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서호면 금강마을, 황촌마을

서호면 금강리 황촌마을은 서호면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영산강 접경마믈이다. 영암 해창과 무안 몽탄에서 내려온 물이 황촌마을 앞에서 만나 남쪽으로 흘러간다. 요즘에는 마을앞에 푸른 벼가 자라고 있다.

"비가 많이 내려 민물이 내려오면 강물에 염도가 약해져 농어가 술에 취한 듯 비실거렸제"

영산강 줄기를 따라 방향을 계속 북으로 잡아 올라가면 본격적으로 강다운 강을 만난다. 바다같다. 마침 날씨가 맑아 멀리 하늘 끝에 아기자기한 산들이 보인다. 저 곳은 어디일까. 북쪽으로 산들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서호면 태평정마을에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금강(金江)마을이 있다. 금강마을은 서호면의 가장 북쪽 마을이다. 여기에서 가장 북쪽이란 말은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뜻이다.

마을의 북서쪽은 물론 동북쪽까지 영산강으로 둘러쌓여 있다. 예전에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큰 바다였다.

영암쪽 해창에서 내려오는 물과 무안 몽탄에서 내려오는 물이 금강마을에서 만났다. 그 물이 동네앞까지 출렁거렸다.
 
금강마을 앞에서 몽탄까지 매일같이 큰 어장이 섰다. 영산강을 타고 올라온 바다고기들이 이 일대에서 알을 낳았다.

어미가 수초밑에 알을 낳으면, 부화한 새끼들이 바다로 돌아가 커서 다시 영산강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이 일대는 큰 양어장이란 말이 있었을 정도로 물고기들이 풍부했다.
 
금강마을은 한때 130여가구나 되는 큰 마을이었다. 배를 가지고 전문적으로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 역사가 아주 길다.

고기가 많은 영산강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을 것이고, 그곳에 터를 이뤄 대대로 내려오며 조상들의 고기잡이 전통이 이어졌을 것이다. 금강마을은 지금도 80가구나 되는 큰 마을이다. 바닷물이 출렁대던 마을앞은 이제 논이 생겨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박근수 어르신
금강마을 박근수(88)할아버지는 금강마을의 고기잡이 역사가 아주 오래됐다고 회고했다.

"옛날 어르신들 말씀을 들어보면 (고기잡는)기술자들이 아주 많았어. 강은 바다와 또 다르기 때문에 여기저기 지세를 잘 알아야 하거든. 금강마을 사람들은 그런 기술이 뛰어나다고 했제"
 
박 할아버지는 스무살때부터 고기배를 탔다. 멀리 가지도 않고 '몽탱이(몽탄)'와 금강마을 사이에서 고기를 잡아 목포에 내다 팔았다.
 
이 맘때에는 농어가 고급어종이었다. 비가 많이 내려 상류에서 민물이 많이 내려오면 강물에 염도가 약해지면서 농어가 마치 술에 취한 듯 비실거렸다.

이때는 농어들이 정신이 없기 때문에 그냥 낚시만 줄지어 내려놔도 아무 곳에서나 막 물고 올라왔다. 엄청난 크기의 농어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혔다. 그것을 활어상태에서 목포로 가지고 갔다.
 
"농어를 목포 선창에 퍼 놓으면 다들 놀라. 농어 크기가 아주 크거든. 바다에서 잡은 농어는 그 정도는 없었어"
 
영산강에서 고기를 잡은 어부들은 목포에 가면 중간상인들이 최고 대접을 해 주었다. 고기가 큰데다 맛도 월등했기 때문에 영산강어부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오후늦게 영산강 배가 도착하면 여인숙을 잡아주고 막걸리와 소주를 떨어지지 않게 방으로 넣어 주었다. 아침밥도 잘해서 먹였고, 영산강으로 다시 올라가는 배에 큰 소주병을 잊지 않고 올려주었다.
 
"그땐 참 좋았제. 벌이가 쏠쏠 했어. 돈도 꽤 벌었는디 어디로 다 갔는지 알 수가 없으니..."
 
농어를 잡는 미끼는 문저리였다. 썰물이 되면 마을건너편 갯벌에 나무기둥을 박고 그물을 쳤다. 물이 들어오면 문저리도 따라 들어왔다. 그러다가 물이 빠져 나가면 그물에 갇혀있는 문저리가 수두룩 했다.

그것을 가져다 미끼로 주낙을 놓으면 어른 팔 길이만한 농어가 냉큼냉큼 물어 올라왔다. 하구언이 막아진 후 농어는 영원히 잡을 수 없었다.
 
김남례 어르신
금강마을 김남례(80) 할머니는 18살 때 나주에서 통통배를 타고 시집을 왔다. 영산강 일대를 운항하던 진풍호라는 연락선이었다.

시집을 왔는데 시댁에 먹을게 부족했다. 주변에 온통 산과 바닷물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갯벌에서 해산물도 잡아다 팔고, 고기잡이를 잡기도 했지만 그런것도 하지 못해 늘 어려운 살림을 꾸려야 했다.
 
김 할머니는 "바닷물이 날마다 마을앞까지 들어왔지만 팔자에 그런일은 못하게 했는지 시댁식구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바다에 나가 일을 할 줄을 몰랐다"며 "보릿고개를 넘던 세월이 너무나 많았다"고 옛날을 회고했다.
 
금강마을에서 조금 올라가면 황촌마을이란 마을이 있다. 금강마을에 속해 있는 곳이다. 마을은 북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영산강이 흐르는 쪽이다.

지금은 마을앞에 간척지가 생겼지만 이곳 역시 매일같이 바닷물이 출렁이던 곳이다.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급경사의 길을 내려가야 한다. 집을 산아래 바다와 가까운 곳에 지은 것이다.

바닷가는 바닷가인데 산골이다. 산골 바닷가란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 산골바닷가란 표현이 이렇게 어울리는 마을이 아닐 수 없었다.

황정남 어르신
황촌마을에는 하구언이 막아지기 전에 세가구 정도가 살았으니 지금은 다섯가구가 살고 있다. 농사를 짓기 위해 사람들이 더 유입한 것이다.
 
황촌마을 황정남(75)씨도 어부였다. 지금은 논을 여덟마지기 배당받아 짓고 있는 농부가 됐다.

황씨는 "아이들도 모두 도시로 떠나고 두 부부가 병원 다니는게 일이 됐다"며 "고기는 더 이상 잡을 수 없지만 논들이 생겨 많은 사람들이 쌀걱정은 하지 않고 산다"고 했다.

 역사의 순간들 - 1962년 영암에서 표범이 잡혔다

영암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표범이 서식했다는 신문기사가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경향신문 1981년 9월 16일자 '종(種)의 위기'란 기사에는 1962년 영암에서 표범이 잡혀 창경원에서 13년간 사육된 기록이 있다고 보도했다. 영암의 어디 지역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으나 표범의 생활습관으로 봤을 때 '깊은 산속 어디'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요즘은 '동물의 왕국'에서 보는 표범은 영암에서도 잡힐 정도로 근세기까지 우리 생활속에 인연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앞서 1960년에는 경남 합천군에서 주민들이 1년된 수컷을 잡아 창경원에서 키우다 1973년 7월에 죽기도 했다. 13년동안 사육됐던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표범을 실물로 본 마지막 한국표범으로 보고 있다. 그러다가 1979년 2월 전남 광양에 있는 서울대학교 농대 연습림에서 발자국이 발견돼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환경부는 1986년부터 5년 동안 전국적인 자연생태계 조사를 통해 표범이 우리나라에서 멸종됐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99년 환경부 생태조사단 한상훈 박사가 월간 '사람과 산'3월호에 한국표범이 한반도에 30여마리, 남한에 10여마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해 관심을 끌었다.

배설물과 발자국 등을 통해 봤을 때 표범의 생존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었다. 우리 영암지역 깊은 산속 어디엔가 표범이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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