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고분 발굴 발표현장에 갈때마다 궁금한게 한가지 있다. 왠만하면 한문이나 현대말로 풀어쓰는 문화재 용어중에 ‘하니와’란 일본말이 등장하는게 그것이다. 한일 역사학계가 자신들의 우월성을 치열하게 주장하는 대목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니와라는 일본말은 우리 역사학계에서 마치 고유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는 듯 하다.지난 23일 시종면 태간리 현장에서 열린 자라봉고분 발굴현장에서도 그랬다. 발표장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하니와(埴輪)란 50여점의 일본식 토기였다. 붉은 빛을 띠면서 마치 빗살무늬토기 모양을 하고 있지만 중간에 턱 처럼 생긴 띠(돌대)가 두 개씩 있는게 하니와의 큰 특징이다. 다시말해 무덤의 주인공은 6세기경 하니와라는 일본식토기를 사용한 사람이었던 것이다.하니와
대불산단 대부분의 중소업체들이 조선블럭을 만드는데 열중하고 있지만 독자적인 기술을 가지고 대형 플랜트산업에 뛰어든 업체들도 있다.지난 2001년 창립한 대불산단내 (주)한영산업은 초창기 100억원이던 매출액이 2009년에 600억원으로 상승한데 이어, 올해는 1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최근 3년 동안 400억원이 뛰어오른 것이다.자체인원 65명(협력사 포함 300명)의 중소기업이 이처럼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플랜트분야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이 회사는 대형 조선블럭을 생산하면서 한편으로 해양구조물 접안설비와 강구조물 제작및 설치, 초대형 크레인 제작등의 기술을 축척해 왔다. 초창기 투자비용이 막대하지만 일단 자리 잡으면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
선박부품업체 (유)성문 선박부품을 생산하는 대불산단내 (유)성문(대표이사 이재홍)은 2009년도 직원이 4명에 불과했다. 생산액은 연간 2억5천만원이었다. 공장도 작은 규모의 임대공장에서 세를 살았다.그러다가 지난해 이 회사의 인원은 지난해 9명으로 늘었고 생산액도 9억4천9백원으로 폭증했다. (유)성문의 성장은 눈부시다. 올해 7월 임대공장 신세를 면하고 500평 규모의 새 공장으로 이사를 했고 직원은 50명이 됐다. 올 생산 계획은 20억으로 잡고 있고, 내년도 생산액은 80억원으로 목표를 세웠다.이처럼 (유)성문이 급성장을 하고 있는 배경에는 클러스터 활동을 통한 지속적인 기술개발이 자리 잡고 있다.중소기업의 가장 큰 취약점은 기술개발 비용이 없다는 것. 조
다음은 지난 2일 목포신안비치호텔에서 전남도와 한국산업단지공단이 공동주최한 ‘한국해양산업 육성 정책포럼’의 요지이다. 이날 정책포럼은 앞으로 대불산단이 추구해야 할 업종다변화와 관련해 우리 영암지역이 관심을 많이 기울여야할 내용이 많았다.■ 해양스포츠를 통한 서남권 해양관광산업 발전전략 - 지삼업(부경대 해양스포츠학과 교수)우리나라는 도시화의 가속화, 개인소득의 증가, 마이카시대의 일반화, 사통팔달의 교통망에 의해 어느지역에서나 최대 2시간이면 바다로의 접근이 가능한 곳이다. 주2일 휴무제 전면실시에 따른 개인 여가시간 증대와 아열대성기후로의 심화발전에 따른 해양스포츠 활동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해양스포츠산업과 해양관광산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대불산단 전봇대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2008년 취임 초기던 이명박 대통령이 개혁대상 대표사례로 꼽은 것인데, 대불산단에 전봇대 몇 개가 이전되지 않아 공장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였다.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전봇대는 금방 이전되었고, 업체들의 불편도 없어졌다. 이것이 소위 ‘대불산단 전봇대 사건’이다.요즘에 대불산단에 가면 배를 만드는 조립용 블록을 싣고 온 도로를 점유하며 움직이는 초대형 운송차량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이런 운송차량이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도로를 막고 있던 전봇대를 제거해서 가능한 일이 됐다.그러나 전봇대 사건은 대불산단에 아이러니한 측면이 없지 않다. 앞서 설명했듯이 대불산단은 자동차, 화학, 기
대불산단과 현대삼호중공업이 있는 삼호읍에서 영암군이 거둬들이는 지방세는 연간 500억원에 달한다. 이중에서 100억원 정도가 현대삼호중공업에서 나오는 것이고 나머니 400억원은 대불산단에서 받는 것이다. 현재의 영암군 지방세 수입을 획기적으로 올리는 방법은 없을까. 대불산단내 업체들이 매출을 늘리게 하면 될 일이다.그러나 현재의 대불산단 입주업체들은 조선부품 조립분야에 지나치게 집중돼 있어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대불산단이 변하고, 아울러서 영암군도 지방세 수익을 크게 높힐 방안을 5회에 걸쳐 찾아본다.지난 20일 오후 대불단지내 한 제조업체. 넓은 마당에 철판들이 널려있고, 공장안에서는 배를 만드는데 필요한 대형 블록이 만들
오래전 영암 북쭉지역 주민들은 식수를 확보하는 게 큰일이었다. 주변에 큰 산이 없고 야산뿐 이여서 샘물이 있는 곳이 귀했다. 도포면 약천마을 역시 주변에 큰 산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이 마을의 샘물은 말라본 적이 없다. 지금 마을에는 네 가구가 살지만 한때는 100여 가구가 모여 살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샘물에 의지했다. 식수뿐 아니다. 가뭄이 들면 마을 주변의 논밭에 물을 공급해 주는 곳도 샘물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앉은뱅이가 이 마을의 샘물을 먹고 벌떡 일어나 걸어갔다고 해서 ‘약천(藥泉)이라는 마을이름이 붙게 됐다.지금도 샘물은 모양이 그대로 남아 있다. 물론 수돗물이 들어온 이후부터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 웬만한 샘터는 몇 년 사용하지 않으면 각종 쓰레기와 수초 등으로 뒤덮여 오
29일부터 왕인국화축제가 열리는 왕인유적지는 언제부터 공식화됐을까. 왕인박사는 일본에서 유명 인사였지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인 기록이 없었다. 그래서 왕인박사는 영암에서 많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국내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왕인박사에 먼저 관심을 보였던 곳은 일본이었다. 일본에는 고대 사료인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백제 17대 아신왕 14년인 서기 405년 백제인 왕인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 내선일체를 주장하던 일제는 한국을 침탈한 직후인 1899년에 이등박문이 앞장서 왕인현창회를 설립하고 대판에 왕인묘역을 신축했다. 이어 1937년에는 동경우에노공원에 박사왕인비를 세우면서 일본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강진에서 고려청자의 꽃을 피웠던 청자는 갑작스럽게 형태를 알 수 없도록 사라진다. 이런 형태에 대해 설득력을 얻는 부문이 억불정책과 연관성이 확인된다. 당시 고려시대 승려의 신분은 왕족의 다음 신분으로 도자기의 역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불교의 역사가 조선시대에 들어서 사라지면서 청자도 쇠퇴기를 걸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강진의 고려청자가 활발하게 모습을 드러 낸 시점에 장흥지역에서도 청자의 모습들이 나오고 있다. 장흥지역의 도요지는 총 50여개에 달하고 있다. 산악지역에 21개, 평야지역에 4개, 해안지역에 19개가 몰려있다. 청자가 발견된 곳은 용산면 풍길리와 회진면 회진리 가마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두 곳의 공통점은 주로 해안가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구림도기의 우수성은 남도의 곳곳으로 이어졌다. 남도도자기는 구림도기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진화했다. 구림도기의 전통가마의 형태나 도기를 만들때 나타나는 받침의 형태로 모두 구림도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영향은 구림도기에서 해남군 화원가마터에서는 쉽게 나타났다. 굽는 기법이 구림도기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조개껍질을 받쳐서 사용하는 전통기법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고 도기의 문양도 주판알형유병 등 영암 구림도기의 문양이 나타난 점을 들 수 있다. 가마의 형태도 고정식인 대형 가마의 형태인 벽돌식 가마가 아닌 규모가 작고 쉽게 옮길 수 있는 토충요의 형태를 띄고 있다. 가마의 크기는 크지 않고 열 손실을 최대한 줄이면서 환원작용을 할수 있도록 만든 전통가마의 형태가 구림도기를 그대로 담고
구림도기는 해남으로 건너가 초기 청자의 모태가 된 것으로 보인다. 구림도기는 청자의 발전되는 형태와 옹기의 출발점으로 시작됐다. 처음 도기에 유약을 발라 시도된 점과 환원을 시키는 방법 즉 가마를 이용해 구워내는 방법이 남도의 도자기 사에 남을 새로운 형태의 시도였다. 이런 구림도기가 어떻게 진화했을까? 지난달 2일 해남에서는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과 역사문화학회가 공동으로 해남화원 초기청자 가마터의 성격과 해양교류 주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번 학술대회의 중요한 요지는 청자의 발전상인 청자로드의 재발견이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초기청자의 발생지인 해남군 화원면 일대의 초기청자 가마터를 소개하면서 초기청자의 발생지가 영암의 구림도기에 시작됐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해남에는 화원과 산이면에 대규모
⑥물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도포면 도포리 '통샘'을 보면 과연 물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주변에 높은 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반경 4㎞내에서 높은 산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도포리 통샘은 결코 마른 적이 없다. 더구나 통샘주변은 일제시대까지 바다였다. 짠물이 수시로 드나드는 바로 곁, 그저 야산만 턱하고 버티고 있는 귀퉁이에서 깨끗한 생수가 사시사철 솟고 있다. 통샘은 수돗물이 보급되기 전까지 수백년 이상 도포사람들의 생명줄이었다. 조그만 샘에 100가구가 넘은 주민들이 식수를 의지했다. 주민들은 매일 일어나면 통샘에서 물을 길러 오는게 큰 일과였다. 물은 결코 마르지 않았지만 양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줄을 서서 조금씩 물을 떠 담았다. 한참
오랜 세월 동안 영산강의 모습은 참 많이 변했다. 아마도 가장 큰 변화중의 하나는 80년대 초반 하구언 건설에 따른 지형과 지물의 변화일 것이다. 하구언이 막아지면서 바닷물이 끊겼고, 뱃길도 단절됐다. 강이 메워져 수 많은 간척지가 들어섰다. 요즘 영산강은 옛 모습을 거의 잃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래서 옛 모습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지난 22일 영산강유역권 행정협의회가 주최하고 도서문화연구원이 주관한 '영산강의 문명교류와 생활문화사'란 학술발표대회에서 영산강의 과거 모습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논문(고동환. '조선후기~한말 영산강의 수운과 시장'. 영산강의 문명교류와 생활문화사 143페이지 참조)이 발표돼 많은 사람들을 추억속에 젖게 했다. 잠시 조선후기~한말까지 영산강의 모습으
최근 남도의 도자기에 대한 관심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지난 2일 열린 학술세미나를 통해 해남에서 발견된 초기의 청자가 다시 강진으로 건너가면서 고려청자로 화려하게 부활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청자로드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모든 청자의 발달에는 영암에서 시작된 시유도기 일명 구림도기로 불리는 영암 도기에서 시작됐다는 점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남도 도자기의 시작이 됐던 구림도기를 되짚어보면서 남도의 도자기의 역사를 집중 기획해본다. 남도의 도자기 시작은 흔히 구림도기에서 찾는다. 이유는 청동기시대부터 내려오는 토기에서 이어진다. 지금까지의 유적발굴조사에 따르면 청동기시대의 영암은 역사상 마한의 소국 월내국이었다. 마한의 연방체제의 소국이었지만 중국과 바닷길이 열려있고 비옥한 자연환경은
영암은 물이 귀한 곳이 었다. 높은 산이 월출산 밖에 없고, 금정면 쪽에 산이 집중돼 있는 형국이다. 다른 곳은 빗물을 축척하기 어려운 야산이 많았다. 또 영산강을 타고 곳곳으로 바닷물이 스며들어 식수를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샘은 있었다. 사람들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은 샘을 의지해 마을을 형성하고 평생을 살았다. 영암의 샘을 차례로 게재한다.70년대 초반부터 진행된 경지정리는 농촌의 농사문화를 획기적으로 바꾸었지만 많은 문화와 전통을 파괴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논 가운데 있던 봉분이나, 오래된 연못등이 무참히 메워졌다. 학산면 매월마을 통샘도 지금은 그 흔적을 볼 수 없다. 대신 그 수맥은 어쩔 수가 없어 통샘이 있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콘크리트
영암 시종 출신 김병호 명인의 가야금산조가 지난해 5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올해로 탄생 101주년을 맞으면서 영암의 가야금 역사가 새삼 관심을 받고 있다. 영암은 가야금 산조의 창시자인 김창조 선생의 고향이면서 김창조 선생이 수 많은 제자를 길러 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창조 선생의 가야금산조 원형은 사후 100여년 동안 역사속에 뭍여 있어야 했다. 1990년 7월 중국 연변에 공연을 갔던 가야금 연주자 양승희씨(후에 인간문화재 지정)는 중요한 자료를 입수했다. 자신이 그토록 찾던 김창조 선생의 산조 악보를 발견한 것이다. '김창조 산조의 악보'는 김창조(1856~1919) 선생의 수제자인 안기옥 선생이 북한에 남겼던 것이였으며, 북한에 유학했던 김준이란 연변대 교수가 안기옥
1.제안배경"역사를 망각한 민족은 미래를 가늠 할 수 없다"고 했다.그 역사는 사실을 과장 없이 기록 할 때 생명력이 있고 가치가 있다. 그러한 역사는 그 주체들의 정체성을 나타낸 것으로, 그들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이다. 잘못된 과거는 이를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우를 범해서는 아니된다는 교훈을 제시하고 있고, 긍정적인 과거는 이를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역사는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민족과 나라들은 자기네의 역사를 중요시 한다. 어떤 민족이던지 역사를 잘 보존하면 현실은 역경에 처해있더라도 그 역경을 해쳐 나 갈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렇다. 유태인들은 자기 나라를 잃고 2000년을 세계 각처를 떠돌면서 이방인의 취급을 당했고, 특히 히틀러 나
창진포 건너던 나룻배는 어디가고집도 없는 허허벌판으로 변모 하구언 막는다고 했을때 일본인들 우리보고 미쳤다고...하구언 막아진 후 모든것이 변해버렸다시종면 신학리 쥐섬 부근. 영암천이 내려와 멀리서 영산강과 만나는 부근이다. 모양새가 쥐를 닮아 그렇게 이름 붙혀진 쥐섬은 섬이 아니다. 하구언이 막아지고 주변에 간척지가 조성되면서 논으로 둘러 쌓여 있다. 서쪽에는 대형덤프트럭이 쉴새없이 흙을 나르고 있다. 건너편 서호면 금강리와 다리가 연결돼 있고 이제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앞서 설명했지만 이 다리가 완공되면 신학리에서 금강리로 또는 금강리에서 신학리로 오가는 길이 획기적으로 단축된다. 어찌 보면 영산강 하구언이 막아지면서 바로 들어서야 할 다리였다.목포와 뱃길이 연결돼 자유롭게
강줄기는 누구도 막지 못했다... "7~8년전만 해도 민물새우 많아""신금대교 완공되면 건너편 시종면이 코앞" 서호면 황촌마을을 지나 산길을 돌아 가면 무송정 마을이다. 멀리 월출산이 보이기 시작하고 영암쪽에서 내려오는 강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여러 줄기가 만나는 강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복잡하다. 멀리 영암읍 학송리 청풍원휴게소 옆 쌍정제에서 시작한 영암천이 큰 내를 이루어 내려오면 한참 아래에서 군서쪽에서 내려오는 호동천과 합류하고, 다시 그 아래쪽에서 학산 상월리 율치제에서부터 내려오는 학산천과 합해지면서 무송정 마을앞을 지나는 것이다. 강은 곁강이 합수해 들어올 때 마다 몸집이 늘어나 금강리 앞에서 무안 몽탄에서 내려온 본 줄기와 만나는 곳은 거대한 바다가 연상될 정도로 웅장한 모
"비가 많이 내려 민물이 내려오면 강물에 염도가 약해져 농어가 술에 취한 듯 비실거렸제"영산강 줄기를 따라 방향을 계속 북으로 잡아 올라가면 본격적으로 강다운 강을 만난다. 바다같다. 마침 날씨가 맑아 멀리 하늘 끝에 아기자기한 산들이 보인다. 저 곳은 어디일까. 북쪽으로 산들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서호면 태평정마을에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금강(金江)마을이 있다. 금강마을은 서호면의 가장 북쪽 마을이다. 여기에서 가장 북쪽이란 말은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뜻이다. 마을의 북서쪽은 물론 동북쪽까지 영산강으로 둘러쌓여 있다. 예전에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큰 바다였다. 영암쪽 해창에서 내려오는 물과 무안 몽탄에서 내려오는 물이 금강마을에서 만났다. 그 물이 동네앞까지 출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