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영암천의 종착역 무송정 마을

무송정 마을 앞 수로에 장어와 붕어를 잡는 어선들이 모여있다. 그 모습이 마치 어촌풍경같다.

강줄기는 누구도 막지 못했다... "7~8년전만 해도 민물새우 많아"
"신금대교 완공되면 건너편 시종면이 코앞"

서호면 황촌마을을 지나 산길을 돌아 가면 무송정 마을이다. 멀리 월출산이 보이기 시작하고 영암쪽에서 내려오는 강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여러 줄기가 만나는 강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복잡하다.

멀리 영암읍 학송리 청풍원휴게소 옆 쌍정제에서 시작한 영암천이 큰 내를 이루어 내려오면 한참 아래에서 군서쪽에서 내려오는 호동천과 합류하고, 다시 그 아래쪽에서 학산 상월리 율치제에서부터 내려오는 학산천과 합해지면서 무송정 마을앞을 지나는 것이다.

강은 곁강이 합수해 들어올 때 마다 몸집이 늘어나 금강리 앞에서 무안 몽탄에서 내려온 본 줄기와 만나는 곳은 거대한 바다가 연상될 정도로 웅장한 모습이다. 무송정과 금강리를 중심으로 영암천으로 합류되는 크고 작은 강줄기가 다섯 개가 넘는다.
 
세상의 모든 물이 모이는 곳이니 지대가 낮을 수 밖에 없었다. 홍수가 나면 마을이 온통 물바다가 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전판길 님>
마을주민 전판길(68)씨는 "마을주민들이 홍수때면 마을 한쪽이 물에 잠기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하구언이 막아진 후 침수피해가 줄어들긴 했지만 무송정마을의 침수는 지금도 여전한 행사다. 목포 앞바다에 조금 사리가 닥치면 영산호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상류에서 유입된 물이 계속 축적되면서 수위가 올라가고, 무송정 앞 논처럼 저지대의 논들은 2~3일씩 침수피해를 입고 있다. 
 
전 씨는 "영산강 하구언에 수문공사를 추가로 한다고 하는데 그 공사가 끝나면 침수피해를 겪지 않아도 될런지 모르겠다"고 했다.
 
무송정 마을앞 수로에 크고작은 배가 10여척 정박해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영락없는 어촌마을의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 배들은 농어나 숭어와 같은 바다고기를 잡는 배들이 아니라 붕어나 장어와 같은 민물고기를 잡는 배들이었다. 내수면 조업 허가를 받은 배들이었다.
 
<한용택 이장>
무송정마을 한용택(60)이장도 배를 가지고 있었다. 한 이장에 따르면 요즘 영산강에서는 봄에는 붕어가 많이 잡히고 4월 중순이 넘어서면 장어가 주로 포획되고 있다.

가을에는 다시 붕어가 주로 잡히는 어종이다. 고기잡이는 봄이나 가을같은 농한기를 이용해 하고 있다.하구언이 막아진 이후 영산호에는 민물고기가 급증했다. 붕어가 쉴 새 없이 잡혀 올라왔다.

그 많은 붕어를 영산강 유역 사람들이 전라도 방식, 다시말해 물천어나 붕어찜으로 모두 소비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영산강 붕어를 결정적으로 많이 소비해 준 곳은 경상도 사람들이었다.

이곳에서 잡히는 붕어는 광주를 통해 경상도 등으로 팔리기도 하고, 경상도에서 중간수집상이 직접와서 붕어를 구입해 갔다.
 
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 떡붕어를 많이 소비했으며, 지역에 따라 붕어를 횟감으로 사용하는데가 있을 정도로 붕어는 인기 있는 어종이었다.

그러다가 붕어로 즙을 내서 먹는 문화가 생기면서 영산강 붕어는 한 때 없어서 못팔 정도로 소비가 폭증하기도 했다.
 
바다에서 올라온 길이 막혀버린지 30년이 됐는데 영산강에서 민물장어가 잡히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장어는 민물에 살다가 바다로 내려가 필리핀 인근 해역에서 산란을 하면 치어들이 다시 강으로 돌아와 서식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에서 올라오는 길이 없으면 민물장어는 살 수 없게 된다.
 
이에대해 한용택 이장은 몇 년 전 나주 양만장에서 홍수 때 쏟아져 나온 장어가 영산강에서 서식하고 있다는 설이 있다고 했다. 또 치어도 잡힌다고 했다.

이를 보면 영산강 하구언 어디엔가 장어들만 알 수 있는 작은 통로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용택 이장은 영산호에서 민물새우가 많이 사라진 것을 크게 아쉬워했다. 7~ 8년전만 해도 영산호에는 새우잡이 배가 떼지어 돌아다녔다.

새우잡이를 생업으로 사는 어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부르킬이나 배스는 외래어종이 들어오면서 치어들이 사라졌고, 새우도 함께 없어졌다.
 
영산강 길은 이제 서호면에서 강건너 시종면으로 넘어간다. 무송정 건너편은 시종면 신학리 정동마을이 있다. 이곳을 가는 길은 복잡하다.

무송정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군서면까지 나온 다음 4차선 도로를 타고 영암읍쪽으로 가다가 신마신마을로 들어가는 길로 접어들어 올라가야 한다.

<윤상덕 님>
직선으로 가면 곧장 갈수 있는 길을 꼬불꼬불 구절양장길을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무송정마을과 지금은 사라진 창진포를 잇는 나룻배가 다녔다고 한다. 무송정이나 금강마을에서 시종으로 넘어가는 길은 옛 나룻배 있을 때가 훨씬 편리했던 셈이다.
 
영암은 예전에 꼬불꼬불한 해안선을 많이 끼고 있었던 지역이라 요즘에도 이렇듯 불편한 도로망이 많다.

요즘같은 시대에 사통팔달로 뚫려있어야 할 도로들이 한참을 가다보면 막혀 버려 되돌아 나와야 하거나, 활보다 굽은 도로를 이리저리 돌아나와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현상은 주민들의 기동력을 그만큼 떨어뜨리는 일이니 만큼 하루속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다행히 요즘 시종면 신학리에서 서호면 금강리를 연결하는 신금대교가 건설되고 있어 이 일대 교통망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 공사는 교량 680m, 접속도로 4.6㎞ 등 총연장 5.3㎞인 지방도 2차선 도로를 건설하는 것이다.

<오 훈 님>
신금대교가 완공되면 신북·시종·도포 등의 근교농업이 활성화되어 북부권의 발전이 가속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런 다리는 30년전 하구언이 막아질 때 함께 건설되어야 할 다리였다. 예전에는 서호면 주민들이 목포에서 오는 연락선을 타고 영산포까지 올라가 편리하게 광주로 올라갔으나 하구언이 막아진 후 배가 끊기면서 영암읍까지 돌아서 광주를 가는 불편을 겪어야 했다.

시종면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배를 타고 마음대로 목포를 오갔으나 역시 하구언이 막아지면서 목포를 가는 방법이 아주 까다롭게 됐다. 이들이 목포로 가려면 영암읍을 거쳐서 독천으로 돌아야 했다.

그러나 신금대교가 조만간 완공되면 시종면 사람들은 곧바로 다리를 건너 목포나 삼호, 학산등으로 갈 수 있게 되고, 서호사람들은 다리만 건너면 신북이나 나주로 가는 방법이 아주 편리해 진다.


역사의 순간들
1923년 2월 군서면 주민들이 금연을 결의하고 곰방대를 일제히 부러뜨렸다

건강을 위해 요즘에도 금연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1920년대 초반에도 금연운동이 벌어진 사실(史實)이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동아일보 1923년 2월 1일자에는 군서면 주민들이 단연(斷然: 금연의 다른 말)을 위해 면민대회를 개최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기사는 '이날 군서면민 100여명이 면사무소에서 면민대회를 개최하고 면민이 일제히 단연할 것을 결의했다'고 적고 있다.

지금 같으면 참 어려운 일이겠지만 면민전체가 금연을 결의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롭다. 면민들은 단순히 흡연을 결의만 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현장이 있던 주민들은 각자 소지하고 있던 연죽(煙竹: 대나무로 만든 담뱃대)을 일제히 부러뜨리며 금연을 결행할 의사를 천명했다고 한다. 비장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를 강제합병한 일제는 '신생활을 영위하자'며 전국적으로 금연과 금주운동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주민을 통제하려는 수단의 하나였음은 물론이다.

1923년 2월 19일에는 영암읍 주민들도 '단연실행의 건을 결의했다'는 보도가 있고, 같은달 24일자 신문에는 군서면 구림청년회가 술과 담배를 끈기 위해 단연단주회(斷煙斷注會)를 만들어 회원을 모집하고 있는데 며칠만에 40여명이 가입했다고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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