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10] ■ 구림마을(19)

각종 사료에 기록된 백제와 북위의 전쟁 역사
1. 영명 2년(484) 위로가 백제를 정벌하여 백제왕 모도(동성왕)를 크게 격파했다.
永明二年, 魏虜征之, 大破百濟王牟都. 《건강실록》
 
2. 동성왕 10년(488)에 북위[魏]가 군사를 보내 와서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3.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에게 패했다. 백제는 진대부터 요서, 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晉世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也.
《자치통감》 권136 <제기>2 -세조 무황제 상지하- 영명 6년(488) 12월조

4. 이 해(490)에 북위 오랑캐가 또다시 기병(騎兵)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가니, 동성왕이 장군 사법명(沙法名)·찬수류(賛首流)·해례곤(解禮昆)·목간나(木干那)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북위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 출처: 남제서(南齊書)  동남이열전(東南夷列傳) - 백제(百濟) >  

백제는 동성왕 때 북위와 3차례나 전쟁을 치뤘다. 북위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북조의 나라로 산서성에 위치했으므로 백제와의 전쟁은 황하를 중심으로 한  중원 대륙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1차 때(484)는 백제가 패했으나, 2차 싸움(488)에서는 백제가 이겼다. 3차 전쟁(490) 때는 북위가 기병 수십 만 대군을 파견했으나 백제가 대승을 거두었다. 동성왕은 큰 전공을 세운 장수들을 각각 광양태수, 청하태수, 성양태수, 광릉태수로 봉하고 상을 내렸다. 중국의 산서성에 있던 북위가 수만 리 떨어져 있는 바다 건너 한반도 충청도까지 말을 타고 공격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백제의 본국이 위 지도상에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다. 한반도 서남해안 지역과 일본 열도의 큐슈 지역, 나라 지역은 백제의 담로국, 즉 지방 정부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영암에 백제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다. 무위사도 신라 원효대사가 지은 절이고, 도갑사는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가 지은 절이다.
백제는 동성왕 때 북위와 3차례나 전쟁을 치뤘다. 북위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북조의 나라로 산서성에 위치했으므로 백제와의 전쟁은 황하를 중심으로 한  중원 대륙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1차 때(484)는 백제가 패했으나, 2차 싸움(488)에서는 백제가 이겼다. 3차 전쟁(490) 때는 북위가 기병 수십 만 대군을 파견했으나 백제가 대승을 거두었다. 동성왕은 큰 전공을 세운 장수들을 각각 광양태수, 청하태수, 성양태수, 광릉태수로 봉하고 상을 내렸다. 중국의 산서성에 있던 북위가 수만 리 떨어져 있는 바다 건너 한반도 충청도까지 말을 타고 공격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백제의 본국이 위 지도상에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다. 한반도 서남해안 지역과 일본 열도의 큐슈 지역, 나라 지역은 백제의 담로국, 즉 지방 정부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영암에 백제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다. 무위사도 신라 원효대사가 지은 절이고, 도갑사는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가 지은 절이다.

《남제서》 58권에 기록된 백제왕이 올린 표문
1. 모대(牟大)(동성왕)가 또 다시 표문을 올려(490년),

“신(臣)이 파견한 <행 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行建威將軍 廣陽太守 兼 長史) 고달(高達)과 <행 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行建威將軍朝鮮太守 兼 司馬> 양무(楊茂)와 <행 선위장군 겸 참군>(行宣威將軍 兼 參軍) 회매(會邁) 등 3인은 지조와 행동이 깨끗하고 밝으며, 충성과 정성이 일찍부터 드러났습니다. 지난 태시(泰始) 연간(A.D.465~471; 백제 개로왕 11~17)에는 나란히 송조(宋朝)에 사신으로 갔었고, 지금은 신의 사신의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넜으니, 그 지극한 공로를 따지면 벼슬이 올라야 마땅하므로 선례에 따라 각자 가행직(假行職)을 내렸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특별히 살피시어 정식으로 관작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고달은 변경에서의 공적이 일찍부터 뚜렷하고 공무에 부지런하였으므로 이제 <가행 용양장군 대방태수>(假行龍驤將軍 帶方太守)라 하였고, 양무는 마음과 행동이 맑고 한결같으며 공무를 항상 놓지 않았으므로 이제 <가행 건위장군 광릉태수>(假行建威將軍 廣陵太守)라 하였으며, 회매는 생각이 찬찬하고 빈틈이 없어서 근무성적이 뛰어나므로 이제 <가행 광무장군 청하태수>(假行廣武將軍 淸河太守)라 하였습니다.”

라고 하니, 이를 허락한다는 조서를 내림과 더불어 장군의 호를 내려주고 태수의 관직을 제수하였다.(중략)

 이 해에 북위 오랑캐가 또다시 기병(騎兵)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가니, 동성왕이 장군 사법명(沙法名)·찬수류(賛首流)·해례곤(解禮昆)·목간나(木干那)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북위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2. 건무 2년(495; 백제 동성왕 17)에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지난 경오년(490)에는 험윤(獫狁-북위 오랑캐)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오랑캐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기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실상 사법명 등의 꾀이오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법명을 <행 정로장군 매려왕>으로, 찬수류를 <행 안국장군 벽중왕>으로, 해례곤을 <행 위무장군 불중후(弗中侯)>로 삼고, 목간나는 과거에 군공이 있는 데다 또 성문과 선박을 때려 부수었으므로 <행 광위장군 면중후(面中侯)>로 삼았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천은을 베푸시어 특별히 관작을 제수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조칙으로 이를 모두 승인하고 군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고구려·백제가 중국의 걱정거리가 되다
고〔구〕려·백제는 전성기에 강한 군사가 100만이어서 남쪽으로 오·월을 침략하였고, 북쪽으로 유주 지역의 연·제·노를 뒤흔들어 중국의 큰 해[巨蠹]가 되었습니다. 수(隋) 황제가 통제를 잃은 것도 요동 정벌에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출처: 삼국사 권 제46 열전 제6  최치원(崔致逺)  > 

양직공도 (백제 사신) 기사 (526 ~ 536)
 백제는 래이 마한에 속하였다. (서)진 말에 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 역시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였다. 
百濟舊來夷馬韓之屬 晉末駒驪略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晉平縣. 

이 외에도 백제가 중원대륙에 있었다는 사료는 차고 넘친다. 왕인이 살았던 4세기 전후에 백제의 본국은 대륙의 산동성, 하북성이었으며 이 당시 왜(倭)는 중국 동부해안과 대만을 비롯한 섬을 의지해서 살고 있었다. 이때 일본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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