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역사 바로 세우기부터-

영암은 고대 선사시대부터 중세는 물론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도 풍부한 역사와 문화가 있고, 경관이 수려한 자연유산이 있다. 영암은 고대문화가 융합하여 남도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를 입증한 것이 전통마을 구림(鳩林)이다. 사진은 월출산 아래 자리한 구림마을과 상대포 전경.
영암은 고대 선사시대부터 중세는 물론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도 풍부한 역사와 문화가 있고, 경관이 수려한 자연유산이 있다. 영암은 고대문화가 융합하여 남도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를 입증한 것이 전통마을 구림(鳩林)이다. 사진은 월출산 아래 자리한 구림마을과 상대포 전경.

1. 머리말

천년의 모진 비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지켜온 영암! 월출산과 함께 신라말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찬연(燦然)한 영암! 영암이 어떤 세운(世運)이 몰아치기에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소멸지역에 해당된다는 말인가. 현대를 살아가는 영암인은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문제를 풀어가는 데는 영암의 현실을 직시하는 혜안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풍부한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이 있다. 이것이 영암의 난제를 풀어가는 밑천이요 자본이다. 이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지혜와 안목을 가지고 개혁을 뛰어넘어 혁신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 근년에 들어 여러 부면에서 영암에 서광(曙光)이 비치고 있다. 기회의 땅 영암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안다”는 필자에게 격언을 넘어서 화두가 되었다. 필자가 공직에서 은퇴한 후 한국의 근현대사와 영암역사 연구에 몰입하기 전에는 영암은 한반도의 서남단에 위치하여 고려 때는 개성으로부터, 조선 시대에는 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별 볼일이 없는 변방에 불과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관념은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영암은 한반도의 변방이 아니라 중심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 ‘영암은 찬란한 남도 문화의 중심’이라는 말에 동감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근현대사에서 나타난 오류를 바로잡고 고대사 부분에서도 보완해야 할 부분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어 이의 시정이 요구되고 있다. 

영암은 지정학적으로 우리나라 한반도와 유사하여 우리 대한민국 영욕(榮辱)의 역사가 그대로 영암에 투영되는 듯하다. 영암은 고대 선사시대부터 중세는 물론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도 풍부한 역사와 문화가 있고, 경관이 수려한 자연유산이 있다.
그래서 외부인 중에는 ‘찬란한 남도문화 중심 영암’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영암은 어떤 이유이든 이러한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충분하게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관광강국’이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의 로마,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중국의 만리장성 등은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여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영암인들은 이 영암의 역사를 연구·개발하는 데 소홀하면서 여러 부문에서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 영암>을 만들기 위하여 <영암의 역사바로 세우기>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2. 한국사로 읽는 영암 

영암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와 유사하여 우리나라 한국의 영광과 치욕의 역사가 빈번하게 교차하는 것처럼 영암의 역사도 이에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영암은 한반도의 서남단에 위치하여 서쪽으로는 서해와 연하면서, 내륙으로는 영산강 유역에 자리하여 구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하였다. 이웃 나주 도민동 상야 유적지에 8만 년 전 구석기시대부터 고대 인류가 정착한 것처럼 영암에도 구석기시대부터 고대 인류가 정착했다고 비정(比定)할 수 있다. 이후 신석기시대를 거치면서 서호면 장천리 12기의 집단선사 주거지가 조성되었으며, 청동기에 구림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마을은 2,200여 년 전에 조성된 우리나라의 전통(傳統)마을이다. 구림의 상대포는 중국과 일본 등 국제교류가 활발하였던 국제무역항으로, 신라 때는 최치원, 김가기, 최승우 같은 인사들이 경주에서 육로로 구림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유숙하고 구림의 상대포에서 상선을 타고 당나라로 가서 유학하였다. 일본의 아스카문화를 일구어낸 왕인박사도 상대포에서 출발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가 하면, 영암의 남쪽에 있는 월출산은 고대부터 등대(燈臺) 역할을 하였고, 동북쪽으로는 군사 요충지인 국사봉이 있다. 

이러한 지정학적 특징으로 영암은 일찍부터 해양문화와 농경문화, 토속신앙이 융합하여 찬란한 남도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영암은 고대 삼한시대에는 마한 54개 국가 중 하나의 국가(불미국)의 거점이었다. 이는 2019년부터 2020년 사이에 영암군 시종면 내동리 쌍무덤에서 금동관 일부가 발굴됨으로써 이를 고증하고 있다. 

영암은 396년 마한이 백제에 복속되면서 백제에 속했고, 이후 660년 백제가 신라에 통합되면서 영암도 통일신라에 속하게 되었다. 신라 말엽 구림에서 태어난 도선국사가 도갑사를 창건(創建)하고 도참사상을 창도(唱導)하였으며, 왕건의 출생을 예언하고 수덕(水德)을 갖춘 왕으로 성장하도록 도선의 아버지 왕융에게 전수하였다.

여기에 고려 초기 영암 출신 최지몽은 60여 년간 왕들의 최측근에서 활동하면서 고려의 기틀을 굳건히 잡았다. 고려 초기 영암은 그 어느 때보다 군세(郡勢)가 확장되었고 군의 지명도 낭주(朗州)로 승격하였다. 여기에 군사편제인 안남도호부가 설치되는 등 군사적 요충지로써 영암의 중요성이 확인되었다. 이때 월출산의 명칭도 낭산이라 하였다. 이처럼 영암은 역사적 변천을 겪어오면서 신라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월출산 천황봉에서 국가가 주관하는 산신제(小祀祭)를, 고려 시대부터는 남해당에서 해신제(海神祭)를 지내왔다. 또한, 신라 말기 이래 고려시대를 거쳐 월출산을 중심으로 토속신앙과 불교문화가 융합하여 찬란한 월출산 권 불교문화를 이루었다. 월출산권 국보급 문화재를 살펴보면 도갑사와 무위사 등의 천년고찰에 해탈문(국보 50호, 도갑사)과 극락보전(국보 13호,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벽화(국보 313호, 무위사), 용암사지 마애여래좌상(국보 144호)이 있고, 학산에서 발굴된 것으로 전해지는 청동기 거푸집(국보 231호, 숭실대학박물관 소장)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묘법연화경(국보 185호, 도갑사에서 보유하던 유물) 등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중기부터 구림을 중심으로 대동사상(大同思想)이 활발하게 전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고대문화가 융합하여 영암은 찬란한 남도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를 입증한 것이 전통마을 구림(鳩林)이다. 그런가 하면, 한반도가 격동기와 수난기일 때 영암도 항상 그 격랑이 휩쓸고 갔다.

고려 현종은 1010년 거란이 2차 침입을 하자 육로를 통해 개성에서 멀리 영암 시종까지 피난을 하였다. 당시 낭주는 군사적 요충지로 안남도호부를 설치했던 곳이나, 전국의 행정개편에 따라 23년 후 이를 전주로 이전하였다.(당시 도호부는 전국 5개 지역에 설치되었는데 전라도 낭주에 안남도호부, 경상도 안동에 안동도호부, 서해는 황주에 안서도호부, 동에는 안변에 안변도호부, 북에는 안주에 안북도호부가 각각 설치되어 있었다.)

해로가 남해와 연해 있는 영암은 신라말부터 조선 중기에 해당하는 일본의 덕천막부 시대 이전까지 왜구의 노략질을 끊임없이 받았다. 그래서 고려 말부터 민간에서는 매향신앙(埋香信仰,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 철암산에 고려 충혜왕 때 조성된 보물 1309호의 암각매향명이 있음)이 번창하였다. 이때마다 영암의 선열들은 국가를 지키는데 목숨을 던졌다. 

그 사례가 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 장군은 1555년 왜구와의 영암읍성 전투에서 대승하였다. 당시 조선의 관군들이 왜구와의 전투에서 도처에서 패하였으나 영암 의병이 중심이 되어 영암성 전투에서 대승함으로써 국난을 평정하였다. 

또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의 전몽성 3형제와 박대기 3부자의 살신성인의 순국 정신은 충절의 표상이라고 할 것이다. 이처럼 영암은 한반도의 변방에 있었으나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으로 그 비중이 매우 높았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시대 정부에서는 도갑사에 도선수미비(道詵守眉碑)를 조성하였다. 이 비는 우리나라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및 이괄의 난을 겪으며 민심이 흉흉해지자 불력(佛力)으로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1637년부터 1652년까지 17년간에 걸쳐 조성한 비로 조선시대 국내에서 규모가 제일로 크다. 비문은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이 지었다. 비의 높이는 5.13m로 조선시대 거의 같은 시기인 1639년에 조성된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주변에 있는 삼전도비(3.95m)보다 무려 1.12m가 크다. 이처럼 국내에서 가장 큰 비를 영암에 세웠다는 것은 영암의 정치적, 사회적 비중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영암의 이러한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인접 지역의 적대세력까지 영산강을 따라 군사적 요충지인 월출산과 국사봉을 거쳐 지리산으로 잠입하는 과정에서 적대세력과 군경에 의해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계속> 
글=조복전 영암역사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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