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림도기의 유약, 청자에서 빛나다

해상세력 기반으로 강진청자에서 꽃피워..

불교세력권 차문화 도자기 역사 이어가..

강진군 대구면의 청자박물관내에 위치한 청자가마터 제41호기의 모습
구림도기의 우수성은 남도의 곳곳으로 이어졌다. 남도도자기는 구림도기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진화했다. 구림도기의 전통가마의 형태나 도기를 만들때 나타나는 받침의 형태로 모두 구림도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영향은 구림도기에서 해남군 화원가마터에서는 쉽게 나타났다. 굽는 기법이 구림도기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조개껍질을 받쳐서 사용하는 전통기법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고 도기의 문양도 주판알형유병 등 영암 구림도기의 문양이 나타난 점을 들 수 있다.

가마의 형태도 고정식인 대형 가마의 형태인 벽돌식 가마가 아닌 규모가 작고 쉽게 옮길 수 있는 토충요의 형태를 띄고 있다. 가마의 크기는 크지 않고 열 손실을 최대한 줄이면서 환원작용을 할수 있도록 만든 전통가마의 형태가 구림도기를 그대로 담고 있다.

화원가마터는 인근에 위치한 산이면 청자로 발전했다. 고려청자의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힐수 있는 상감청자의 모습도 다소 둔탁한 모습이지만 산이면 청자에서는 발견됐다. 그만큼 구림도기의 영향을 통해 남도의 도자기 기술이 발전해 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해남 산이면 청자의 모습은 강진군 대구면에 위치한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 강진청자는 해로를 통해 풍부한 선진문물을 흡수하고 기존의 도자기 기술이 접목되면서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고려청자로 거듭나게 된다. 


강진지역은 당시 도자기를 만들던 곳이 두 곳에 위치했다. 칠량소와 대구소가 위치했다. 칠량소는 옹기를 굽는 곳이었고 대구소는 청자를 만들던 지역이다. 이런 상황을 보면 당시 강진지역에서는 적지 않은 도자기 산업이 자리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당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던 중국의 월주요에 대적하기에는 부족했을 것이다.

이때 선진문물을 유입될 수 있는 것이 바로 해상왕 장보고의 역할이었을 것이다. 당시 완도를 중심으로 해상세력을 장악하던 장보고는 인근에 위치한 강진지역에 풍부한 자원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최고의 청자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을 준비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기술력과 도공들이 있어도 중국의 월주요를 뛰어넘는 기술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나라에서도 청자를 만들 수 있는 관요를 설치하기 위해 과감한 투자를 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태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눈길을 끄는 곳이 바로 인근에 위치한 정수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정수사는 인근을 아우르는 대형 사찰이었다. 이 시기에 중국 월주요의 청자는 구할수 없는 귀중한 도자기였다. 주로 스님들은 차를 마시는데 사용하는 찻잔이 필요했다. 이에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던 정수사에서 청자를 자체 생산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정수사의 수요를 바탕으로 강진청자가 발전하기 시작했고 나라에서는 이런 대구지역에 관요를 설치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전국의 최고의 도공들이 참석해 전대미문의 고려청자를 탄생시켰을 것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강진청자에도 구림도기의 흔적은 나타난다. 해남의 도요지와 마찬가지로 180여기의 가마터에서는 대부분 구림도기의 형태인 토충요가 차지한다. 규모가 적고 언제라도 이동이 가능한 형태의 가마에서 고품질의 청자를 생산해냈다. 이런 점은 구림도기로 시작한 남도의 도자기 역사가 강진으로 건너가 최고의 작품으로 탄생한 것을 설명해준다.<계속>


인터뷰 > 강진청자박물관 김행주 학예연구사- "고려청자의 비취색 구림도기에서 시작"

강진청자박물관 김행주 학예연구사를 만나 청자발전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김 학예사는 “남도의 도자기 역사는 나주의 토기를 시작해 영암 구림도기에서 영향을 받아 발전됐다고 볼 수 있다”며 “영암 구림도기 등을 통해 발전된 도자기의 형태가 지역적으로 생산되면서 청자로 발전했다”고 밝혔다.

이어 김 학예사는 “하지만 아직까지 인근 지역에서 발전된 청자에서는 양질의 작품청자가 아닌 대부분 서민들의 생활자기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라며 “강진청자의 관요를 제외한 곳에서는 서민용으로 만들어져 활용된것 같다”고 강조했다.

또 김 학예사는 “항상 강진청자가 발전할수 있는 원동력 무엇이었는지 조합이 되지 않았다”며 “대형 사찰이었던 정수사에서 우수한 인력을 가지고 청자기술을 발전시켰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 학예사는 “고려시대 육로보다는 해로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고 이를 통해 도자기 역사가 보급될수 있었다”며 “조선시대 해로가 막히고 억불정책이 진행되면서 그 많던 청자의 역사는 한순간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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