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72)
■ 도갑리1구 죽정마을(16)
도갑사 도선국사비 ①

필자가 군서남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1973년 가을 소풍 때 도선국사비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거북이 머리 위에 서 있는 소년이 필자이다. 그 당시 모정마을 군서남초등학교에서 도갑사까지 가려면 20리에 달하는 구불구불한 논두렁길과 산길을 걸어야만 했었다. 거북이는 소년들의 놀이터였고 기념사진 찍는 장소였다. 문화재가 뭔지도 모르는 철부지 시절이었다.
필자가 군서남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1973년 가을 소풍 때 도선국사비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거북이 머리 위에 서 있는 소년이 필자이다. 그 당시 모정마을 군서남초등학교에서 도갑사까지 가려면 20리에 달하는 구불구불한 논두렁길과 산길을 걸어야만 했었다. 거북이는 소년들의 놀이터였고 기념사진 찍는 장소였다. 문화재가 뭔지도 모르는 철부지 시절이었다.

월출산 도갑사 도선국사비명과 서문(비석 앞면)

금산(金山)에 사찰을 건립함으로써 숭두타(崇頭陀)라는 이름을 길이 남겼으며, 강물에 떠내려온 오이는 도리어 대사의 이름을 널리 전하게 되었다. 진리의 문을 열고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서 천지의 조화를 무시하고 그의 신비함을 나타냈다. 도갑사를 창건하여 수도 도량을 개설하여 팔부신장(八部神將)의 옹호를 받아 모든 불자들이 복을 닦게 되었다. 이와 같이 위대한 대사의 업적은 마땅히 비석에 새겨서 길이 후대에 전해야 하므로 감히 기존에 있던 마멸된 비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국사의 휘(諱)는 도선(道詵)으로 신라 낭주(朗州) 사람이다. 어머니는 최씨(崔氏)이고 영암의 성기산(聖起山) 벽촌(僻村)에서 진덕왕(眞德王) 말년에 태어났다. 어머니가 겨울에 강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떠내려오는 오이를 건져 먹고 임신하여 준수한 아들을 낳았으니, 마치 후직(后稷)의 어머니 강원(姜嫄)이 거인의 발자취를 밟고 감동하여 임신한 후 태어난 것과 같았다. 또 백족화상(白足和尙)이 산천의 정기를 받고 숙기(淑氣)를 모아서 태어났으므로 모든 속진(俗塵)을 벗어난 것과 같았다. 신비하게도 낳자마자 숲속에 갖다 버린 아이를 비둘기가 날개로 보호하였고, 신령스러운 독수리가 날개를 펼쳐 아이를 덮어 보호하였다. 

일찍이 월남사(月南寺)로 가서 불경[貝葉]을 배웠다. 그리고 13살이 되기 전에는 사신을 따라 중국으로 가서 호위(胡渭)가 지은 우공(禹貢)의 산천설(山川說)을 두루 살펴보고 당나라의 문물을 익혔다. 당나라 황제가 연영전(延英殿)에서 대사를 영접하고 “나의 꿈에 금인(金人)이 나타나 돌아가신 대행(大行)황제의 신릉(新陵)터를 대사에게 점복(占卜)하라는 현몽(現夢)을 꾸었으니, 대사는 사양하지 말고 가장 좋은 명당 터를 잡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대사는 사양하지 못하고 조왕신(竈王神)이 일러주신 대로 황제가 타고 다니는 어마(御馬) 가운데 병든 흰말 한 마리를 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가장 길한 터를 점복하였는데, 보는 사람마다 천부적으로 특이한 안목을 가졌다고 칭송하였다. 어찌 다만 지술(地術)에 대한 능력뿐이겠는가. 천자도 국사로 책봉하여 존경하였으며, 일행선사(一行禪師)도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찬탄하였다. 국사는 금상(金箱)과 옥급(玉笈)을 두루 연구하여 꿰뚫었으며, 중국 적현의 황도(黃圖)를 탐구하여 깊이 통달하였다. 그 후 동쪽으로 돌아가서 연마한 지술을 진작(振作)하고, 북학(北學)한 금상·옥급·황도의 내용으로 시국을 구제하겠다면서 황제에게 귀국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우리나라에 귀국한 후 지형을 살펴보니 배가 떠나는 모양과 같았다. 배의 수미(首尾)를 진압하기 위해서 절을 짓고 탑을 건립하게 하였다. 멀고 가까운 곳을 두루 둘러보고 왕건의 아버지에게 백설(白雪)이 퍼붓는 때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 곳에 집터를 잡아주어서 왕이 될 아들을 낳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500년간 왕업을 누릴 수 있는 송악(松嶽)에 왕도(王都)를 정해 주었다. 

월출산 도갑사의 일관봉(日觀峰)은 훌륭한 경치이고, 산은 겹산이다. 봉우리는 절경이어서 마치 천불상(千佛像)을 나열하고 있는 것 같고, 바위는 떨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흔들바위와 같아서 전국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어구(魚口)의 주변 경관은 마치 문수(文殊)에게 지시를 받은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하여 법문을 듣는 모습이었으며, 용연(龍淵)의 경치는 대사가 대중을 모아놓고 지도한다는 소문을 들은 학인(學人)들이 찾아와 함께 모여 있는 모습과 같았다. 구름으로 창을 삼고, 안개로 집을 삼아 어렴풋이 12루(樓)부터 해조음(海潮音)과 범음(梵音)이 흘러나오고, 풍번(風幡)에서는 광명이 흘러나와 3천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비추었다. 

대사의 뜻은 이익과 민물(民物), 왕도(王圖)의 공고(鞏固)함에 있었으며 고상하여 세상 사람을 멀리하고, 고고하게 석장(錫杖)을 매달고는 방장실(方丈室)에서 수행하였다. 객관적인 육진(六塵)이 모두 사라지고, 묘한 도를 인도[乾竺] 불경에서 탐구하였으며, 삼매(三昧)가 성취되어 진승(眞乘)을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서 널리 퍼뜨렸다. 

금강산과 태백산은 자항(慈航)의 머리, 꼬리와 같았고, 황양(黃壤)은 활의 모양과 같았다. 보경(寶鏡)을 높은 곳에 달아 놓아 부처님과의 간격을 없앴고, 과거의 여래(如來)가 현세에도 있어서 오랜 세월 동안 법우(法雨)를 뿌려 평등하게 적셔주어 병화(兵火)가 다시 닥쳤어도 저절로 소멸되었다. 오래전부터 대사의 비가 구름과 안개에 휩싸였으나 도갑사는 용궁(龍宮)과 같이 우뚝 솟아 있었다. 도선국사의 고비(古碑)에 이끼가 끼어 이수는 결락되어 이를 보는 승려들마다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푸른 산을 내려다보고는 슬퍼하였다. 비록 태양과 같이 빛나는 위대한 업적이 있더라도 만약 그것을 전해 주는 행적비가 파손되면 어찌 후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마치 새의 날개가 자라서 멀리 날아가듯이 일찍이 노숙(老宿)들이 건물을 보수하였으나 상당 기간 대사의 비를 다시 세우지 못하였는데, 난새와 봉새가 날아가듯 구비(舊碑)를 치우고 신비(新碑)를 세우기로 하였다. 이때 그의 제자인 옥습대사(玉習大師)가 각 사찰로 다니면서 도움을 구하기도 하고, 신도들로부터 모금하여 무려 3년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다시 서울로 나를 찾아와 비문을 재촉함이 더욱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비록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虀臼)’의 비문을 지을만한 문장력이 부족하지만, 옥습대사의 간곡한 청탁을 저버릴 수가 없었기에 명(銘)하여 이르기를,

훌륭하신 대사의 신비한 경지
어느 누가 그 경지를 따르겠는가!
분별지해(分別知解) 그대로는 생각도 하지 말고
식심분별(識心分別) 쉬지 않곤 알 수가 없네. 
글자 새긴 비문이야 있든 없든 간에
도선국사 크신 업적 손익(損益)이 없네. 
무상광음(無常光陰) 흐를수록 더욱 높아서
천만겁이 지나가도 옛날이 아니네.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 겸 영경연(領經筵)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사(觀象監事) 세자사(世子師) 이경석(李景奭)이 비문을 짓고,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 겸 지경연(知經筵) 춘추관사(春秋館事)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인 오준(吳竣)이 비문을 쓰고,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 겸 지의금부(知義禁府) 춘추관사(春秋館事)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 김광욱(金光煜)이 전액(篆額)을 쓰다. 

숭정(崇禎) 병자년(인조 14, 1636) 4월 일에 시작하여 계사년(효종 4, 1653) 4월 일에 세우다. (출처:국립문화재연구원 )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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