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의 생활용 도자기 대부분....초기청자 발생

강진청자의 맥 장흥으로 일부 흡수된 듯

장흥군 용산면 풍길리 일대 초기청자 가마터가 위치한 지역이다. 이곳은 해로가 발달돼 있어 청자가마터의 여러 가지 여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강진에서 고려청자의 꽃을 피웠던 청자는 갑작스럽게 형태를 알 수 없도록 사라진다. 이런 형태에 대해 설득력을 얻는 부문이 억불정책과 연관성이 확인된다.

당시 고려시대 승려의 신분은 왕족의 다음 신분으로 도자기의 역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불교의 역사가 조선시대에 들어서 사라지면서 청자도 쇠퇴기를 걸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강진의 고려청자가 활발하게 모습을 드러 낸 시점에 장흥지역에서도 청자의 모습들이 나오고 있다. 장흥지역의 도요지는 총 50여개에 달하고 있다. 산악지역에 21개, 평야지역에 4개, 해안지역에 19개가 몰려있다.

청자가 발견된 곳은 용산면 풍길리와 회진면 회진리 가마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두 곳의 공통점은 주로 해안가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해상세력을 통한 청자의 유입이 가능했을 것으로 본다. 그럼 그 이전에도 많은 도기들이 만들어져 왔을 가능성이 높다. 형태는 주로 도기였을 것이다.

여기에 영암 구림도기에서 볼 수 있듯 유약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도자기의 형태를 갖추고 시작한다. 해상왕 장보고의 역할도 충분이 있었다고 본다. 당시 청자의 제조기법은 중국의 월주요의 모습을 띄고 있고 받침의 굽이 마치 동그란 해무리처럼 보이는 해무리굽 청자가 발견되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장흥의 청자는 강진처럼 황실에 납품하는 관요가 아닌 일반 요에서 생산됐다. 이렇다보니 주로 생산됐던 종류는 생활용자기가 대부분을 차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초기 청자 가마터가 위치한 장흥군 용산면 풍길리 풍길마을 인근에는 가마터가 위치해 있다. 마을뒤편 두암저수지 주변 산 130번지에 가마터가 자리 잡고 있다. 발견됐던 청자는 초기의 형태로 대부분 그릇의 모습이었다. 유적의 보전상태가 양호해 지난 2004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221호로 지정됐다.

장흥군 용산면 월송리 월송제의 모습이다. 월송제 인근에는 공방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조선백자 가마터가 유명하다.
이곳의 형태는 청자의 생산에 좋은 상태를 띠고 있다. 풍길마을 앞으로는 충분한 해로(海路)를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고 여기에 두암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가마를 설치하기 위해서는 물, 흙, 나무가 풍부해야 했다. 인근 두암저수지가 물을 공급하고 인근에는 나무와 흙이 충분했다. 이런 공간은 가마터가 위치해 청자를 생산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청자는 일반인도 쉽게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초기 청자의 경우 일반 대중들의 사용보다는 지방의 호족세력들이 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장흥지역에서도 불교와 연관된 청자편이 발견됐다. 천관사에 발견된 편에서 당시 청자는 부와 관련된 것을 알 수 있게 했고 여기에 고급문화를 이끌어 가는데 청자가 적지 않은 부의 상징으로 표현된 것을 알 수있다..

이런 청자의 발전은 주로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백자로 변모해갔다. 역시 해안지역에 위치한 장흥군 용산면 월송리 재송마을 인근에는 청자를 이어 백자로 변모한 가마터의 형태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조선 백자 가마터에는 유사한 형태의 가마터가 만들어져 있다. 지난 1900년대까지 백자가 생산됐다고 알려지는 재송마을 가마터에도 일반 주민들이 생활하는 생활용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곳에도 역시 대형 저수지인 월송제가 자리하고 있고 당시 가마의 설치방법, 축조방법 등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곳 가마터는 지난 77년 전라남도?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됐다.


이처럼 장흥에서도 도자기의 역사가 이어진 것은 역시 처음 유약을 발라 시작한 구림도기의 영향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영암 구림도기의 역사는 해로를 따라 점차적으로 남도를 따라 진화했을 것이다. <계속>


▶장흥 월송리 백자요지의 의미 - “백자 제작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용산면 일대에서 발견된 조선백자의 모습
지난 2008년 마한문화연구원은 장흥 월송리 백자요지에 대해 지표조사에 나섰다. 이 지표조사를 보면 월송리 백자요지의 중요성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월송리 백자요지는 가마와 공방 등이 세트로 확인돼 그 의미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공방은 수비공, 난로형아궁이, 연토장, 물레축혈, 시유시설 등으로 도자제작과정의 전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 수비공의 크기나 난로형아궁이의 구조는 조선후기에 나타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출토유물은 백자를 중심으로 생활용기인 옹기와 토기 등이 출토됐고 운영연대는 19세기 중·후반으로 표시하고 있다. 특히 자연환경, 지리환경이 잘 보전돼 당시의 가마구조와 백자제작과정, 도공의 삶을 연구하는 귀중한 유적으로 판단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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