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평양, 백제의 하남 위례성, 신라의 계림(경주), 가야(伽倻) 모두 중원 대륙에 있었다.

우리의 고대사는 대륙에서 시작하여 한반도와 일본 열도로 확장되었다. 
우리의 고대사는 대륙에서 시작하여 한반도와 일본 열도로 확장되었다. 

정사(正史)에 기록된 우리 역사 최초의 나라는 ‘구리(九黎)’이고,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에 등장한다. 정사(正史)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국호가 ‘조선(朝鮮)’이다. 우리가 ‘고조선’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조선이다. 예의를 알고 오래도록 유지된 국가이다. 연나라 장수였던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하여 조선 왕 기준(箕準)의 신임을 얻어 변방을 지키다가 반란을 일으켜 기준의 조선 왕위를 빼앗았다. 이에 기준이 남하해 삼한을 일으켰다. 

부여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갈라져 나왔으며, 백제 온조왕은 마한 왕으로부터 동북쪽 백리(百里)의 땅을 얻어 국가 경영을 시작하였다. 진한 역시 마한의 동쪽 땅을 분할 받아 시작했는데, 나중에 신라로 발전하였다. 마한은 백제에 의해 멸망 당한 후 일부 세력이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한편 고구려는 북쪽으로 부여를 멸망시키고, 서쪽으로는 요동지역을 차지했으며, 한반도에 있던 최씨 낙랑국도 병합하여 동북아시아의 절대 강자로 등극하였다. 백제는 나중에 요서지역 진평 2군을 차지하고 대륙뿐만 아니라 한반도 서남부 지역과 일본 열도 등에 22개 담로를 설치하여 전성기를 구가했다. 신라 역시 남쪽으로 접한 왜(倭)의 침략을 수시로 받았으며, 고구려·백제와도 화친과 전쟁을 병행하면서 성장했다. 신라는 중원 대륙의 양자강 일대까지 장악했으며, 한반도 동쪽에 동경을 두어 경영했으니 지금의 경주가 바로 동경이다. 신라 역시 일본 열도에 진출하여 분국을 건설했다. 가야(伽倻) 역시 중원 대륙에 있어 신라와 자주 싸웠다.

왜(倭)는 대륙 백제가 멸망하던 660년까지 주로 중국 양자강 이남의 동부해안 지역과 타이완섬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663년 백제 부흥군과 연합하여 나당 연합군과 싸운 ‘백강 전투’(중국 산동성)에서 패한 후 백제가 경영하고 있었던 담로국인 일본 열도로 이주하여 통일국가를 일구었다. 

지금은 일제가 우리를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기 위해 조작한 식민 반도사관에서 빨리 벗어나 본래 우리 선조들이 수천 년 넘게 살았던 중원 대륙의 역사를 올바르게 직시해야 할 때이다.>

<지도1>이 진짜 우리 역사이다.

삼한은 대방 남쪽에 위치하며, 마한과 변한은 왜(倭)와 육지로 접한다. 백제는 마한 동쪽 사방 100리에서 시작한다. 부여는 사방 2천리, 고구려는 사방 2천리, 삼한은 사방 4천리이다. 삼한의 면적은 부여와 고구려 두 나라를 합한 것과 같다. 삼한의 호수(戶數)는 총 15만 호로 고구려와 부여의 호수(戶數)를 합한 11만호 보다 더 크다. 이러한 면적을 제대로 표시하려면 기준점인 ‘대방’이 한반도가 아닌 중원 대륙에 위치해야만 가능하다. 그래야 삼한의 면적 사방 4천리와 마한·변한과 육지로 접한 왜(倭)를 지도상에 나타낼 수 있다. 이것이 <지도1>이다. 동이(東夷)의 활동 무대이고, 고대 선조들이 활동하던 원래의 강역이다. 

그런데 <지도2>는 식민사학자들이 날조한 주장으로 북한 황해도 지역에 한(漢)나라가 설치하여 다스렸다는 한사군 중 하나인 ‘대방’을 기준점으로 해서 삼한의 면적 사방 4천리와 그에 접한 왜(倭)를 그려본 것이다. <지도 2> 그림에서 보다시피 삼한과 왜(倭)는 바다 속으로 풍덩 빠지고 만다. 상식적으로도 도저히 말이 안 된다. 역사서의 내용대로 도저히 나타낼 수 없다. 그래서 간악한 일제는 삼한의 강역을 왜곡 축소하여 한반도에 억지로 꿰어맞췄다. 일제 조선사편수회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후한서에 똑같이 반복적으로 기록된 삼한의 면적 사방 4천리에서 의도적으로 4자를 빼버리고 사방 1천리도 안 되는 중남부 지역에 마한, 진한, 변한을 억지로 꿰어맞춘 것이다. 그러니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북한 평양에 낙랑군을, 황해도에 대방군을 설치해서 400년 가까지 다스렸다는 주류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은 완전히 조작, 날조된 거짓의 역사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8년이 지났지만, 역사식민지 상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이병도를 비롯한 식민사학자들의 거짓 반도사관을 추종하는 대한민국의 주류강단사학자들이 강고한 사이비 식민사학 카르텔을 기반으로 ‘역사광복’을 집요하게 방해하고 있다. 이제 시민들이 일어나 사이비 유사 식민사학을 척결하고 진짜 우리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

한(韓)<삼한>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海)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倭)와 접경(接境)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 [한(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세째는 변한(弁韓)인데,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은 삼한 중에서 서쪽에 위치하였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았으며 성곽(城郭)이 없었다. 월지국... 등 모두 50여 국이 있다. 큰 나라는 만여가(萬餘家)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가(數千家)로서 총 10여 만호(餘萬戶)이다. 진왕(辰王)은 월지국(月支國)을 통치한다. 

“韓 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校勘. 辰韓者, 古之辰國也.   
 馬韓在西. (...) 散在山海間, 無城郭. 月支國... 凡五十餘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辰王治月支國.  ”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노인들은 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秦)나라의 고역(苦役)를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馬韓)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그곳에는 성책(城柵)이 있다. (중략)

지금도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처음에는 6국이던 것이 차츰 12국으로 나뉘어졌다.

변한(弁韓)도 12국으로 되어 있다. 변한과 진한의 합계가 24국이나 된다. 대국은 4~5천가이고, 소국은 6~7백가로, 총 4~5만호(萬戶)이다.<출처: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부여국(夫餘國)
부여국은 현도(玄菟)의 북쪽 천리(千里) 쯤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挹婁)와, 서쪽은 선비(鮮卑)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 방 이천리(二千里)이며, 호수(戶數)는 8만이다.

고구려(高句驪)
고구려는 요동(遼東)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朝鮮)과 예맥(濊貊), 동쪽은 옥저(沃沮), 북쪽은 부여와 접경하여 있다. 그 나라의 넓이는 방 2천리이고, 호수(戶數)는 3만이다.
< 출처: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 동이전(東夷傳) / 후한서 동이열전>

마한왕이 동북쪽 100리의 땅을 백제에게 떼어주다
온조왕 24년(6)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온조)왕이 처음 강을 건너왔을 때 발을 디딜 만한 곳도 없었는데, 내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떼어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해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연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 의리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온조왕이 부끄러워하여 마침내 목책을 헐어버렸다.
<출처:삼국사기 권 제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溫祚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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