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락사항, 과장의혹 많아

국내 첫 여성의병 양방매 할머니의 생존모습
1.제안배경
"역사를 망각한 민족은 미래를 가늠 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역사는 사실을 과장 없이 기록 할 때 생명력이 있고 가치가 있다. 그러한 역사는 그 주체들의 정체성을 나타낸 것으로, 그들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이다.

잘못된 과거는 이를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우를 범해서는 아니된다는 교훈을 제시하고 있고, 긍정적인 과거는 이를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역사는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민족과 나라들은 자기네의 역사를 중요시 한다.
 
어떤 민족이던지 역사를 잘 보존하면 현실은 역경에 처해있더라도 그 역경을 해쳐 나 갈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렇다.

유태인들은 자기 나라를  잃고 2000년을 세계 각처를 떠돌면서 이방인의 취급을 당했고, 특히 히틀러  나치 치하에서는 600백만 명이 학살당하는 수난과 치욕을 당했다. 그러면서도 랍비들이 목숨을 걸고 그들의 역사를 전승했기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온니즘의 깃발아래 이스라엘을 건설하였다.
 
"영암항일독립운동사" 를 다시 쓰자는 것도 위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영암의 역사는 단지 영암만의 역사가 아니요, 한국사의 한 부분이다.

필자는 영암인근 지역인 나주 함평 및 전국 중 제천시 횡성군 이천군 홍성군 등 여러 지역의 항일운동사와 영암 항일 운동사를 비교 검토 한바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영암에서는 연구자가 없음을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2.영암지역의 항일운동개관
영암은 항일 운동이 인근 어느 지역 보다 격렬했던 곳이다. 정부에서 추서하는 독립 유공훈장을 받은 분이 31명으로 필자가 영암신문을 통해 이미 발표한 적이 있다.
 
한일 강제 합병직전 의병전쟁은 금정면 일대를 중심으로 국내에서 최후의 격전장이었다.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여기에서 순국하였으며, 영암인 중에 정부가 수여하는 독립 유공훈장을 추서 받은 김치홍 유시연 조치덕 정관오 양방매 등 다섯 분이나 있다.
 
3.1 운동 때는 1천여 명의 군민이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이를 주도했던 조극환 등 18분이 실형을 받고 감옥생활이나 태형 등을 당했다. 군서의 박규상 지사는 병보석으로 귀가 중 자택에 도착 직전인 서호강에서 순국했다.
 
학생들의 항일운동도 대단했다. 영암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3.1운동 때 태극기제작이며, "조선 국사를 가르키라" 는 등으로 동맹휴학 때문에 일본인 교장이 자살하게 되었고, 광주. 목포 등지의 유학생들이 성진회, 독서회를 통한 학생들의 항일의식 고취운동도 거셌다.
 
김민규, 조극환, 유혁, 한동석 김상학 등을 중심으로 한 신간회 영암지회의 활동과 비밀결사운동이며, 유혁, 곽명수씨 등이 주도하여 덕진면 영보정에서 일으킨 농민항쟁으로 영암인 50여 명이 구속되어, 유혁 곽명수 등은 5년형을 받았으며 관련자 모두가 실형을 받았다.

이 사건의 재판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에서 진행되었다. 이 재판에 관계된 교도관을 법정에서 피고들인 영암인 들이 폭행한 사건은 언론을 타고 전국에 알려졌다.
 
최동환, 최석호 등이 비밀 단체인 영구회를 조직하고, 영보를 중심으로 야학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처의 후회"라는 연극을 공연하는 등 항일사상을 고취 시키는데 주력하였다.
 
낭산 김준연은 절대적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1920년대 국내 항일운동의 중심적 인물 중의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의 사회개혁운동과 민족보존운동 및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오랜 기간 영어의 몸이 되기도 하였다.
 
조극환 선생의 서울 서대문형무소 복역당시 사진
3.편집상의 오류
영암항일운동사는 일본의 침략기로 부터 해방 될 때까지의 전 기간 중에 일으킨 항일 사건들을 모두 수록해야 한다.
 
영암군지 편찬위원회가 1998년에 발행한 영암군지 상권을 보면 일제하 항일운동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영암군지 상권 303쪽에 "제5장 일제식민지시대"를 설정하고 국내외정세를 서술 한 후 "제5절 한말 의병사"만을 기술하고 있으면서 3.1운동과 농민항쟁은 극히 간략하게 한말 의병사 뒷부분에 서술하였다.

한말 의병사는 항일운동의 일부분으로 3.1운동과 농민항쟁은 성질상 한말의병사와 항목을 달리하여 서술하여야 할 사항이다. 또 앞에서 적시한 국내외 정세는 영암 항일 운동사를 전개하는 서론적 부분에 해당 할 뿐으로 편집상의 오류가 있다.
 
4.한말 의병사의 과장의혹과 누락사항
영암군지상의 기록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덕진면 백계리 박평남이 1907년 격문을 발하여 영암군 일대의 젊은이들 600여 명이 운집하여 훈련을 시켰고, 영암 수비대를 상대로 투쟁하다 다음해 봄에 심남일이 100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영암 금정면 일대를 거점으로 활동함에 따라, 영암의병은 심남일 부대에 편입 된 것이다.
 
박평남은 1909년8월 심남일과 함께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대구복심원에서 교수형을 받은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제기한다.

■'영암의병장'박평남 인물
박평남이 격문을 발하여 젊은이 들 600여 명이 모여들 정도라면 박평남이 그만큼 영암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져야한다. 관직, 학덕, 재력 또는 용맹성이 있어야한다. 600여 명의 의병이 전쟁에 소요된 군자금이 있어야 한다.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고, 군수물자를 확보 할 수 있어야한다.
 
600여 명의 대군을 모집하는 데는 자금조달 등 치밀한 계획이 선행되어야하고, 거사 이전에 많은 동조자들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박평남은 " 나주 출신으로 그의 아들이 덕진면 백계리에서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고 있어 박평남이 가끔 아들이 있는 백계리를 다녀갔다"는 것이다. (2008년 1월 26일 필자와 신희범선생과의 대담 중에서) 위와 같은 점을 종합하면 박평남을 중심으로 한 영암 의병의 사실이 어디까지 인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

■기록상의 박평남 부대
박평남 의병부대는 있었다. 그런데 그 규모와 활동시기에는 기록간의 상이점이 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작성한 일본의 영구비밀문서인"폭도에 관한 편책" 에는 박평남 부대가 1909년 3월에 부대원을 신규 모집 했으며, 그 인원은 30명 정도로, 다음 달에는 40명 정도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독립운동사 제15권 141쪽,440쪽, 국사편찬위원회 자료)

■박평남의 체포 및 사형관련 사항
영암군지에는 박평남은 신남일과 함께 일병에 체포되어 광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항소하여 대구 복심법원에서 사형집행을 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에 의해 체포된 15명의 사진과 명단(황두일 김원국 양진여 심남일 안규홍 김병철 강사문 박사화 나성화 송병운 오성술 이강산 모간년 강무경 이영복)에는 박평남이 들어 있지 않다. (일본이 작성한 비밀문서인 주차군사령부의 폭도 토벌지, 경무국의 폭도에 관한 편책)
 
심남일은 1909.7.21일에 영암군 금마면 고인동에서 자진 부대를 해산하고, 강무경과 강무경의 부인 양방매와 함께 능주로 잠행하여 신병을 치료하던 중 10월9일에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광주법원을 거쳐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은 후 1910년7월23일 대구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39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영암인 조치덕, 박도집 의병부대 기록결여
영암 금마면 조치덕, 영암 종남면 박도집부대가 있었다 는 일제의 기록이 있으나 영암군지에는 기록이 없다.
 
-조치덕은 1909년 9월 23일 호남지역에서 부하 40여 명을 인솔하고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중 금마면(현 금정면) 이암리에서 일본군 보병 제1연대 소속 중위 귤정웅 부대와 전투 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독립유공자 공훈록, 한국독립운동사 제19권661쪽)

-박도집(44세)은 종남면(현 시종면)인으로 그의 부대원 12명과 함께 체포된 사실에 관하여 1909년 9월 22일 목포 경찰서장이 총독부 내부 경무국장 송정무 앞으로 보낸 "폭도에 관한 건" 이란 제목으로 보고하고 있다. 12명의 명단은 박송현 고사현 박양선 김석순 박정숙 강세국 윤흥윤 이장옥 정경현 강옥연 김영동 김홍동 등이다.(한국독립운동사 제15권 523쪽, 국사편찬위원회)
 
낭산 김준연 선생의 수감사진
5.완전누락 사항
■낭산 김준연선생 독립운동사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는 낭산 김준연 선생기념사업회가 가장 중점적으로 조명하고 발굴하고 있는 사항이다

■동학 농민군 전쟁에 관한 기록이 누락되어 있다.
필자는 금년 초 동학농민혁명참가자 명예회복과 관련하여 영암 분 13명의 명단을 영암신문에 기 발표한 바 있다.
 
6.제 언
■ 영암인의 자긍심을 일깨우자
각 시·군 등 지방자치단체가 자기네들의 홍보 시책의 일환으로 전문가 들을 투입하여 항일 독립 운동사를 단행본으로 출간하여 배포하고 있다.
 
영암은 영암인의 얼이 살아 있는 곳으로 예로부터 충의 예절이 바르고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정신을 이어 받아 인근 어느 지역보다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순국을 하신 분들과 여러 차례 감옥생활을 하신 분들이 많다.
 
이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발전 시키는 추모 사업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무이며, 영암인의 자긍심이다. 이의 일환으로 항일 독립 운동사를 재정립하고, 발굴하는 연구 사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광범한 사업이 한 두 사람의 개인이 추진하기에는 불가능하다. 영암인의 중지를 모아 체계적으로 추진하여야 한다.

■영암 학생교육보감(초등학교용)도 다시 써야
영암교육청이 2008년 말에 초등학교 학생교육용으로 발간한 "영암학생교육보감"이 일제하 영암인의 항일독립운동부분을 김준연선생과 조극환지사 두   분만의 항일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근현대사 중 항일독립운동부분은   특히 초등학생들에게 고향에 대한 가치관과 자긍심 및 정서를 정립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을 누락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영암학생 교육보감을 다시 써야한다.



 ■ 조복전 선생 프로필
▲도포면 목우동 출생
▲법무부 연구관, 대구소년분류심사원장,청주미평고등학교장,
 경기대 겸임교수 역임.
▲영암 항일독립운동사 연구
▲저서 및 논문 : 한국 청소년 보호 정책, 청소년 비행 예측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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