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학자들 구림마을 답사 왕인고향 ‘공인’

영암에만 전해오던 전설 전국적으로 열려져

1992년 왕인문화축제 시작... 27일에는 제5회 왕인국화축제 개막

 

왕인박사유적지내 전시관에서는 왕인박사가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느 모습을 재현한 그림을 관람할 수 있다.
29일부터 왕인국화축제가 열리는 왕인유적지는 언제부터 공식화됐을까. 왕인박사는 일본에서 유명 인사였지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인 기록이 없었다. 그래서 왕인박사는 영암에서 많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국내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왕인박사에 먼저 관심을 보였던 곳은 일본이었다. 일본에는 고대 사료인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백제 17대 아신왕 14년인 서기 405년 백제인 왕인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

내선일체를 주장하던 일제는 한국을 침탈한 직후인 1899년에 이등박문이 앞장서 왕인현창회를 설립하고 대판에 왕인묘역을 신축했다. 이어 1937년에는 동경우에노공원에 박사왕인비를 세우면서 일본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이 시기에 국내에서도 왕인박사에 대한 깜짝 관심이 있었으나 확산되지 못했고 해방이후에도 사료가 없다는 이유로 거의 잊혀진 인물이 됐다. 영암이 왕인 출신지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시기다.

그러다가 70년대 초 들어 왕인박사에 관심을 가진 아마추어 사학가가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김창수씨(81년 별세)로 전북 정읍 출신 사람이었다. 자유당 때 국회의원 3선을 했던 정치인 출신이기도 했다.

김창수선생이 왕인박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68년 일본의 농촌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을 때였다. 오사카에 있는 친구가 “왕인의 묘가 이곳에 있는데 가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왔다. 당시 왕인은 일본문화의 시조로 존경 받으며 공자 이상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귀했고, 그가 어디 출신인지는 학계에서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김창수 선생은 본격적인 왕인 자료수집에 나섰고, 일부 자료가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1973년 초 영암에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당시 영암JCI 회장이었던 강신원씨가 보낸 편지였다. 강신원회장은 편지에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가 왕인의 탄생지라는 주장을 분명히 펴고 있었다. 깜짝 놀란 김창수씨는 곧바로 영암으로 내려와 강회장을 만났다. 구림리 현장에도 가보았다.

구림리에는 왕인박사의 전설과 각종 유적지들이 고스란히 전해오고 있었다. 김창수씨는 마을 촌로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채록했다.

마을사람들은 영암이 예부터 해창만을 중심으로 해상교통이 발발된 곳으로 바다만 건너면 곧장 일본에 닿을 수 있었으며, 구림리 주변에 있는 ‘돌정자’가 왕인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 서호강으로 나가면서 동네를 뒤돌아보던 곳이라는 전설을 들려주었다.


또 당시를 기준으로 8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속칭 책굴앞에서 왕인 추모제를 지냈다는 것도 귀가 솔깃한 이야기였다. 책굴은 왕인박사의 서고로 전해지고 있었다.

왕인박사가 공부하던 곳으로 전해진 문산재에는 석축과 우물, 주춧돌, 오랜 기왓장이 나뒹굴고 있었고, 왕인이 종이를 만들었다는 지침바위도 현장에 직접 가서 살펴보았다. 김창수선생은 영암을 두세 차례 오가며 현장을 답사한 끝에 구림리가 왕인의 출생지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 같은 사실은 주요 신문에 보도되며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문제는 이를 학계 등을 통해 검증받아 공식화하는 것이었다.


그해 10월 구림리에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고증답사반이 찾아왔다. 이 답사반은 당시 영남대학교 총장이던 이선근 박사와 성균관대학원장 유홍렬박사, 고려대학 조동필 교수, 서울농대 유달영교수 등 전국의 유명석학들이 망라됐다.

김창수 선생이 답사반을 곳곳으로 안내했다. 이들은 역사적 고찰과 지명, 산세 등을 살펴보며 이곳이 왕인박사의 출신지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고증답사반은 같은 달에 곧바로 ‘사단법인 왕인박사현창협회’를 만들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다음해 5월 광주에서 왕인박사현창협회 주최로 전국의 석학들이 참석한 가운데 ‘왕인박사유적연구발표회’가 열려 영암 구림리가 왕인박사의 고향으로 확인되기에 이르렀다. 이후부터 왕인박사유적지 성역화사업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75년 1월에는 전남도가 2억 원을 들여 왕인박사 유적지를 성역화하기로 결정했고, 76년 11월에는 구림마을 성기동에 왕인박사유허비가 제막돼 이곳이 왕인박사 탄생지라는 것을 전국에 공식화하기에 이르렀다.
 
왕인박사 성역화사업은 성기동일대 5만평을 정화하면서 3년 동안 30억원을 투입해서 87년 9월 마무리 됐다. 당시 전남 도지사이자 현 왕인박사현창협회장인 전석홍씨의 전폭적인 지원이 컸다. 왕인박사 유적지는 이제 영암의 최대 문화적 자산이 됐다.


왕인박사 유적지가 성역화되고 개발된 과정을 보면 이웃 지역들도 비슷한 사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진의 청자 가마터는 인근 주민들이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을 뿐 오랫동안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 이에 대해 관심을 보였던 사람들이 일본인들이였다.

일제시대 때에는 총독이 강진에 내려와 가마터를 둘러봤다고 한다. 그러다 해방과 함께 청자에 대한 관심을 다시 묻혀버렸다. 그러다가 7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됐고, 주민들 사이에 청자재현사업추진위원회가 결정돼 활발한 재현사업이 진행됐다.

왕인사당의 모습

90년대 들어 청자는 강진의 대표 관광 상품이 됐다. 완도의 장보고성역화사업도 70년대 초반부터 시작돼 완도의 대표적 문화자산이 돼 있다. 왕인박사와 청자, 장보고등이 모두 7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발굴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가는 우리나라가 막 경제개발을 시작한 단계였다. 배고픔이 조금씩 해결되어가자 문화유산 복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왕인박사가 영암에서 다시 재탄생한 것은 1천600년만의 일이였고, 청자와 장보고가 강진과 완도에서 다시 태어난 것은 1천200여년만의 사건이었다.

■ 왕인박사 유적지 연보
1973년 2월 영암JCI 회장이었던 강신원씨
‘영암이 왕인박사 고향이다’ 서울 김창수선생에 편지
1973년 4월 김창수선생 구림리 현장답사
1973년 10월 학자들로 구성된 답사반 구림리 방문
1973년 11월 ‘사단법인 왕인박사현창협회’ 창립
1974년 5월 광주에서 ‘왕인박사유적연구발표회’개최
1975년 1월 전남도, 왕인박사 유적지 성역화 결정
1976년 11월 구림마을 성기동에 왕인박사유허비 제막
1987년 9월 성역화사업 마무리
1992년 4월 왕인문화축제 시작
2007년 10월 왕인국화축제 시작
2011년 10월 28일 제5회 왕인국화축제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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