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70] 교류·융합의 특성을 보여준 영암 마한

한반도와 왜의 두 지역 특성이 함께 보이는 시종 옥야리 방대형 고분. 토괴라는 구획재를 사용해 분구 평면을 구획하고 공간을 구분한 후에 성토가 이루어졌다.  
한반도와 왜의 두 지역 특성이 함께 보이는 시종 옥야리 방대형 고분. 토괴라는 구획재를 사용해 분구 평면을 구획하고 공간을 구분한 후에 성토가 이루어졌다.  

독창적인 문화 창출

지난 9월 15일 나주 동신대학교 투게더홀에서 ‘2023 마한 인정도서 학술 포럼’이 마한역사문화연구회 주관으로 열렸다. 마한 인정도서 개발은 마한의 정체성을 교과서에 담아 학생들의 건전한 역사의식 함양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전라남도·전남문화재단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되어 추진되는 사업이다. 단순한 교육자료가 아닌 마한 교과서의 개발이다. 올해는 인정도서로서의 타당성 검토와 및 방향성 모색을 하는 1단계 사업이다. 이날 세미나에서 현장 교사를 포함한 전문가들의 열띤 발표와 토론이 있었다. 최근에 그날 발표된 발표집 내용을 본 전문가도 정말 잘 된 포럼이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날 발표에 나선 순천 복성고 백형대 선생은 마한 인정도서의 지향점이 마한문화의 우월성 등을 강조하는 서술이 아니라 ‘활발한 교류, 융합 속에 독창적 문화를 창출한 개방적인 문화’라는 측면에 마한사의 가치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마한사 교육의 목표를 더욱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하여 필자의 평소 지론인 ‘교류·융합을 통한 독창적인 마한문화 형성’에 적극적으로 공감하였다. 

필자는 고유문화에 대륙과 해양문화가 교류·융합하며 형성된 독창적 문화가 영암문화의 특징임을 여러 차례 언급하였다. 10월 6일 발표한 세미나에서도 영암의 마한고분 및 출토유물을 분석해 이를 밝히려 하였다.

옥야리 고분군에서 동남쪽으로 800여 m 떨어진 남북 방향의 구릉 능선에 마을 사람들이 ‘동산’이라고 불렀던 방대형 고분이 있다. 분구 규모가 길이 30m, 너비 26.3m, 높이 3.3m의 대형 방대형 고분이 이른바 장동 1호분인데, 규모뿐만 아니라 단독으로 존재하여 일찍부터 관심을 끌었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두 차례나 발굴조사를 하여 분구 중심부에서 석실묘 1기, 분구의 사면을 따라 석곽묘 1기, 옹관묘 4기, 목관묘 1기, 매납 유구 1기를 확인하였다. 매장시설 및 주구 내부에서는 철갑편, 철부, 철도자 등의 금속류와 고배, 장경호, 유공광구소호 등의 토기류 등 186점의 중요 유물이 출토되었고, 주구 내부에서는 분구 정상부에 둘려져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독특한 형태의 원통형 토기도 다량 출토되어 고대 장송 의례를 복원할 수 있는 계기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2013년에 다시 세 번째 발굴조사를 통해 고분의 축조 양식 기법까지 확인되었다. 이 결과, 고분의 구조가 이른바 ‘영산강식 석실’의 원형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옹관 일색의 영산강 유역의 고분 형태에 석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데 장동 고분이 그 시작을 알리고 있는 셈이었다. 말하자면, 4세기 중엽에 조성된 장동 고분의 석실분이 5세기 중엽에 조성된 나주 다시면 가흥리 고분, 복암리 정촌고분을 거쳐 ‘아파트형 고분’으로 유명한 복암리 3호분 석실분으로 이어지고 있다. 

외래문화 유입의 통로 ‘남해포’

그런데 이 석실분의 원래 모습이 백제보다는 왜 및 가야 계통과 관련된 것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말하자면,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장동 고분에서 토괴(흙덩이)를 활용하여 정연하게 구획하여 고분을 축조한 지망상의 분할 성토 방식과 함께 독특한 특징을 가진 원통형 토기 등 주변과의 교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들이 다수 나왔다. 

옥야리 고분군과 불과 1km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삼포천 하류에 ‘남해포’라 불리는 유명한 포구가 있다. 이 포구는 지리적 여건상 외래문화 유입의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며, 복암리 고분을 조영한 세력들의 활동 공간인 ‘회진포’와 더불어 마한 문명을 창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98년 목포대 박물관이 ‘남해신사’ 터를 발굴했을 때 확인된 구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지금도 논밭 여기저기서 출토되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영산강과 삼포천을 사이에 두고 비옥한 충적 평야가 형성된 이곳은 가장 빨리 도작이 시작된 다시들 가흥리, 엄청난 벼 껍질 압착층이 확인되고 있는 광주 신창동 유적과 더불어 영산강 유역의 대표적인 곡창 지대였다. 옥야리 일대의 마한 대국이 거점 항구인 남해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개무역에다 배후의 풍부한 농업 생산력이 더해져 영산 지중해의 중심지가 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옥야리 방대형 고분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옥야리 방대형 고분은 이제껏 출토 유물을 통해 당시를 살피려 한 전통적인 방식과 달리 4~6세기의 한국과 일본의 고분 축조 기술을 비교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이를테면, 창녕 교동, 김해 대성동과 양동리 등 가야 지역 고분에서는 확인되나 영산강 유역에서는 나타나지 않던 분구를 축조할 때 나무 기둥을 세워 석실 벽을 축조한 양식과 역시 가야 지역에서 토괴(土塊 흙덩이)를 이용하여 방사선상 및 동심원상으로 구획한 후에 성토하는 지망(蜘網 거미줄) 형태의 분할 성토방식이 옥야리 방대형 고분에서는 확인되었다.

가야 고분 축조에서 주로 사용된 분할 성토방식은 방대형 분구의 중심을 기준으로 회색 점토를 사용해 세로 방향으로 약 10등분하고, 가로 방향으로 2~3개 정도 연결한 후 그사이를 적색 사질 점토와 회색 점토를 엇갈려 쌓은 방식을 말하는 데 옥야리 고분처럼 한 변의 길이가 30m, 높이 4m가 넘는 큰 방대형 고분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거미줄 형태의 분할 성토(分割盛土)가 필요하였다. 이처럼 토괴를 고분에 활용하는 방식은 풍부한 강수량과 잦은 태풍과 홍수 등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남부지역에서는 자연스럽게 나타났을 것이다.

주목되는 옥야리 방대형 고분

이처럼 옥야리 방대형 고분 축조에서 나타난 분구 성토방식은 기존의 영산강 유역 분구 성토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일반적으로 영산강 유역 고분의 분구 성토는 신촌리 9호분, 복암리 3호분처럼 분구 외연에 단면 삼각형의 둑을 둘러쌓고 이 내부를 메워 나가는 방식으로 서일본 공법과 유사한 제방형 성토방식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옥야리 방대형 고분은 기본적으로 토괴라는 구획재를 사용해 분구 평면을 구획하고 공간을 구분한 후에 성토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가야 지역에서 흔히 나타나는 분할 성토방식을 취하고 있다. 특히 구획한 공간에 고분 주변에 도랑(周溝 주구)을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 단단하게 결구하면서 쌓아 올리는 방식은 당시로는 획기적이고 선진화된 기술이었다. 옥야리 고분의 분구 축조 시 분할 성토 등은 가야 양식을 채용한 것 같으나 세부적 성토방식에서는 가야 지역과 다른 독자적인 특성을 띠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외래문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며 독자적인 문화로 녹여내고 있는 이 지역 문화의 특성을 알 수 있겠다. 

그런데 분할 성토할 때 방사상 모양으로 구획을 하는 축조 방식은 영산강 유역의 나주 가흥리 신흥 고분과 나주 장동리 고분, 가야 지역의 창녕 교동 고분, 신라 지역의 대구 달성 성하리 고분 등에서는 많이 보이나, 백제 지역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반면, 일본의 고분들에서는 방사상 대신에 동심원 모양으로 구획을 하여 성토를 하고 있어 한반도와 차이가 있다. 이러한 토괴 축조 시기를 보면, 영산강 유역에서는 4세기~5세기 중엽, 가야 지역에서는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일본에서는 6세기 중엽~후엽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영산강 유역에서 이러한 토괴 축조 기술이 먼저 발달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그런데 옥야리 방대형 고분에서는 방사상 구획선과 동심원상 구획선이 결합한 방식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말하자면, 옥야리 고분은 한반도와 왜의 두 지역의 특성이 함께 보인다. 이를테면, 두 요소를 접목시켜 새로운 고분 축조 문화로 만들어냈다. 옥야리 고분에서 나타난 새로운 토괴 축조 양식이 영산강 유역에서는 5세기 중엽, 가야 지역에서는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일본에서는 6세기 중엽으로 점차 확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종 쌍무덤에서 출토된 ‘하니와’와 ‘청자잔’도 주목된다. 하니와도 단순한 문화 교류를 넘어 이 지역의 개방적이고 독특한 마한의 문화 특질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근거이다. 출토 청자 잔은 중국과의 교류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이렇듯 쌍무덤 출토 유물은 고대 동아시아 해양문명의 허브 기능을 한 영암 마한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계속>
글=박해현(초당대 교수·마한역사문화연구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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