교류와 소통을 했었다는 사실이다. 셀 수없이 많은 시문이 있지만 여기 대표적인 글 몇 편을 소개한다. 

구암(龜岩) 임호의 유고(遺稿)

구암공 임호는 1540년 진남제를 축조하여 간척지를 조성한 월당 임구령의 장남으로 회사정을 짓고 구림 동계를 중수하여 구림 사회의 기틀을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던 사람이다. 후손들의 말에 의하면 구암공 임호는 중부인 석천 임억령에게 학문을 배웠는바 도학적인 학풍뿐만 아니라 성품까지도 석천을 많이 닮았고 삶의 방식에 대해서도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고 한다. 

임호의 시문을 모아 놓은 ‘구암공유고’를 보면 월출산 도갑사와 여러 암자들에 대한 시가 여러 편 등장한다. 도갑사, 견성암, 용암사 등 월출산에 있는 절을 자주 찾아가서 스님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옛 선비들이 스님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임호의 문집을 읽던 중에 문수사를 노래한 시가 나와 월출산이 문수신앙의 중심지였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도갑사에 남아 있는 기사문수동자상과 청동문수동자상 뿐만 아니라 도갑사를 자주 방문한 구림마을 선비의 시문에 문수사라는 사찰 명칭이 정식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구암공은 또한 하견성암에 대한 시를 남겼다. 원래 도갑사에는 상견성, 중견성, 하견성, 세 개의 견성암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노적봉 아래 상견성암만 남아 있는데, 임호가 읊은 ‘하견성암’ 시를 접하고 나니 그 말이 사실임을 실감했다. 여기 그가 쓴 세 편의 시를 소개한다.

1. 문수사 아래 시냇가에서 이척장의 시에 차운하며 / 文殊寺下溪邊 次李戚長

시냇가 반석은 스스로 편편한데 / 溪邊盤石自平夷
북쪽으로 보이는 산들 눈 아래 들어오네 / 北望群山眼底卑
해 저물녘 봄빛 가득 읊조리며 돌아오니 / 日暮咏歸春色滿
기우제 지낸 천년 자취가 바로 나의 스승일세 / 舞雩千載是吾師

2. 상견성암(上見性庵)

작은 암자 세 칸밖에 안 되고
돌길은 험하여 기어오른다
짹짹거리는 아침 새 뒤편 계곡에서 울고
추적이는 봄비 앞산을 가리네
부처 앞의 등불은 너울너울, 잠이 오지 않아서
묘시에 마신 술 얼근하여 한기조차 느끼지 못하겠네
시험 삼아 노승에게 묘법을 물으니
어느 곳의 마음 심지 끊고 또 끊으리오

3. 하견성암(下見性庵)

유군이 오늘 다시 찾아오니 / 劉郎今日再來尋
옛 절은 여전히 그윽하기만 하구나 / 古寺依然深復深
태반 스님 아는 얼굴 아닌데 / 太半居僧非舊識
담장에서 우는 새는 내 마음 알새라 / 墻邊啼鳥是知音

<출처: 남호처사 구암공 유고>

문곡 김수항의 도갑사 시문

문곡 김수항을 빼고 도갑사를 말하기 어렵다.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월출산 도갑사를 다녀가며 시문을 남겼지만, 그중에서 문곡 김수항 만큼 생생한 기록을 남긴 선비는 드물다. 남암을 수남사로 개칭한 수남사기를 남겼으며 수시로 도갑사를 방문하여 여러 스님들과 교류했다. 그가 남긴 여러 편의 시문 중에서 당시의 도갑사 상황을 잘 묘사한 글이 있어서 여기 소개한다. 

도갑사에서 법한 스님에게 써 주다 병서 〔道岬寺 書贈法閒上人 幷序〕

호남의 산 중에서 월출산이 가장 아름답고, 월출산의 여러 사찰에서 오직 도갑사가 크고 아름답다. 내가 낭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해가 지금 두 번이나 지났다. 산은 아침저녁으로 책상 앞에 마주 보이고 절 또한 금방 이를 만한 곳이다. 그렇지만 일찍이 산문에 한번 들어가 유람을 다하지 못했으니, 내가 죄를 지어 근신하는 처지라서 유람할 생각이 없던 탓이었고 또한 알밀의 애통을 안고 있어서 유람 또한 적절한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 절간의 여러 승려들이 매번 찾아와 내게 유람을 청해도 이런 이유를 들어 사양했지만, 승려들의 요청은 오래될수록 더욱 그치지 않았다. 옛날 채서산이 춘릉에서 귀양살이할 적에 광효사의 객사에 투숙하였는데 이 절의 중이 관리에게 “이 사람은 장대해서 통제할 수가 없을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하므로, 서산은 마침내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내가 보건대 도갑사는 큰길과 가까워서 명령을 전하는 관리들이나 여행하는 선비들이 왕래가 날마다 끊이질 않아, 스님들은 이들을 응접하느라 겨를이 없는 것을 항상 근심하였다. 그런데도 나에게만은 아주 간절해서 혹시라도 모시지 못할까 두려워함이 이와 같았으니, 광효사의 스님들이 귀양객을 내치라고 하소연한 일과 더불어 어찌 다르기가 이토록 심한가? 참으로 예와 오늘의 사람들이 같고 다름을 알 수 없음이여!

지금 국상이 이미 끝났고, 또 여러 스님들의 뜻을 끝내 저버릴 수만은 없다고 생각해서, 내가 도갑사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돌아왔다. 그런데 장로 법한이라는 스님이 있어 순실하여 함께 말을 나눌 만하였으며, 내게 시 요청하기를 매우 부지런히 하였다. 내가 이에 그에게 마음으로 보존하는 바를 묻자, 법한이 말하였다. “만약 곡기를 끊고 면벽이나 하면서 법석만을 귀하게 여겼다면, 나는 근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을 겁니다. 그리고 계율을 무시하고 입으로 염불을 하면서 마음으로는 거간꾼 같은 생각을 하는 것 또한 내가 부끄러워하는 바입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가상하게 여겼는데, 우리 유문에 비유하면 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세속과 절연하지 않는 무리다. 이와 같다면 마땅히 광효사의 승려들의 행위와 아주 멀다 할 만하므로, 마침내 짧은 율시를 써서 그의 부지런한 부탁에 색책하고, 아울러 이런 연유에서 내 유람이 비롯되었음을 기록해 둔다

세상살이에 편안한 땅 없더니 / 世路無安地
불가에 좋은 기약 있었구나 / 空門有好期
서림에서 상총 노스님이 이끌더니 / 西林携總老
남쪽 바다에서 태전 선사 대했어라 / 南海對顚師
반성하는 마음은 새벽종에 있는데 / 發省晨鐘在
잠은 밤마다 침상에서 편안하네 / 分眠夜榻宜
이제부터 산길이 익숙하니 / 從今山徑熟
종죽을 자주 함께 따르리라 / 棕竹數追隨

<출처: 문곡집 제3권>

농암(農巖) 김창협은 문곡 김수항의 둘째 아들이다. 1651년 과천(果川) 명월리(明月里)의 외가에서 출생하여 1708년 58세로 양주(楊州) 석실(石室) 부근의 삼주(三洲)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친인 문곡 김수항이 1675년 7월에 영암으로 유배당하자 아버지를 만나러 영암에 들려 월출산, 도갑사, 구림마을 등 영암과 관련한 여러 편의 시문을 남겼다. 그중에서 현재 용수폭포 바로 위에 자리한 정자 ‘벽간정’을 노래한 시가 있어 여기 소개한다.

벽간정(碧澗亭)

남쪽 기슭 단풍나무 많이 자라고 / 南崖多楓樹
북쪽 기슭 대나무숲 우거졌는데 / 北崖多竹林
맑은 그늘 한 시내에 어우러진 곳 / 淸陰一澗合
그 가운데 보이나니 깊어 푸른 못 / 中見綠潭深
단장 기대 돌 위에 앉았노라니 / 植杖跂幽石
날리는 물 흰 옷깃 흩뿌리누나 / 飛泉灑素襟

<출처:김창협 농암집 제1권 시(詩)>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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