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천년의 모진 비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지켜온 영암! 월출산과 함께 신라말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찬연(燦然)한 영암! 영암이 어떤 세운(世運)이 몰아치기에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소멸지역에 해당된다는 말인가. 현대를 살아가는 영암인은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문제를 풀어가는 데는 영암의 현실을 직시하는 혜안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풍부한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이 있다. 이것이 영암의 난제를 풀어가는 밑천이요 자본이다. 이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지혜와 안목을 가지고 개혁을 뛰어넘어 혁신의 자세로 임해
고증을 통한 역사 재조명 필요필자는 구림마을과 도선국사에 대한 글을 쓰면서 애독자들로부터 여러 통의 격려 전화를 받았다. 도선국사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는데 신문 지면을 통하여 새로운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며 구림마을과 주변에 산재해 있는 도선국사 관련 유·무형의 역사·문화 유물과 유적들에 대해서 좀 더 체계적으로 상세하게 기술해 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특히 박이화의 내용과 편 ‘도선의 마을, 구림 – 도선국사 관련 5대 유적지 개관’ 글을 보고 구림마을을 보는 눈과 생각이 확 넓어졌다는 의견이 많았
▲청년이 꿈을 이루는 ‘청년활력도시’로 만들겠다고 했다. 구체적인 방안은? 영암군이 그리는 청년활력도시의 기초는 좋은 일자리가 넘치는 도시입니다. 청년이 좋은 일자리에서 꿈을 이루고, 가족과 함께 행복한 삶을 가꿀 수 있어야 청년활력도시는 지속가능합니다. 지난해 영암군은 군 자체 역량만으로 ‘일자리 박람회’를 열었습니다. 여기에 지역 안팎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찾아왔습니다. 이 청년들의 큰 관심과 호응 속에 일자리 박람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올해는 청년 일자리의 폭을 더욱 넓혀가겠습니다. ‘일자리 카페
▢ 소통하고 상생하는 공감의회제296회 임시회에서 군정 주요 업무계획 청취를 시작으로 제303회 정례회까지 조례안을 비롯해 일반안건, 주요사업 현장방문, 군정 질문답변, 행정사무감사, 예산안, 건의 및 결의안을 심의·의결하는 등 군민을 대표하는 대의기관으로서 적극적인 의정활동을 펼쳤다.특히, 작년에 이어 국내 쌀값이 불안정하고 재고량 증가 및 영농자재비 급상승 등 농촌 경제의 위기감이 크게 고조되는 가운데 쌀 수급 정책 전반에 대해 선제적으로 대응하고자 농협 및 농업 관련단체와 쌀값 가격안정 대책 마련을 위한 관계자 회의 개최, 양
▣ 생태관광 일번지로 도약‘대한민국 혁신수도’ ‘청년기회의 도시’ ‘마한의 심장, 달빛생태도시’로 방향을 잡은 영암군은 ‘청년활력’ ‘지역순환경제’ ‘생태문화’ ‘에너지전환’ ‘미래첨단농업’을 혁신 5대 핵심기조로 사람과 자연, 미래가 공존하는 대전환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지역 역사와 문화 선창, 주민 생활과 정주여건 개선, 탄소중립과 에너지전환, 관광과 교육 활성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일궈냈다. 첫째, 문화재청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를 유치해 ‘마한의 심장, 영암’을 널리 알렸다.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 유치는 영
목마른 말 물 마시니 조암(槽岩)이 뚜렷하다“관음사 폭포수에 동지섣달 외가 솟아빨래하는 아이 계집 자식 배기 기이하다신인이 탄생하니 승명은 도선이라지리를 통달하여 산맥을 살펴보니도갑산이 주산이요 은적산이 안산이라북두칠성 본뜬 바위 북현무를 둘러 있고고산으로 쌓은 재는 남주작이 되었도다봉황이 알 품으니 황산이 높이 나고목마른 말 물 마시니 조암(槽岩)이 뚜렷하다” 한편 조선 숙종 때 ‘관명승진’이라는 사자성어를 남긴 강직한 선비 이관명은 구림마을에 터를 잡고 살면서 조암을 답사한 후 도선국사를 추모하는 시
봉황이 알 품으니 황산이 높이 나고호남의 명승지는 낭서가 제일이라바위가 신령하니 읍 이름을 영암이라월출산 억만 장이 하늘에 솟아올라천황봉이 서남하고 주지봉이 남서하니구름기운 양양하고 산세는 빼어나다그 아래 열두 마을 명승지 되었도다마을 터는 뉘 정하고 마을 이름 뉘 일렀나관음사 폭포수에 동지섣달 외가 솟아빨래하는 아이 계집자식 배기 기이하다신인이 탄생하니 승명은 도선이라지리를 통달하여 산맥을 살펴보니도갑산이 주산이요 은적산이 안산이라북두칠성 본뜬 바위 북현무를 둘러 있고고산으로 쌓은 재는 남주작이 되었도다봉황이 알 품으니 황산이 높
도선국사 탄생지 앞에 세워진 안내판“백제의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한 왕인박사가 태어난 성기동 집터이다. 박사는 이곳에서 자라면서 꾸준히 학문을 연마하여 유가의 성현이 되었다. 집터는 북쪽 언덕을 등지고 자리 잡았는데 기단, 주추, 담장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집터 오른쪽으로 시내가 흐르고, 시내 중간에 우물로 썼던 성천이 있다. 이 물을 받아 두고 마셨다는 구유바위도 남아 있어 옛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집터 마당바위에는 ‘고최씨원 금조가장(古崔氏園 今曺家庄 옛날에는 최씨정원, 이제는 조씨정원)’이라 새겨진 명문이 있어 눈길을 끈
엊그제 필자가 만난 지석묘 연구의 권위자인 목포대 이영문 교수의 말이 가슴을 울린다. 마한 유산은 함부로 발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산이 지닌 신비감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공감이 가는 이야기이다. 지난 6일에는 이배용 국가교육위원장과 통화했다. 마한 유산은 세계유산 등재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영암, 나주, 무안, 함평 등의 마한 유산이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어 연속유산의 성격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잠정목록 작성을 서둘러야 함을 다시 강조한다. 이 위원장님의 얘기가 옳다고 하는 것이 지난 11월 8일 세미나에서 확인되었다.
둔갑된 도선국사 탄생지 최씨원문수암 터에 세워진 문산재와 미륵불상도 왕인박사 유적지로 조작 날조하더니, 600년 전 세종실록지리지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도선국사 탄생지도 왕인박사 탄생지로 조작 날조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그러려니 했으나 ‘왕인 영암 탄생설’에 대한 모든 것이 간악한 한 일본인에 의해 날조된 황당무계한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 이상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영암군은 하루빨리 조작 날조된 왕인 흔적을 철거하고 원래 구림마을에 있었던 도선국사 자리로 돌려놔야 한다. 거짓이 진실을 이길
구계 박이화(1739~1783)가 18세기 후반에 쓴 에는 구림마을에 대하여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다. 구림마을의 전 이름, 구림마을 지명 유래, 도선국사 탄생 설화, 주변 풍수, 구림마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의 이름, 마을 곳곳에 있었던 정자 이름, 열두 동네에 대한 언급 등이 그것이다. 본문을 정독하면서 위에 언급된 내용을 차례차례 따라가 보기로 한다.구림촌(鳩林村) 이전의 마을 이름은 쌍와촌(雙蛙村)박이화는 에서 구림마을의 옛 이름이 쌍와촌이었고, 돌(石)에 분명하게 새
낭호신사에 기록된 도선국사구림마을의 진면목(眞面目)을 노래한 귀한 가사(歌詞)가 있으니 바로 박이화가 지은 낭호신사다. 구림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낭호신사를 읽고 연구해야 한다. 구림마을 기행은 낭호신사의 노랫말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박이화의 낭호신사에 도선국사가 강조되고 왕인박사는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왕인은 영암 구림에 있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4세기) 왕인이 살았던 공간은 한반도가 아닌 중국의 대륙 백제였다. 백제의 본국이 대륙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륙 백제로 망명한 한나라 유방의 후손인 왕인이 천자문을 들고
마한유산 등재 학술포럼지난 8일 기찬랜드 가야금산조기념관에서 마한유산의 세계유산 등재방안을 모색하는 학술포럼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ICOMOS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세계유산 등재 심사위원 경험도 있는 신희권 서울 시립대 교수,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에 등재한 실무 경험을 지닌 임경희 문화재청 연구관, 독일에서 세계유산 공부를 하고 가야유산의 세계유산 등재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민태혜 박사, 전남의 마한유산 특징을 철저히 분석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 심준용 박사 등 우리나라 최고의 관련분야 전문가가 한자리에 모였다. 우승희 군수는
각종 사료에 기록된 백제와 북위의 전쟁 역사1. 영명 2년(484) 위로가 백제를 정벌하여 백제왕 모도(동성왕)를 크게 격파했다.永明二年, 魏虜征之, 大破百濟王牟都. 《건강실록》 2. 동성왕 10년(488)에 북위[魏]가 군사를 보내 와서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삼국사기》 -동성왕-3.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에게 패했다. 백제는 진대부터 요서, 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晉世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也.《자치통감》 권136 2 -세조 무황
조영광 전남대 역사교육과 교수의 발표문 중에서 부여와 고구려의 면적은 사방 2천 리라고 밝히면서도 삼한의 강역 사방 4천 리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마한의 인구 10여만 호는 당시 부여와 고구려를 합친 인구와 맞먹는다고 했다. 삼한의 강역 사방 4천리 역시 부여와 고구려의 면적을 합친 것과 똑같은 데 이것은 왜 뺐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사방 4천 리를 밝히면 삼한을 한반도에 표시할 수 없고, 황하와 양자강에 이르는 대륙에 삼한을 나타낼 수밖에 없기 때문은 아닌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학자의 양심으로 삼한의 면적
마한은 한반도 중남부를 차지한 연맹체 국가로, 대한민국 국호인 ‘한(韓)’의 기원이기도 하다. 마한은 대국과 소국 등 크고 작은 여러 나라로 구성되어 있었다.대국은 인구가 만가(萬家)였다고 중국 기록에 나와 있다. 이 규모는 강원도 북부, 함경도에 있는 옥저, 동예의 한 나라의 규모와 비슷하다. 마한의 힘이 아직도 수백년 인식의 산물인 백제의 일부 가운데 일부로 인식된 존재로 마한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마한이 거대한 연맹체 국가였다고 하는 것은 영산강 유역의 셀 수 없는 거대 고분과 금동(왕)
중국 역사서인 후한서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삼한과 주변 나라들의 강역을 대략 표기해 본 지도이다. 삼한은 대방 남쪽에 위치한다. 대방 남쪽에 사방 4천리 면적을 온전하게 그릴 수 있는 지역은 중원 대륙밖에 없다. 이것이 진짜 우리의 역사이다.는 동서 6백리에 불과한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사방 4천리 강역을 그려본 결과로 삼한과 왜가 모두 바다 속으로 빠지고 만다. 사방 4천리를 한반도 내에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일제 조선총독부는 삼한의 강역을 축소 왜곡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옥저
독창적인 문화 창출지난 9월 15일 나주 동신대학교 투게더홀에서 ‘2023 마한 인정도서 학술 포럼’이 마한역사문화연구회 주관으로 열렸다. 마한 인정도서 개발은 마한의 정체성을 교과서에 담아 학생들의 건전한 역사의식 함양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전라남도·전남문화재단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되어 추진되는 사업이다. 단순한 교육자료가 아닌 마한 교과서의 개발이다. 올해는 인정도서로서의 타당성 검토와 및 방향성 모색을 하는 1단계 사업이다. 이날 세미나에서 현장 교사를 포함한 전문가들의 열띤 발표와 토론이 있었다. 최근에 그날 발표된 발표집
정사(正史)에 기록된 우리 역사 최초의 나라는 ‘구리(九黎)’이고,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에 등장한다. 정사(正史)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국호가 ‘조선(朝鮮)’이다. 우리가 ‘고조선’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조선이다. 예의를 알고 오래도록 유지된 국가이다. 연나라 장수였던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하여 조선 왕 기준(箕準)의 신임을 얻어 변방을 지키다가 반란을 일으켜 기준의 조선 왕위를 빼앗았다. 이에 기준이 남하해 삼한을 일으켰다. 부여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갈라져 나왔으며, 백제 온조왕은 마한 왕으로부터 동북쪽 백리(百里)의 땅을 얻
지난 10월 6∼7일 시종면 일대에서 마한 축제가 열렸다. 이전의 마한 축제가 마한문화공원에서 주로 행해진 데 반해 쌍무덤을 중심으로 한 시종면 소재지와 마한문화공원 두 곳에서 나름의 주제를 설정하여 ‘마한의 심장, 영암’을 찾으려 하였다. 특히 이번 축제는 코로나 19와 지난해 이태원 참사로 인해 4년 만에 열리는 행사여서 더욱 의미가 있었다. 이번 축제의 주요 행사의 하나는 지난 호에서 언급한 학술대회였다. 시종면 복지회관에서 지난 10월 6일 오후 1시부터 5시 20분까지 4시간 넘게 열린 이번 세미나에 150명 넘는 청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