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18] ■ 구림마을(27)

1454년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동구림리 성기동 도선국사 탄생지, 최씨원 전경. 사진 왼쪽 바위 위에 ‘古崔氏園 今曺家庄’(고최씨원 금조가장)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위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는 사실도 잘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도선국사 탄생지 안내판도 없으며, 바위에 음각된 글씨 ‘최씨원’에 대한 상세한 내력도 생략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갑사에 세워져 있는 ‘도선국사비문’에 최씨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예로부터 영암을 유람한 선비들은 이곳을 경유하고 시문을 남기는 일이 많았다. 또 와  등 권위 있는 역사서에 태조 왕건과 관련한 도선국사의 풍수지리 이야기가 기록되어 전해짐으로써 구림마을 성기동 최씨원은 더욱 유명해진 것으로 보인다. 영암 군민이라면 성기동 최씨 처녀 빨래터(조암)와 최씨원 글씨 바위를 꼭 답사해보길 권한다. 최씨원과 조암을 제대로 확실하게 복원해야 구림마을의 정체성이 되살아날 수 있다.
1454년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동구림리 성기동 도선국사 탄생지, 최씨원 전경. 사진 왼쪽 바위 위에 ‘古崔氏園 今曺家庄’(고최씨원 금조가장)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위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는 사실도 잘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도선국사 탄생지 안내판도 없으며, 바위에 음각된 글씨 ‘최씨원’에 대한 상세한 내력도 생략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갑사에 세워져 있는 ‘도선국사비문’에 최씨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예로부터 영암을 유람한 선비들은 이곳을 경유하고 시문을 남기는 일이 많았다. 또 와 등 권위 있는 역사서에 태조 왕건과 관련한 도선국사의 풍수지리 이야기가 기록되어 전해짐으로써 구림마을 성기동 최씨원은 더욱 유명해진 것으로 보인다. 영암 군민이라면 성기동 최씨 처녀 빨래터(조암)와 최씨원 글씨 바위를 꼭 답사해보길 권한다. 최씨원과 조암을 제대로 확실하게 복원해야 구림마을의 정체성이 되살아날 수 있다.

고증을 통한 역사 재조명 필요

필자는 구림마을과 도선국사에 대한 글을 쓰면서 애독자들로부터 여러 통의 격려 전화를 받았다. 도선국사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는데 신문 지면을 통하여 새로운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며 구림마을과 주변에 산재해 있는 도선국사 관련 유·무형의 역사·문화 유물과 유적들에 대해서 좀 더 체계적으로 상세하게 기술해 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특히 박이화의 <낭호신사> 내용과 <구림마을 26>편 ‘도선의 마을, 구림 – 도선국사 관련 5대 유적지 개관’ 글을 보고 구림마을을 보는 눈과 생각이 확 넓어졌다는 의견이 많았다. 일부 독자는 사진에 도선국사 출가성지인 월출산 ‘월암사’가 빠져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영암군민 대다수가 알고 있는 도선국사는 영암이 낳은 인물이자 ‘구림(鳩林)’이라고 하는 지명을 탄생시킨 인물로 구림마을의 정체성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더욱 철저한 문헌 고증과 현장감 있는 사진을 통하여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한다. 철저한 고증을 통한 구림마을과 도선국사의 재조명 노력은 왜곡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 잡고 영암의 문화관광 활성화에도 적잖게 기여할 것이라 믿는다. 천 년의 보물 콘텐츠를 묻어 두고 있는 구림마을의 부활을 가져올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줄 것으로도 기대한다.

<남유록>의 도선 탄생지 ‘최씨원’

이하곤(1677~1724)은 조선 후기 문인으로 호가 담헌(澹軒)이다. 1708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고향인 충청도 진천에 내려가 학문과 서화에 힘썼다. 김수항의 아들 농암 김창협에게 수학하였으며 겸재 정선, 공재 윤두서 등과 친하게 지냈다. 남유록은 강진에 유배된 장인 송상기를 만나기 위해 1722년 겨울 남쪽 지방을 여행하면서 남긴 일종의 기행문집이다. 이하곤은 월출산 구정봉, 용암사, 상견성암, 도갑사, 구림마을, 모정마을, 영보마을 등을 답사하며 자신이 보고 느낀 점을 상세하게 기술해 놓아 당시 영암 곳곳의 문화유적과 풍습을 살펴보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성기동은 그(황장생) 남쪽에 있는데 세상에 전해지기를 도선이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이른바 최씨(崔氏)의 동산이 과연 이곳인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의 어머니가 큰 오이를 먹고 도선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여 대숲에 버렸더니 비둘기가 날아와 날개로 덮어주었다. 이런 까닭으로 그곳을 구림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최씨의 동산은 마땅히 구림에 있어야 할 것 같다.”<출처: 두타초 6권, 346p/이하곤/문진출판사>

<고려사>에 기록된 도선국사와 왕건

“원창왕후(元昌王后)는 아들 넷을 낳았는데 맏아들을 부르길 용건(龍建)이라 하였다가 뒤에 융(隆)으로 고쳤으며 자(字)는 문명(文明)이니 이 사람이 세조(世祖)이다.(중략)
세조(왕건의 아버지)가 송악의 옛집에서 살다가 몇 년 후 또 그 남쪽에다 새 집을 지으려 하니 곧 연경궁(延慶宮)의 봉원전(奉元殿) 터이다. 그때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조사(祖師) 도선(道詵)이 당(唐)에 들어가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얻고 돌아왔다. 백두산(白頭山)에 올랐다가 곡령(鵠嶺)에 이르러 세조가 새로 지은 집을 보고 말하기를, ‘기장[穄]을 심을 땅에다 어찌하여 마(麻)를 심었는가?’라 하고 말을 마치자 가버렸다. 부인이 (이 말을) 듣고 알리자 세조가 급히 쫓아갔는데, 만나 보니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 같았다. 드디어 함께 곡령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살펴보고 위로 천문을 바라보며 아래로 운수를 자세히 살펴보고서 말하기를, ‘이 지맥은 임방(壬方)의 백두산에서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 와서 마두명당(馬頭明堂)까지 떨어지고 있소. 그대는 또한 수명(水命)이니 마땅히 수(水)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구(區)로 만들면 천지의 대수와 맞아 떨어져 내년에는 반드시 성스러운 아들을 낳을 것이니, 마땅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지으시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봉투를 만들어 그 겉에 기록하기를, ‘백 번 절하고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임금이신 대원군자(大原君子) 족하(足下)께 삼가 글월을 바칩니다.’라고 하였다.

그때가 당 희종(僖宗) 건부(乾符) 3년(876) 4월이었다. 세조가 그의 말을 따라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 달 위숙왕후(威肅王后)가 임신하여 태조(太祖)(왕건)를 낳았다.” < 출처: 고려사 고려세계(高麗世系)/국사편찬위원회>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 도선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는 “태조의 나이 17세 때 도선(道詵)이 다시 와서 뵙기를 요청하고 말하기를, ‘족하(足下)께서는 백육(百六)의 운에 응하여 천부(天府)의 명허(名墟)에서 탄생하셨으니 3계(三季)의 창생이 그대의 홍제(弘濟)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전쟁에 나가 진을 칠 때 유리한 지형과 적합한 때를 고르는 법, 그리고 산천을 차례대로 제사 지내어 신과 통하고 도움을 받는 이치를 알려주었다.” <출처: 고려사 고려세계(高麗世系)/국사편찬위원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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