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12] ■ 구림마을(21)

도선국사 어머니 최씨 처녀가 빨래하다가 외를 먹고 아기를 잉태했다는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성기동 빨래터. 물이 맑고 깊으며, 바위가 꽤 넓다. 구림마을 지명 유래를 가져온 역사적인 장소이다. 예부터 도선국사 탄생 유적지로 알려진 최씨원 집터에서 동쪽으로 약 200여 m 떨어진 계곡 상류에 있다. 박이화의 에는 ‘관음사 폭포수’로 기록되어 있다. 이 계곡을 타고 주지봉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실제로 암자터가 나온다. 주변에 깨진 기왓장과 석축이 나오고 야생차나무 군락도 보인다. 구림 대동계에서 보관하고 있는 문서에 따르면 1657년 태호공 조행립이 이곳 관음사에 마을 서당을 설립했다고 한다. 성기동에 서당을 세웠기 때문에 성기서숙이라고 불렀다. 태호공 사후에 관리가 잘 안돼 1684년 월대암 아래 문수암 터로 서당을 옮겨 지었다. 그리고 문수서재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몇 차례 중창을 거친 뒤 문산재라고 이름 지었다.
도선국사 어머니 최씨 처녀가 빨래하다가 외를 먹고 아기를 잉태했다는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성기동 빨래터. 물이 맑고 깊으며, 바위가 꽤 넓다. 구림마을 지명 유래를 가져온 역사적인 장소이다. 예부터 도선국사 탄생 유적지로 알려진 최씨원 집터에서 동쪽으로 약 200여 m 떨어진 계곡 상류에 있다. 박이화의 에는 ‘관음사 폭포수’로 기록되어 있다. 이 계곡을 타고 주지봉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실제로 암자터가 나온다. 주변에 깨진 기왓장과 석축이 나오고 야생차나무 군락도 보인다. 구림 대동계에서 보관하고 있는 문서에 따르면 1657년 태호공 조행립이 이곳 관음사에 마을 서당을 설립했다고 한다. 성기동에 서당을 세웠기 때문에 성기서숙이라고 불렀다. 태호공 사후에 관리가 잘 안돼 1684년 월대암 아래 문수암 터로 서당을 옮겨 지었다. 그리고 문수서재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몇 차례 중창을 거친 뒤 문산재라고 이름 지었다.

구계 박이화(1739~1783)가 18세기 후반에 쓴 <낭호신사>에는 구림마을에 대하여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다. 구림마을의 전 이름, 구림마을 지명 유래, 도선국사 탄생 설화, 주변 풍수, 구림마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의 이름, 마을 곳곳에 있었던 정자 이름, 열두 동네에 대한 언급 등이 그것이다. <낭호신사> 본문을 정독하면서 위에 언급된 내용을 차례차례 따라가 보기로 한다.

구림촌(鳩林村) 이전의 마을 이름은 쌍와촌(雙蛙村)
박이화는 <낭호신사>에서 구림마을의 옛 이름이 쌍와촌이었고, 돌(石)에 분명하게 새겨져 있었다고 읊었다. 

“옛 이름 쌍와촌은 돌을 보니 분명하다
뒤에 이른 구림촌은 비둘기의 숲이라네
국사가 놀던 바위 몇 백년 자취인가”

‘쌍와촌(雙蛙村)’이라고 새겨진 입석이 마을 입구 어딘가에 서 있었는데 뒤에 ‘구림촌(鳩林村)’으로 바뀌면서 나중에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옛 이름 쌍와촌은 돌을 보니 분명하다’라고 읊은 것으로 보아 박이화가 살던 시대까지만 해도 쌍와촌 입석은 보존이 돼 있었음이 틀림없다.
쌍와촌에서 와(蛙)는 ‘개구리’를 뜻하는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1,200여 년 전인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 탄생 설화가 자리 잡기 이전에는 비둘기가 아닌 개구리와 관련된 이야기가 마을에 퍼져 있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개구리 한 쌍이 마을을 수호한다든가 개구리 형상을 한 바위가 한 쌍 있어서 마을을 비보하고 있다든가 하는 설화나 민담, 또는 풍수지리 이야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림(鳩林) 지명유래는 도선국사 탄생설화 
‘구림촌은 비둘기 숲’, ‘국사가 놀던 바위’라는 문구는 의심의 여지 없이 도선국사 탄생설화에서 나오는 ‘비둘기’와 ‘아기를 버린 바위’를 말하는 것이다. 박이화 이전의 구림 선비들과 구림마을을 다녀간 시인 묵객들이 지은 시문에도 도선국사 탄생설화는 반복해서 등장한다. 

“관음사 폭포수에 동지섣달 외가 솟아
빨래하는 아이 계집자식 배기 기이하다
신인이 탄생하니 승명은 도선이라”

박이화는 처녀가 빨래하던 곳에는 폭포수가 흐르고 그 위에 관음사라는 절이 있었음을 알리고 있다. 관음사는 1657년(효종 8년)에 창녕인 태호공 조행립(1580~1663)이 마을 서당을 설치했던 절이다. 해주인 최필흥이 병오년(1726년)에 쓴 강당 상량문에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다.
“우리 구림마을은 평소에 경치 좋은 물형이 있다고 칭해 왔어도 전고 때부터 홀로 글 닦는 곳이 없었으나, 옛날 우리 태호 조행립 공이 마음속으로 교훈할 뜻이 있어 간절하게 작흥하여 곡식, 재목을 모아 성기동에 처음으로 창건하고 선생을 모시고 학생들을 모아 비로소 오로지 학문을 닦는데 진력하도록 하였다.” 이 서당은 성기동에 설립했으므로 성기서숙(聖起書塾)으로 불리었다. 

구림 대동계에서 보관하고 있는 성기동 서숙 건립 및 강당 이건 관련 문서에는 ‘정유년집임서재승사상량상’이라는 문구가 첫머리에 등장한다. ‘정유년(1657)에 임사를 맡았던 분들의 명함이 승사(僧舍) 들보 속에 있었다.’라는 뜻이다. 승사(僧舍)는 절을 뜻하는데, 곧 관음사를 말한다.

최씨원(崔氏園) 이야기
동지섣달 외가 솟아 그 외를 먹으니 아이를 잉태하였고, 그 아이가 나중에 도선국사가 되었는데 보통 사람이 아니라 신인(神人)이었다고 전한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영암군 조에는 이를 이상한 일(靈異)로 기록되어 전하고 있으니 도선국사 탄생 유적지로 알려진 ‘최씨원(崔氏園)’ 이야기다. 

“속설에 전하기를, 고려 때 사람 최씨의 정원 가운데에 오이 하나가 열렸는데 길이가 한 자나 넘어온 집안사람들이 자못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최씨의 딸이 몰래 이것을 따 먹었더니 저절로 태기가 있어,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부모가 아비 없는 자식을 낳았다고 꾸짖고 대숲(竹林)에다 버려두었는데, 이레 만에 딸이 가서 보니 비둘기가 와서 날개로 아들을 덮고 있었다. 부모에게 여쭈어 가서 보이니 이상하게 여겨 아기를 데려다가 길렀다. 장성한 아기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름을 도선(道詵)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설화에 따라 그곳을 구림(鳩林)이라 불렀고, 도선은 중국에 가서 풍수지리를 전수받고 돌아와 우리나라 풍수의 비조가 되었다.”
<낭호신사>에서 보듯이 지금의 구림마을은 도선국사 탄생 이전 쌍와촌에서 도선국사 탄생 이후의 구림마을로 변천되었음을 알 수 있다.<계속>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