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13] ■ 구림마을(22)

도선국사 탄생지로 알려진 동구림리 성기동 최씨원(崔氏園) 전경 - 관음사 폭포수 아래에서 외를 먹고 도선을 잉태한 어머니 최씨가 살았다는 집터이다. 사진에 보듯이 북쪽에 큰 바위가 두 개 있는데 오른쪽 바위 위에 ‘고최씨원 금조가장’이라고 새겨진 글씨가 또렷하게 보인다. ‘옛날에는 최씨 집안의 정원이었으나 지금은 조씨 가문의 집터다’는 의미로 무슨 연유로인가 조씨 집안에서 최씨원을 매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도선국사 탄생지 「최씨원」 앞에는 ‘왕인박사 탄생지’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도선국사 탄생지로 알려진 동구림리 성기동 최씨원(崔氏園) 전경 - 관음사 폭포수 아래에서 외를 먹고 도선을 잉태한 어머니 최씨가 살았다는 집터이다. 사진에 보듯이 북쪽에 큰 바위가 두 개 있는데 오른쪽 바위 위에 ‘고최씨원 금조가장’이라고 새겨진 글씨가 또렷하게 보인다. ‘옛날에는 최씨 집안의 정원이었으나 지금은 조씨 가문의 집터다’는 의미로 무슨 연유로인가 조씨 집안에서 최씨원을 매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도선국사 탄생지 「최씨원」 앞에는 ‘왕인박사 탄생지’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둔갑된 도선국사 탄생지 최씨원

문수암 터에 세워진 문산재와 미륵불상도 왕인박사 유적지로 조작 날조하더니, 600년 전 세종실록지리지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도선국사 탄생지도 왕인박사 탄생지로 조작 날조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그러려니 했으나 ‘왕인 영암 탄생설’에 대한 모든 것이 간악한 한 일본인에 의해 날조된 황당무계한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 이상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영암군은 하루빨리 조작 날조된 왕인 흔적을 철거하고 원래 구림마을에 있었던 도선국사 자리로 돌려놔야 한다.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는 없다. 문수암터 문산재는 ‘왕인 수학처’가 아닌 구림 대동계 역사로, 황당무계한 ‘왕인석상’은 불교 유물인 미륵불상으로, 조작 날조된 ‘왕인탄생지’는 구림마을 이름을 생기게 한 도선국사 탄생지로 되돌려 놔야 한다. 그래야 영암의 문화관광이 살고 구림마을이 산다. 거듭 말하지만, 거짓과 조작은 감동을 줄 수 없으며 결국 진실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역사적 진실은 우리 영암 구림에 ‘왕인은 없었다’는 것이다. 모든 기록과 정보가 투명해지고 일반화된 디지털 문명시대에 역사 왜곡과 조작은 이제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고 솔직해져야 한다. 

도선국사 탄생설화의 기록
도선국사 탄생 설화가 최초로 기록된 국가 공식 문헌은 조선 초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다. 지금부터 600여 년 전의 일이다. <세종실록 151권, 영암군 지리지>에 도선국사 탄생 설화와 관련하여 구림리 최씨원(崔氏園)이 등장한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조선 초기의 지리서이자 한국 역사상 세 번째로 만들어진 지리지다. 세종 6년, 1424년에 세종이 변계량(卞季良)에게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편찬할 것을 명함으로써 작업이 시작되었다. 각 고을에 파견된 지방관의 등급과 인원, 연혁, 각 고을의 별호, 속현과 그 연혁, 진산과 명산대천, 고을 사방 경계까지의 거리, 호구(속현도 따로 기재)와 군정의 수, 성씨(속현도 따로 기재), 토질과 전결(田結), 토의(土宜), 토공(土貢), 약재, 토산, 누대, 역, 봉수, 산성, 제언(堤堰), 사찰 등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근대 잡지 「개벽」에 소개된 최씨원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인 개벽의 편집인이었던 차상찬은 1925년 개벽 제63호에 <전라남도답사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실었는데, 그중 10번째로 우리 영암군을 소개했다. 여기에서도 제일 먼저 도선국사 탄생지가 영암 구림마을 성기동 최씨원임을 강조하고 있다. 

“본군(영암군)에는 여러 가지 특색이 있으니 하나는 일본인의 세력이 큰 것이고, 둘은 음률전업(音律專業)이고, 셋은 청년의 사상이 어두운 것이고, 넷은 과부의 돈이 많은 것(특히 길과부[吉寡婦]는 본군의 일등 부자다)이고, 다섯은 무당이 많은 것이고, 여섯은 변호사, 대서업자, 요리옥, 이발옥(理髮屋)이 많은 것이고, 또 은어(銀魚)가 많고 위씨(魏氏) 성씨가 많은 것이니 장흥의 장처라 할지. 진소명산지(眞梳名産地) 영암군/진소(참빗) 연간 생산량이 3백만 개로 가격이 18만 원이요, 또 천하명승(天下名僧) 도선국사의 탄생지로 유명하다.

「어듸 망건(網巾) 전주 망건, 어듸 참빗 영암 참빗」이라는 동요는 경향각지에서 다 유행하는 것이다. 본군은 산수가 명미(明媚)한 고로 인물의 산출(産出)이 많으니 즉 도승(道僧)으로는 도선국사(邑西二十里聖基洞有崔氏園卽道詵母崔氏所居俗傳崔氏未嫁時冬月洴■於家後漕巖有靑苽浮來溪水崔氏取而食之因有媉生子其父母惡其無人道而生子棄之林下有鳩覆翼護之父母異而敢養是乃道詵也後人名其生林曰鳩林, 名其棄置之巖曰國師殿), 유현(儒賢)으로는 고려 최지몽(博學善卜■太祖使占夢得吉兆因賜名知夢), 연촌 최덕지(李朝文宗時), 문장(文章)으로는 고죽 최경창, 청련 이후백(自咸陽移寓), 옥봉 백광훈 등 여러 사람이 있고 근래 신진청년으로는 김준연 군(金俊淵君)을 잠깐 소개한다. 

그 외 청년운동과 사회운동은 별로 괄목한 바가 없는 것이 유감이나 소년운동이 새로 일어나는 것은 참 반가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명승고적을 또 소개하자면 월출산과 도갑사를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 즉 도갑사는 도선국사가 창건한 바로 월출산 중에 있어서 수석이 아름다운 외에 절 뒤에 도선국사의 대리석 비가 있어 고적으로 경내에 유명하다.”(하략)
<출처: 잡지명    개벽 제63호  발행일    1925년 11월 01일>

* 차상찬(車相瓚, 1887년~1946년)은 대일항쟁기 문화운동가, 수필가, 언론인이다. 천도교인으로, 강원도 춘천 출생이며, 호는 청오(靑吾)이다. <경주회고>, <남한산성>, <관동잡영> 등을 저술하였으며, 개벽의 편집인이었다.

일본인 정치승려 아오끼
차상찬이 <개벽>에 이 글을 기고한 때가 1925년 11월 1일이었다. 영산포 본원사 주지였던 일본 정치승려 아오끼가 내선일체 황국신민 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해 구림에 왕인동상 세우기 운동을 벌이던 때가 1932년이었다. 차상찬 글에는 영암을 대표하는 인물과 유적으로 오직 천하명승 도선국사, 월출산, 도갑사, 도선국사 비, 도선국사 탄생지 성기동 최씨원, 영암 참빗 등만 있을 뿐이다. 최지몽, 최덕지, 최경창, 이후백, 백광홍, 김준연 등이 시대별로 나열되어 있을 뿐 왕인의 ‘왕’자도 나오지 않는다. 이 때까지만 해도 영암 구림마을에 왕인에 대한 조작 날조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로부터 7년 후인 1932년에 일본인 정치승려 아오끼가 도선국사의 백의암 전설을 도용하여 황당무계한 왕인 도일 전설로 조작 날조하면서 비열한 역사 왜곡이 시작된 것이다. <계속>


김창오 시민기자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