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서 영암 해창포까지 뱃삯이 50전

목포~영산포 항해시간 돛단배 18시간, 증기선 4시간

1920년대 오반 목포항에 일본으로 실려갈 쌀을 실은 배들이 정박해 있다. 이 쌀들은 영암과 나주들녘에서 영상강을 통해 가지고 나왔을 것이다 <전남 100주년 사진집 인용>
오랜 세월 동안 영산강의 모습은 참 많이 변했다. 아마도 가장 큰 변화중의 하나는 80년대 초반 하구언 건설에 따른 지형과 지물의 변화일 것이다.

하구언이 막아지면서 바닷물이 끊겼고, 뱃길도 단절됐다. 강이 메워져 수 많은 간척지가 들어섰다. 요즘 영산강은 옛 모습을 거의 잃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래서 옛 모습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지난 22일 영산강유역권 행정협의회가 주최하고 도서문화연구원이 주관한 '영산강의 문명교류와 생활문화사'란 학술발표대회에서 영산강의 과거 모습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논문(고동환. '조선후기~한말 영산강의 수운과 시장'. 영산강의 문명교류와 생활문화사 143페이지 참조)이 발표돼 많은 사람들을 추억속에 젖게 했다. 잠시 조선후기~한말까지 영산강의 모습으로 돌아가 보자. 


■ 영산강은 어디까지 배가 올라 갔을까
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까지 배가 올라갔다. 이곳까지 올라간 배는 큰 배(解船)는 아니었고 조그만 나룻배(江船)였다.  조선시대 영산포 상류의 수심은 1m 내외였지만 곳곳에 수심이 60㎝도 못된 곳이 많았다.
 
바다를 왕래하는 해선은 영산포에서 2.4㎞ 상류에 있는 노항포까지만 항해가 가능했다. 영산강에서 1㎞ 상류에 있는 두응포는 한말시기에 수심이 낮아져 증기선이나 발동기선이 오지 못했지만 돛단배는 자유롭게 들어 선박이 폭주하기도 했다.

 

영산강 황포돛배가 복원돼 영산강을 누비고 있다.
■ 목포~영암~영산포사이에는 어떤 항로가 있었을까
영산강에는 원래 목포와 영산포를 잇는 돛단배가 부정기적으로 운항하면서 여객과 화물을 운송했다. 그러다가 1904년 10월에 일본인이 처음으로 돛단배 2척으로 정기항로를 개설했다.
 
다음달에는 대동강에서 영업하던 석유발동기선이 취항해 기선운항 노선시대가 열렸다. 다음해인 1905년에는 조선인 홍모씨가 발동기선을 투입하면서 목포~영산포사이에는 두척의 발동기선이 영업하는 경쟁체제가 들어섰다.
 
목포~영암~영산포 노선은 팽창을 거듭해 1910에는 증기선인 기념환, 길상환과 석유발동선인 정복환등 세척이 월 60회, 하루 두차례 정기적으로 왕복하며 승객과 화물을 실어날랐다. 운임도 재미 있다. 3등실을 기준으로 목포에서 영암 해창까지의 운임은 50전이었고, 영산포까지는 60전이었다.

■ 항해시간은 얼마나 됐나. 뱃길을 이용하는 승객수는?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항해시간은 어느정도 였을까. 바닷물이 썰물이 된 후 3시간 정도 지나면 밀물때가 됐다. 증기선의 경우 이때 영산강으로 들어가서 시속 8노트 속도로 항해하면 영산포까지 4시간 30분이 소요됐다.
 
반대로 영산포에 만조가 들면 출발해서 썰물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면 3시간 정도면 목포에 도착할수 있었다. 영산강의 밀물 유속은 약 1.5노트, 썰물은 2.5노트로 썰물의 속도가 배는 빨랐다. 돛단배의 항해시간은 올라갈 때 18시간 정도가 걸렸다.
 
그러나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목포~영산포간 뱃길은 큰 변화를 겪었다. 영산포에서 목포까지 철도운행 시간은 두시간에 불과했다. 철도이용객이 폭증하고 항로 이용객은 급감했다.

그러나 목포~영암~영산포 항로는 철도가 통과하지 않은 영암등지의 승객들이 줄지 않아 꾸준히 유지될 수 있었다. 지금은 영산포에서 목포까지 KTX가 25분, 무궁화열차는 45분이 소요된다. 격세지감이다.
 
1908년 한달 평균 배편을 이용해 목포에서 영산포를 오간 사람수는 1천212명이었다. 그렇게 생각보다 많았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중에서 한국인이 60%였고, 일본인이 40%를 차지했다.

지난 22일 나주에서 영산강의 역사와 문물을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리고 있다.
■영암지역 영산강 주변에는 어떤 시장들이 있었을까
18세기 말에 영암에는 동문외장, 독천장, 쌍교장, 송지장 등이 있었다. 19세기 들어서는 동문외장이 읍내장과 덕진장으로 분리되면서 5개가 됐다.
 
1909년에는 동문외장과 덕진, 독천장이 유지되고 쌍교, 송지장은 폐지됐다. 대신 회동장과 화원장이 새로 생겼다. 1910년에는 독천, 덕진, 읍내, 화원장이 새로 들어섰다.
 
1926년에는 동문회, 덕진, 독천, 회동, 신북, 도포, 아천장등 총 7개의 시장이 영암에서 열렸다. 옛 지명들이 지금의 어디를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수 없어 안타깝다. 아마도 송지장과 화원장은 지금은 해남 지역인 송지면과 화원장이 아닐까 한다. 회동이나 아천등지의 지명도 낯설다.
 
영암의 동문외장은 지금의 덕진포에 있었다. 동문외장은 한달에 12회 열리다가 읍내장과 덕진장으로 분리됐다.
 
지금의 학산면 옛 이름은 곤일시면이었다. 이곳의 독천장은 조선시대에도 유명했다. 독천장 주변의 수심이 평상시에는 3m나 됐고, 만조때에는 6m에 달해 배가 독천장 앞까지 들어왔다. 지금은 작은 하천이 되어버린 독천장 주변의 강줄기가 왜소해 보이기만 한다.
 
조선후기 영암의 시장은 읍내장이 중심역할을 담당하면서 영산강 수운을 매개로 덕진장, 독천장, 쌍교장이 하나의 장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모양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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