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터 조개껍질 넣는 전통방식 그대로

주판알형, 주름무늬 유 병 등 다량발견

해남군 화원면 뱀골 인근에 위치한 초기청자 가마터의 모습(바로 아래사진)과 안내판(위 사진)
구림도기는 해남으로 건너가 초기 청자의 모태가 된 것으로 보인다. 구림도기는 청자의 발전되는 형태와 옹기의 출발점으로 시작됐다. 처음 도기에 유약을 발라 시도된 점과 환원을 시키는 방법 즉 가마를 이용해 구워내는 방법이 남도의 도자기 사에 남을 새로운 형태의 시도였다.

이런 구림도기가 어떻게 진화했을까? 지난달 2일 해남에서는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과 역사문화학회가 공동으로 해남화원 초기청자 가마터의 성격과 해양교류 주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번 학술대회의 중요한 요지는 청자의 발전상인 청자로드의 재발견이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초기청자의 발생지인 해남군 화원면 일대의 초기청자 가마터를 소개하면서 초기청자의 발생지가 영암의 구림도기에 시작됐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해남에는 화원과 산이면에 대규모 가마터가 발견되고 있다. 화원 초기청자 60여가마터가 확인되고 있어 우리나라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가마터는 서남해안의 한쪽 끝에 위치하고 있어 도자기의 발전이 육로가 아닌 해상의 물길과 영산강을 중심으로하는 강상의 물길을 타고 이동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초기청자가마터의 모습
화원 초기청자는 생산품종은 청자, 흑자, 경질도기가 동일한 가마에서 생산되었다. 이중 청자와 흑자는 동시에 동일가마에서 생산되었고 백자는 전혀 생산되지 않았다는 점이 중부지역 청자가마와 다른 특징을 띄고 있다.

화원면 가마터는 청자로 소형 음식용기인 완, 발, 종지기 등과 함께 중형 저장용기인 청자병, 청자호는 소량 생산되었다. 그러나 악기인 장고, 매병, 주전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들은 화원에 이어 운영된 산이면 가마터에서 생산되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모든 청자가마터에서 흑자가 다량 발견됐다. 저장용기인 병이나 항아리류는 대부분 흑자로 제작되었으나 소형의 음식기는 거의 생산되지 않았다. 다량의 흑자 생산은 중부지역과는 다른 남부지역 초기청자 가마의 특징이다.

또 모든 청자 가마에서 시유를 하지 않은 고화도의 경질도기가 발견되었다. 그 편은 대부분 중대형 호나 곡식을 저장하는 대형기종이다. 당시의 가마에서는 소형기는 청자, 중형기는 흑자, 대형기는 도기로 구분되어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원청자요지는 고급 해무리굽완이 대표적인 상품이다. 화원청자도요지에서는 다양한 크기의 완이 발견되었고 굽경이 6.5㎝내외에 굽폭이 1.7㎝인 옥벽형완이 다수 발견됐다.

출토된 도기는 각진 돌대가 있는 것이 구림도기와 유사한 형태를 띄고 있다. 이것은 구림도기의 영향을 받은 화원가마터에서 다시 흑자를 거처 청자를 생산한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가마터에서 구림도기의 흔적을 그대로 볼수가 있다. 당시 화원가마터에서는 굽는 기법이 구림도기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일반 그릇은 일반 기법으로 굽는 것이 가능했지만 항아리, 병 등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전통기법을 사용했다.

이것이 구림도기에서 나타나는 조개껍질을 받쳐서 사용하는 전통기법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도기의 문양도 주판알형유병, 주름무늬 유병 등도 영암 구림도기의 문양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가마의 형태도 벽돌식 가마가 아닌 토충요의 형태를 띄고 있다. 가마의 크기는 크지 않고 열 손실을 최대한 줄이면서 환원작용을 할수 있도록 전통가마의 형태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화원청자요지는 산이면 청자로 발전했고 이곳에서는 9세기 후반까지 철화청자가 나타나고 고려청자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상감청자의 형태까지 나오고 있다. 이는 해로를 따라 남도의 도자기 역사가 계속 발전돼 가는 모습을 볼수 있다. 그 도자기의 발전의 중심에는 모태가 된 영암 구림도기가 자리잡고 있다. <계속>



인터뷰 > 목포대학교 변남주 교수 - "남도 도자기는 영암 구림도기가 근원”

화원면 초기청자의 발생지인 뱀골에서 목포대학교 변남주 교수를 만나 남도의 도자기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변 교수는 “초기청자가 발생할 당시에는 마땅한 육로가 없는 상태에서 유일한 통행로인 해로를 통해 가능했다”며 “도자기 판매를 통해 생활했던 주민들이 해로가 아니면 생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변 교수는 “당시 화원면의 경우 영암지역에 속해있던 지역”이라며 “해로를 따라 영암도기의 기술력이 함께 화원면으로 옮겨져 청자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또 변 교수는 “일부는 내륙을 통해 청자가 발전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으나 영암의 구림도기를 토대로 해로를 따라 남도의 도자기가 발전됐다”고 덧붙였다.

당시 도자기의 발전에 대해 변 교수는 “당시 훈요10조를 보면 서남해안지역에 잡척들이 많다는 기록이 있다”며 “잡척을 기술자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당시에 영암을 중심으로 가마들이 집단화를 이루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이어 변 교수는 “남도의 도자기 역사는 영암 구림도기를 시작해 해남 화원, 산이면을 거쳐 강진으로 흘러가 고려청자를 완성하게 된다”며 “이런 도자기의 발전에는 해로를 통한 판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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