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72] 마한의 건국 시조 무강왕(武康王)(하)

지난 8일 기찬랜드 가야금산조기념관에서 마한유산의 세계유산 등재방안을 모색하는 학술포럼이 있었다.

마한유산 등재 학술포럼

지난 8일 기찬랜드 가야금산조기념관에서 마한유산의 세계유산 등재방안을 모색하는 학술포럼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ICOMOS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세계유산 등재 심사위원 경험도 있는 신희권 서울 시립대 교수,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에 등재한 실무 경험을 지닌 임경희 문화재청 연구관, 독일에서 세계유산 공부를 하고 가야유산의 세계유산 등재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민태혜 박사, 전남의 마한유산 특징을 철저히 분석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 심준용 박사 등 우리나라 최고의 관련분야 전문가가 한자리에 모였다. 우승희 군수는 다른 일정이 있음에도 환영사를 통해 마한유산의 세계유산 등재에 관한 확고한 의지를 밝혔고, 행사를 주관한 전남문화재단의 정명섭 사무처장은 개회사에서 마한유산 등재에 필요한 잠정목록 작성을 위한 준비를 서두르겠다고 하였다.

이번 세미나에서 논의된 내용은 다음 호에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이번에는 세미나에서 나온 공통된 얘기만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발표자들은 기왕에 발굴된 마한유산의 특징이 세계유산의 OUV(현저하면서도 보편적인 가치)의 어느 기준에 해당하는지를 찾아내는 작업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새로운 고분 발굴을 통한 국가사적 지정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도지정문화재 등 기존 발굴된 마한유산의 가치를 학술포럼 등을 통해 새롭게 밝혀내는 작업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러 지역이 함께 가면 금상첨화이겠으나 현실은 그러하지 않다며, 가야유산의 등재 과정을 예로 들었다. 곧 가야의 고분이 집중된 고령과 김해지역이 처음부터 동시에 가야유산 세계유산 등재에 함께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 지역이 먼저 단독으로 출발하자 다른 한 지역이 뒤늦게 손을 흔들며 참여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하였다. 이는 우리 지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혹자는 영산강 유역 마한유산이 있는 11개 시군이 함께하는 세계유산등재추진단을 구성하여야 한다고 한다. 그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현실은 억만년 기다려도 불가능하다. 포럼에서도 제기됐지만, 가장 열정이 있는 한두 지역이 추진단을 구성하여 앞장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궁평(宮坪)의 징’ 이야기

지난 호에 무강왕이 마한의 건국 시조라는 기록이 여러 사서에 나왔음을 언급했다. 그런데 무강왕의 시조 전승이 있는 익산에는 다음과 같은 민간전승이 있다. 

익산시 금마군에 ‘궁평(宮坪)의 징’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금마에서 동쪽으로 약 2km 지점에 옛날 제석면(帝石面) 이인리(利仁里)에 속했던 궁평(宮坪)이라는 마을이 있다. 도순산의 지맥이 뻗어 매봉(応鳳)이 되는데 그 아래 자리 잡은 마을로서 남쪽에 독산(独山)이라는 작은 동산이 있는데 종각(鐘閣)의 터라 전해지기도 한다. 동산 아래 꽤 넓은 들이 벌여 있는 바 옛 궁터라 하는데, 속설(俗説)로 마한 때의 내궁터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금도 그곳에서는 가끔 계단절석(階段切石)이나 기와의 파편 등이 나온다. 적토(積土)된 둥근 동산에는 큰 비대(碑台)로 보이는 자연석인 바위가 가운데가 잘리어 요철(凹凸)형으로 분리돼 있고 산에는 주춧돌로 보이는 바위가 세 개 지금도 남아 있다. 징과 관련된 전승이 있어 궁평마을이라고 불리는 이 마을에 ‘마한의 내궁터’라 불리는 작은 동산이 있다는 것이다. ‘내궁터’는 왕궁이 있었던 터를 말한다. 무강왕 건국시조 전승이 있는 익산의 궁평 마을에 마한의 왕궁터가 있었다고 전해 온다는 것이다. 사실 익산은 위만에 밀린 고조선의 준왕이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지에 따르면 준왕은 한의 땅[韓地]에 거주하며 ‘韓王’을 칭하였다고 할 뿐 국호를 馬韓으로 칭하였다는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관련 내용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삼국유사이다. “마한, 위지에 말하기를, 위만이 조선을 공격하자, 준왕은 궁인을 좌우로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한(韓)의 땅에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 하였다.(馬韓, “魏志云, 魏満撃朝鮮, 王準率宮人左右, 越海而南至韓地, 開国号馬韓.”) 「삼국유사」 찬자인 일연 스님이 「삼국지」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국호를 마한이라 명기하였는데, 이는 준왕으로부터 삼한의 기원을 체계화하였다고 하겠다. 곧 일연은 마한의 건국을 고조선 세력의 이주와 연결짓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기록인 후한서에는 “처음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파괴되고 그 나머지 군중 수천 인을 거느리고 달아나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격하여 파괴하고 자립하여 한왕이 되었다. 후에 준은 멸절되고 마한인이 다시 자립하여 辰王이 되었다.(初 朝鮮王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準後滅絶 馬韓人復自立爲辰王)”라 하여 준왕이 이미 있던 마한을 공격한 후 왕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준왕 이전에 마한이 있었던 셈이다. 

필자는 후한서의 기록이 훨씬 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한은 이미 익산, 영산강 유역, 충청 등 여러 지역에서 고유의 문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때 위만에 밀려 이동해온 준왕 세력이 이미 강고한 세력을 형성한 마한 세력을 곧장 지배하였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준왕은 마한 주변부에서 별도의 근거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만약 이러한 해석이 더 합리적이라면, 준왕과 무관한 마한의 건국 시조로 무강왕이 익산 등지에서는 인식되고 있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 하겠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무왕(武王)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라고 하여 무강왕의 실체를 아예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서동 설화는 마한 시조 무강왕 건국 설화의 원형이다. 곧 백제 무왕이 무강왕 설화를 차용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실제 무왕은 왕궁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을 정도로 익산 지역으로 천도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고, 그곳에 거대한 미륵사탑을 세웠다. 특히 최근 발굴조사 과정에서 무왕의 무덤으로 확인되고 있는 쌍릉 존재에서 알 수 있듯이, 사후에도 익산에 머무르려 하였다. 무왕이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그 자신과 마한이 관련이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마한과 백제 통합 이후 나타난 갈등을 해소하려 하였다.<계속>

글=박해현(초당대 교수·마한역사문화연구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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