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 왜식 고분, 왜식 토기 ‘하니와’ 출토... 한일 역사학계 치열한 줄다리기

“왜에서 영향을 받은 영산강 유역 현지인들이 축조한 무덤”

한․ 일해양교류사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진실에 접근&

하늘에서 바라본 자라봉 발굴현장. 뒤쪽이 둥그렇고 앞쪽이 튀어나온 전형적인 장방후원분이다.
고대고분 발굴 발표현장에 갈때마다 궁금한게 한가지 있다. 왠만하면 한문이나 현대말로 풀어쓰는 문화재 용어중에 ‘하니와’란 일본말이 등장하는게 그것이다.

한일 역사학계가 자신들의 우월성을 치열하게 주장하는 대목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니와라는 일본말은 우리 역사학계에서 마치 고유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는 듯 하다.

지난 23일 시종면 태간리 현장에서 열린 자라봉고분 발굴현장에서도 그랬다. 발표장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하니와(埴輪)란 50여점의 일본식 토기였다.

붉은 빛을 띠면서 마치 빗살무늬토기 모양을 하고 있지만 중간에 턱 처럼 생긴 띠(돌대)가 두 개씩 있는게 하니와의 큰 특징이다. 다시말해 무덤의 주인공은 6세기경 하니와라는 일본식토기를 사용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니와란 일본어로 흙으로 만들어 빙 두른다는 고분시대 토용들을 뜻한다. 그럼 왜 하니와란 일본식토기가 영암의 고분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일까. 태간리 고분의 형태와 주인공을 찾아가보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 미스테리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알려져있다시피 태간리 고분은 전방후원분이란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전반후원분이란 봉분은 둥글게 만들고, 그 전면에는 방형 기단, 혹은 제단을 조성한 형태를 말한다.

하늘에서 보면 마치 열쇄구멍모양을 하고 있는게 전방후원분 양식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주민들의 눈에는 이게 목을 내민 자라를 닮았던지 태간리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이곳을 자라봉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전방후원분이 전형적인 왜식(倭式) 고분 양식이라는 것이다. 일본사학자들은 전방호원분이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한 고대무덤양식이라고 주장해 왔다.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일본 고대사는 조몬시대와 야요이시대를 거쳐 대체로 서기 4세기 무렵 이후는 고분(古墳)시대로 든 것으로 보는데, 이 고분시대의 마스코트가 전방후원분이라 할 정도로 등장시기도 한반도의 그것에 비해 훨씬 빠르고 숫자 또한 구체적인 통계가 불가능할 만큼 많다. 전방후원분은 1980년대에 접어들기 전까지만 해도 이 지구상에서 오직 일본열도에만 있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초부터 우리나라 전역에서 전방후원분이 하나둘 발견되면서 우리 역사학계는 미묘한 갈등을 겪어야 했다. 일본의 전통 무덤양식이 우리나라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일본이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기했던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임라일본부설을 통해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했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했다고 주장했다.


이번에 발굴된 태간리 자라봉고분만 해도 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됐고, 여기서 나온 유물도 하니와라는 일본식 토기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러한 발견은 적잖은 설득력을 가진 것이었다.

80년 이후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20여개의 전방후원분중에 영산강유역에서만 12기가 확인되고 있다.

지금까지 확실히 전방후원분으로 구분되는 봉분은 자라봉고분을 비롯해 ▲전북 고창군 칠암리 고분 ▲영광군 월산리 월계고분 ▲담양군 고성리 고분(월성산 고분)과 성월리 고분(월전 고분) ▲광주 월계동 1ㆍ2호분 ▲함평 장년리 장고산(長鼓山) 고분 ▲함평 마산리 표산(杓山) 고분군 중 제1호분 ▲함평 신덕 고분 ▲광주 명화동 고분 ▲해남 방산리 고분 외에 해남 용두리 고분이 꼽힌다.

이 중에서 자라봉고분을 비롯해 월계동 1ㆍ2호분(전남대박물관)과 명화동 고분, 신덕 고분, 그리고 방산리 고분(이상 국립광주박물관)은 이미 발굴조사가 이뤄졌는데 하나같이 ‘하니와’가 다량으로 출토됐다.

■최초 발굴한 태간리 고분
시종면 태간리 자라봉고분 현장에서 열린 발굴설명회에서 참석자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자라봉분이 발굴된 과정을 듣고 있다.
전방후원분의 출현으로 답답해진 우리 역사학계에 다소 숨통을 트이게 한 게 바로 1991년에 있었던 태간리 자라봉고분 발굴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전방후원분을 발굴한 것은 자라봉고분이 처음이었다.

마침 북한에서도 자강도 초산군 일대 압록강유역에서 2세기대 전방후원분을 발굴했다는 보고서가 국제학술대회 등을 통해 나온 시점이었다.

당시 태간리 자라봉 발굴을 주도했던 강인구 교수는 북한지역에서 전방후원분이 발굴에 이어 남한에서 전방후원분이 발굴된 것은 이 무덤형식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파됐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태간리 자라봉고분 발굴을 계기로 우리학계에서 전방후원분이 한반도가 발생지라는 근거를 내세운 것이다. 강교수는 당시 태간리 자라봉고분의 조성연도를 4세기로 봤다.


그러나 이후 계속된 발굴에서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의 축조시기는 거의 대부분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사이에 집중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에 발굴된 태간리 자라봉고분 또한 6세기 전반으로 나온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다시 역사학계의 흐름은 일본의 전방후원분이 3세기후반에 출현한 것으로 보고 결국 한국의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전방후원분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것으로 대세가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그 후에는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은 누가 만들었고 무덤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논란의 핵심이었다. 일본은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이 분명히 일본을 모델로 삼았고 그 주인공은 당시 한반도와 교역하던 왜계의 이주 정착집단이거나 정치적 세력을 형성했던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우리측은 전방후원분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백제의 토착세력이거나 일본 열도로 이주했다가 회귀한 한반도인들이 만들었다고 주장해 왔다.


이들 전방후원분에 묻힌 사람들에 대해서는 현지 수장층이라는 견해와 왜인이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선다.

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들 무덤이 왜색을 짙게 풍기기는 하지만 백제적인 요소 또한 농후하다는 점을 들어 왜에서 영향을 받아 백제 현지인들이 축조한 무덤이라고 본다. 이 경우 임나일본부설은 원천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후자 즉, 전방후원분에 묻힌 사람들을 왜인으로 보는 경우에도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결론은 마찬가지다. 무덤 분포양상으로 보아 왜(倭)가 호남지역을 장기간 지배한 흔적이라 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백제에서 지방통치를 위해 '채용'한 사람들이 묻힌 곳이 바로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이라는 것이다.

왜의 사람이 백제에 정착하여 살다가 죽을 때 백제의 양식을 따르기보다는 왜 본래의 무덤 양식인 장구형 무덤을 택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주장이 있지만, 아직 무엇이 확실히 맞다고 할 만한 것은 없다. 하지만 전방후원분의 발견은 적어도 이른 시기부터 영산강 유역세력과 왜가 서로 교류를 해 왔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유적임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여지고 있다.


■하니와의 비밀
자라봉분에서 출토된 왜(倭)식 토기인 하니와. 50여점이 나왔다.
그럼 전방후원분에 묻힌 하니와란 일본토기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이에대한 주장도 다양하다. 우선 일본에서 발견되는 하니와는 백제에서 넘어간 도래인들이 생산기술을 전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당시 전남지방과 일본은 요업(窯業)생산의 분야로 깊게 맺어지고 있었고 제련 등의 기술을 가진 공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여러 가지 생산기술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한국의 생산기술을 받아서 고온 가마로 하니와를 굽는 것이 새로 시작되었고 이후 일본과 한국의 교류에 따라 영산강유역 고분에서도 하니와가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또 왜 집단이 영산강유역으로 이주해서 정착하면서 토기를 만들었다는 주장과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하니와 공방에서 제작기술을 배우고 돌아온 영산강유역의 도공들이 하니와를 만들어 유통시켰다는 주장등도 있다.

요즘에는 영산강 유역의 정치세력과 왜인들이 상호 방문교류하면서 일본의 하니와 문화가 유입됐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는 추세다.


■영산강 지역 고대사 미스테리 풀어줄 전방후원분
이처럼 전방후원분은 영암을 포함한 영산강 유역의 4~6세기 역사를 풀어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문화재이다. 전방후원분과 하니와 토기의 의미등은 단순히 두 나라의 정치적 의미에서 접근해서는 풀어질 과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자국의 이익적인 측면에서 역사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문화일보 최영창 문화전문기자는 “전방후원분의 정확한 출현시기,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주변세력의 동향등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