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16] ■ 구림마을(25)

도선국사 어머니 최씨 처녀가 빨래했던 성기동 ‘구유바위’. 박이화의 낭호신사에 나오는 조암(槽岩)이 바로 이곳이다. 조(槽)는 가축에게 먹이를 주는 그릇이나 나무통을 뜻하는 말로 ‘구유’라고 한다. 너른 바위 하단에 ‘槽岩’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성기동 ‘최씨원’과 더불어 도선국사 탄생지를 나타내는 중요한 유적이다. ‘최씨원’에서 약 100여m 떨어져 있다. 구림마을은 가는 곳마다 도선국사와 관련한 유적이 탐방객을 반긴다.
도선국사 어머니 최씨 처녀가 빨래했던 성기동 ‘구유바위’. 박이화의 낭호신사에 나오는 조암(槽岩)이 바로 이곳이다. 조(槽)는 가축에게 먹이를 주는 그릇이나 나무통을 뜻하는 말로 ‘구유’라고 한다. 너른 바위 하단에 ‘槽岩’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성기동 ‘최씨원’과 더불어 도선국사 탄생지를 나타내는 중요한 유적이다. ‘최씨원’에서 약 100여m 떨어져 있다. 구림마을은 가는 곳마다 도선국사와 관련한 유적이 탐방객을 반긴다.

목마른 말 물 마시니 조암(槽岩)이 뚜렷하다

“관음사 폭포수에 동지섣달 외가 솟아
빨래하는 아이 계집 자식 배기 기이하다
신인이 탄생하니 승명은 도선이라
지리를 통달하여 산맥을 살펴보니
도갑산이 주산이요 은적산이 안산이라
북두칠성 본뜬 바위 북현무를 둘러 있고
고산으로 쌓은 재는 남주작이 되었도다
봉황이 알 품으니 황산이 높이 나고
목마른 말 물 마시니 조암(槽岩)이 뚜렷하다”
 <박이화 「낭호신사」 중에서>

한편 조선 숙종 때 ‘관명승진’이라는 사자성어를 남긴 강직한 선비 이관명은 구림마을에 터를 잡고 살면서 조암을 답사한 후 도선국사를 추모하는 시를 한 수 지었다. 조암 곁에 도선국사 탄생설화와 관련한 안내문 하나 설치해도 좋으련만 영암군은 성기동 도선국사 탄생지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왕인과 너무 대조적이다.

조암을 유람하다〔遊槽巖〕

도선 국사는 당년에 본디 이류였는데 / 老釋當年自異流
묵은 자취 오히려 천년에 걸쳐 남았구려 / 猶將陳迹寄千秋
몇 명인가 남아가 지나온 땅에 / 幾箇男兒經過地
꽃다운 이름은 현산 언덕에 마침내 잊혔구려 / 芳名終昧峴山丘

세상에 전하기를, 도선국사가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 터가 아직도 완연하게 남아 있다/ 世傳道詵生此。而其基地尙宛然矣。
 
구림에 터를 잡고 살며 마을의 여러 벗들에게 지어 주다〔卜居鳩林贈村中諸士友〕

월출산의 형세가 서울을 닮았으니 / 月岳山形似洛中
주인의 호기 문득 부풍이어라 / 主人豪氣更扶風
은근한 마음으로 양수의 서쪽에 집을 구했으니 / 慇懃僦得瀼西宅
이제부터 뱁새도 나무 한 가지를 보존하려나 / 從此鷦鷯保一叢
<출처: 이관명 병산집, 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유영봉 황교은 (공역)> 

조선 후기 숙종 때 벼슬길에 나서 영조 때 좌의정까지 지냈던 뛰어난 학자 이관명이 어떤 연유로 구림마을에 이사를 와서 살았는지 명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영암으로 유배 왔던 문곡 김수항 집안과 사돈을 맺는 등 막역한 관계를 유지했던 사실로 유추해보면, 그런 인연으로 구림마을에 터를 잡았던 것이라 짐작이 간다. 

구림에 터를 잡고 살았던 선비, 이관명

《병산집》은 이관명(李觀命, 1661~1733)의 문집이다. 이관명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병산(屛山)이다. 갑술환국(1684) 시기에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고, 1698년 공조 좌랑이었다가 함열 군수(咸悅郡守)로 나갔으며, 그 해에 알성과(謁聖科)에 올랐다.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을 지내기도 했지만, 홍문관에 가장 오래 있었다.
이후 삼사(三司)나 성균관 장관을 맡았고, 도승지, 한성 판윤을 맡았다. 양관 대제학(兩舘大提學)으로 이조 판서를 맡았다. 그러나 신임사화로 인해 동생인  이건명이 사사되었고, 이관명은 덕천(德川)으로 유배되었다. 영조가 즉위한 뒤 좌의정(左議政)을 맡았으며 해직된 뒤에는 중추부에 있었다. 1733년(영조9)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이관명은 김수항 집안과 인연이 깊었다. 이관명의 누이가 김수항의 여섯 번째 아들인 김창립(金昌立)과 혼인하여 김수항과 이관명의 집안은 사돈 관계를 맺었다. 형 이사명은 기사환국(1689, 숙종15) 때 김수항의 뒤를 이어 사약을 받았으므로 이관명 당대까지 세교(世交)가 이어졌고, 신임사화(1721~1722) 때 이관명의 사촌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과 함께 김수항의 큰아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노론 4대 신으로 함께 희생됨으로써 비극적인 사태에서도 세속적인 인연은 계속되었다.

觀命昇進(관명승진)

공적인 일을 소신껏 추진하여 인정받고 성공함으로써 고속 승진하는 경우를 일컫는 고사성어로 병산 이관명의 일화에서 유래되었다. 그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조선 숙종 때 당하관(堂下官/정3품 벼슬) 이관명(李觀命. 1661~1733)이 수의어사(繡衣御使/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영남(嶺南)에 내려가 백성들의 실태를 살피고 돌아와 임금께 실태를 보고했다.
“통영에 있는 섬 하나가 후궁의 땅으로 되어 있사온데, 그곳 백성들에게 부과하는 공물이 너무 많아 원성이 자자하였기로 감히 아뢰옵니다."

숙종(肅宗)은 후궁(後宮)의 땅이라는 데 크게 노하였다.
"조그만 섬 하나를 후궁에게 주었기로서니 그것을 탓하여 감히 나를 비방하다니……!"
숙종이 주먹으로 앞에 놓여 있는 상을 내리치니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관명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피력했다.
"소신이 예전에 경연에 참여했을 때는 이러지 않으셨는데 소신이 외지에 나가 있던 동안에 전하의 성정(性情)이 이처럼 과격해지셨으니, 이는 전하께 올바르게 간언(諫言)하는 신하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오니 모든 신하들을 파직(罷職)시키옵소서." 
그러자 숙종은 시립(侍立)하고 있는 승지(承旨)에게 명하였다. "승지는 전교(傳敎)를 쓸 준비를 하라." 신하들은 이관명에게 큰 벌이 내려질 것으로 알고 숨을 죽였다. "전 수의어사 이관명에게 부제학(副提學/정3품의 벼슬)을 제수한다." 숙종이 다시 명했다. "승지는 나의 말을 다 썼는가?" "예!"
그러자 숙종은 이어서 "그럼 다시 부제학 이관명에게 홍문제학(弘文提學/홍문관의 종이품 벼슬)을 제수한다고 쓰라." 다시 숙종은 잇따라 명을 내렸다.
 "홍문제학 이관명에게 예조참판(禮曹參判/예조판서를 보좌하던 종이품 벼슬)을 제수한다." 숙종은 이관명의 관작을 한자리에서 세 번이나 높이어 정경(正卿)으로 삼았다. "경(卿)의 간언으로 이제 과인의 잘못을 알았소. 하여 경을 예조참판에 제수하는 것이오. 앞으로도 그런 자세로 짐의 잘못을 바로잡아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오."」
이 고사를 두고 후세사람들은 갑자기 고속 승진하는 것을 관명승진이라 했다.
그는 훗날 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구림마을은 이와 같이 뛰어난 학식과 인격을 갖춘 훌륭한 선비들이 터를 잡고 살고자 했던 명촌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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