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69] 해양 문명의 특성을 보여준 영암 마한

지난 10월 6일 시종면 복지회관에서 열린 ‘마한 문화권 대외교류와 해상항로’ 국제학술 세미나. 이번 세미나는 영암 마한유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마련됐다.

지난 10월 6∼7일 시종면 일대에서 마한 축제가 열렸다. 이전의 마한 축제가 마한문화공원에서 주로 행해진 데 반해 쌍무덤을 중심으로 한 시종면 소재지와 마한문화공원 두 곳에서 나름의 주제를 설정하여 ‘마한의 심장, 영암’을 찾으려 하였다. 특히 이번 축제는 코로나 19와 지난해 이태원 참사로 인해 4년 만에 열리는 행사여서 더욱 의미가 있었다. 이번 축제의 주요 행사의 하나는 지난 호에서 언급한 학술대회였다. 

시종면 복지회관에서 지난 10월 6일 오후 1시부터 5시 20분까지 4시간 넘게 열린 이번 세미나에 150명 넘는 청중이 모였다. 광주·나주에서, 그리고 국회 헌정회원 10여 명 이 서울에서 왔다. 우승희 군수는 축사에서 ‘마한의 심장, 영암’의 정체성을 토대로 영암 마한유산의 세계유산 등재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서해와 남해가 맞닿는 곳, 영암

이번에는 필자가 발표한 기조 발표의 일부를 소개한다. 영암 마한의 발전을 가져온 고대의 해상 교통로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와 있다. 황해도에 있는 고조선 멸망 후 설치된 한 군현의 하나인 대방을 출발하여 한강 입구, 전북 부안, 영암 입구의 남해만을 거쳐 해남반도, 고흥반도, 거제, 김해의 구야한국, 대마도, 오키노시마(沖ノ島)를 거쳐 큐슈의 여러 지역으로 들어갔다. 그 교통로의 중간에 있는 서남해안은 해남을 포함한 화원반도. 서해 남부의 무안반도, 남해만, 그 위로 부안, 군산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남해만은 영산강을 내륙수로로 하여 배후지가 발달했고, 평야도 발달해 고대문화 이동로이자 뱃길이었다. 통일신라 시기에 영암 구림 상대포가 당과의 중요한 교통로였고, 고려 시기에 송나라와의 교통로 역시 이 지역과 관련이 깊다.

이보다 이른 시기에 마한은 진과 여러 차례 교섭하였다. 함녕 2년(276년)부터 태희 원년(290년)에 이르는 사이에 마한이 여러 차례 중국에 조공하였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이때의 마한은 남부연맹에 속한 20여 나라를 말한다. 이들이 중국에 간 것은 목지국을 멸망시키고 남하하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외교활동이었다. 이들 마한 남부연맹 사절단이 중국을 향하여 출발한 항구가 남해만이었을 것이다. 마한 남부연맹이 원양을 항해하는 능력을 3세기 말에 지녔음을 알려 준다. 마한 남부연맹 외교 사절단은 남해만을 나와 서해 해로를 거슬러 올라와 군산반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는 항로나 바로 흑산도를 통해 중국으로 가는 항로를 선택하였을 것이다. 

조선 후기 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월출산의 남쪽에 월남촌이 있고, 서쪽에 구림촌이 있는데, 모두 신라의 명촌이다. 서해와 남해가 맞닿는 곳에 위치하여 신라에서 당으로 갈 때에 모두 영암군의 바닷가에서 떠났다”고 기술하였다. 

통일신라대에 조공선과 무역선들이 구림 상대포에 기항하였다가 사단항로를 타고 중국 항주만으로 건너갔음을 밝히고 있다. 항주만 주산군도 보타낙가산에는 신라 상인들이 관음상을 싣고서 출항하려다 암초에 걸려 출항하지 못한 신라초(新羅礁) 전설이 깃들어 있다. 보타낙가산과 월출산 남쪽 상대포는 사단항로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상대포를 품고 있는 영암만은 출항지와 기항지로서 아주 좋은 해양환경을 갖추고 있다. 

관음 신앙의 중심지, 월출산

통일신라 시대 장보고의 해상활동으로 영암-흑산도-명주를 잇는 동중국해 사단항로는 황해중부 횡단항로보다 항해 위험이 높았다. 북송초기 고려로 향하는 사신선과 무역선은 보타낙가산에서 출항하기 전에 항해 안전기도를 올렸다. 남인도에서 남해항로를 따라 남중국해에 올라온 남해관음은 보타낙가산을 경유하여 동중국해 사단항로를 따라 영암만 남해포로 들어왔다. 남해신사에는 항해 보호신이 봉안되어 있다. 남해의 항해 보호신이 관음보살이다. 중국 보타낙가산과 월출산의 기암괴석이 서로 닮았다. 월출산의 관음신앙과 보타낙가산의 관음신앙도 닮았다. 영암만 월출산 해역에 들어온 선박들은 월출산과 보타산을 동일한 관음성지로 인식하였다. 실제, 수덕사에서 이거한 고승 혜현(惠現)이 월출산에 주석하였다는 전승이 삼국유사에 있다. 혜현이 월출산에 머물렀던 것은 이곳이 관음신앙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었다. 

마한시대부터 영암만으로 선진문물이 들어왔고, 상대포는 중간 기항지, 경유지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왕인박사의 상대포 도일 전승 기록은 이것의 반영이다. 마한시대의 해양력은 영암군 일대 마한 고분이 융성하였던 동기를 부여하였으며, 신라말 고려 초에는 중국의 송상, 아라비아 상인, 이슬람 상인 등은 보타낙가산과 닮은 영암만 월출산에 기항하여 해륙교통의 기항지로 번창시켰다. 이러한 사실은 남해포의 남해신사가 말해준다. 

동아시아 해양 문명의 허브 영암만 내해 중심지에 마한의 대형 고분군이 밀집되어 있다. 이 고분의 주인공들은 영산 내해를 중심으로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며 활발한 해상활동을 전개하였다. 남해포의 남해신사는 마한고분의 해양성을 반영하고 있다. 비록, 현재 남해신사의 전승이 고려 시기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으나 마한시대에서 통일신라, 고려까지 이어지는 ‘동아시아 해상교통의 요충지’라는 사실을 후대에 전하고 있다. 

남해신사의 성격을 살피는 데 죽막동의 해신당이 참고된다. 변산반도 끝에 돌출한 격포는 그곳을 오고 가는 모든 선박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통제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부안 죽막동 유적에서 확인된 4세기 무렵 제사유적은 이곳에서 배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의식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마한왕국 가운데서 죽막동 해신당을 관장하던 왕국은 해양 성격과 더불어 종교와 관련된 특별한 위치에 있었을 법하다. 

현재 죽막동에 있는 해신당인 수성당은 격포와 위도 사이의 해난사고를 방지하고, 부안지역 어민들의 안전만을 위한 해신당의 기능을 하고 있지만, 서해 전체 혹은 서해 동안(東岸)을 하나의 연결항로로 이용하는 비슷한 성격을 지닌 여러 제사의례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죽막동 유적지가 일본 오키노시마(沖ノ島) 해양신앙 유적지와 같은 형태이며, 일본의 전형적인 제사유물과도 같다는 의견이 많다. 중국 절강성의 주산군도(舟山群島)의 보타도 등도 그러한 유적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 해양신앙의 중간지점에 있는 남해만을 주재하는 해신당인 남해신사 역시 이러한 성격을 지녔을 것이다. <계속>
글=박해현(초당대 교수·마한역사문화연구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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