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14] ■ 구림마을(23)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동구림리 성기동 도선국사 탄생지, 최씨원 전경. 오른쪽 바위 위에 ‘고 최씨원 금조가장(古崔氏園 今曺家庄)’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동국여지승람』 영암군조에도 언전(諺傳)이라 하여 최씨원과 도선의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기록에 따르면 최씨원에 길이 한 자가 넘는 참외가 자라나 최씨의 딸이 이를 따먹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부모가 이를 대밭에 버렸으나 비둘기가 와서 날개로 덮어 보호하였다. 훗날 아이가 자라 이름을 도선이라 하고, 중국에 가서 지리법을 전수받은 뒤 돌아와 이곳을 구림(鳩林)이라 불렀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동구림리 성기동 도선국사 탄생지, 최씨원 전경. 오른쪽 바위 위에 ‘고 최씨원 금조가장(古崔氏園 今曺家庄)’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동국여지승람』 영암군조에도 언전(諺傳)이라 하여 최씨원과 도선의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기록에 따르면 최씨원에 길이 한 자가 넘는 참외가 자라나 최씨의 딸이 이를 따먹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부모가 이를 대밭에 버렸으나 비둘기가 와서 날개로 덮어 보호하였다. 훗날 아이가 자라 이름을 도선이라 하고, 중국에 가서 지리법을 전수받은 뒤 돌아와 이곳을 구림(鳩林)이라 불렀다고 한다.
성기동 도선국사 탄생지 바위 위에 새겨져 있는 글씨 -고 최씨원 금조가장 古崔氏園 今曺家庄
성기동 도선국사 탄생지 바위 위에 새겨져 있는 글씨 -고 최씨원 금조가장 古崔氏園 今曺家庄

도선국사 탄생지 앞에 세워진 안내판

“백제의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한 왕인박사가 태어난 성기동 집터이다. 박사는 이곳에서 자라면서 꾸준히 학문을 연마하여 유가의 성현이 되었다. 집터는 북쪽 언덕을 등지고 자리 잡았는데 기단, 주추, 담장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집터 오른쪽으로 시내가 흐르고, 시내 중간에 우물로 썼던 성천이 있다. 이 물을 받아 두고 마셨다는 구유바위도 남아 있어 옛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집터 마당바위에는 ‘고최씨원 금조가장(古崔氏園 今曺家庄 옛날에는 최씨정원, 이제는 조씨정원)’이라 새겨진 명문이 있어 눈길을 끈다.”
 
‘최씨원’ 명문을 소개하면서도 도선에 대한 언급도, 최씨원에 대한 설명도 없다. 대한민국 풍수지리와 선종을 대표하는 인물에 대한 예의는 아닌 것 같다. 20여 년 전부터 도선국사에 대한 안내문을 병기해줄 것을 수차례 건의했지만 말이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곳곳에 도선국사의 발자취 

600년 전 국가에서 편찬한 『세종실록지리지』와 그 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도 18세기 구림마을 선비 구계 박이화가 쓴 『낭호신사』에도, 1722년 월출산과 구림마을을 다녀가면서 기행문을 남긴 담헌 이하곤의 『남유록』에도, 1925년 영암을 답사한 언론인이자 수필가인 차상찬이 『개벽』 잡지에 기고한 기행문에도, 그리고 구림마을을 다녀간 수많은 시인묵객들에게도, 성기동 최씨원은 도선국사 탄생지로 기록하고 있다. 도갑사에 있는 도선비문에도 반복해서 나오며, 심지어 회사정기와 쌍취정기에도 도선국사 고향이 영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씨 처녀가 아기를 버렸다는 국사암, 비둘기가 날아갔다는 비죽, 당나라를 가면서 옷을 벗어 걸어두었다는 백의암, 도선국사 낙발지지로 알려진 월암사,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갑사, 도선국사 탄생지 최씨원, 최씨 처녀가 빨래했다는 빨래터 등등 곳곳에 도선국사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한적한 왕인박사 유적지

많은 문헌 기록과 유적이 남아 있는데도 영암군은 1973년부터 왕인현창사업을 시작하여 벌써 50주년이 되었다. 하지만 벚꽃 피는 봄 몇일과 어린이날이 있는 5월 한때를 제외하고 ‘왕인박사 유적지’는 늘 조용하고 한적하다.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고 일반화된 최첨단 디지털 문명 시대에 왜곡된 ‘구림 왕인 탄생설’은 감동이 없으니 관광객이 찾아올 리 만무하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왕인 영암출생설의 시작은 나주 영산포 본원사(本願寺)의 주지였던 아오키 게이쇼(靑木惠昇)로부터였다. 일본인 정치승려 아오끼 게이쇼(靑木惠昇)는 1890년대부터 일제가 추진하고 있던 ‘내선일체 황국신민’ 동화정책을 보다 널리 선전하기 위한 도구로 왕인박사를 이용했다. 1925년 개벽지에 기고한 차상찬의 글을 보면 영암의 특성으로 첫 번째가 ‘일본인의 세가 큰 것’으로 나온다. 아오끼는 이러한 점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는 1932년 백의암 도선국사 전설을 왕인박사 도일 전설로 도용하고 구림마을 성기동 최씨원도 왕인 관련 유적지로 조작하였다. 역사 왜곡이라는 영암의 비극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었다. 

변질된 일제의 불교 포교정책

한편 그가 속한 종파는 일본 불교 정토진종 대곡파였다. 정토진종 대곡파는 1877년 부산의 개항과 함께 포교를 시작한 일본 불교의 대표적인 종파로,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조선에 가장 먼저 진출했다. 1904년 군산에도 포교소를 개설했으며, 일연종이 뒤를 이었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불교를 앞세워 진출하려는 종교정책은 개항 초기부터 추진되었으며, 호국(護國)과 호법(護法)의 일치를 표방하며 포교한 대곡파는 일본 정부의 목적에 잘 부합하는 종파였다. 일본 불교는 단순한 포교 외에 친일세력의 양성 및 동화정책의 동조자로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담당했다.

일본 불교가 우리나라에 진출한 까닭은 순수한 포교가 목적이 아닌, 한국을 동화시키려는 일본 정부의 의지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 불교를 포교하고자 1911년 6월 3일 자로 사찰령을 발령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 불교는 전국에 별원, 출장소, 포교소 등을 건립했다. 아오끼가 주석한 나주 본원사도 이 중 하나였다.

이제 영암 구림마을은 일본인 정치 승려의 술책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영암 구림에는 유학자들도 존경해마지 않았던 불세출의 인물 도선과 학문과 절의를 숭상했던 훌륭한 선비들이 있지 않은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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