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71] 마한의 건국 시조 무강왕(武康王)(상)

미륵사지 석탑-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터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제30대 무왕 관련 불탑이다. 
미륵사지 석탑-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터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제30대 무왕 관련 불탑이다. 

마한은 한반도 중남부를 차지한 연맹체 국가로, 대한민국 국호인 ‘한(韓)’의 기원이기도 하다. 마한은 대국과 소국 등 크고 작은 여러 나라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국은 인구가 만가(萬家)였다고 중국 기록에 나와 있다. 이 규모는 강원도 북부, 함경도에 있는 옥저, 동예의 한 나라의 규모와 비슷하다. 마한의 힘이 아직도 수백년 인식의 산물인 백제의 일부 가운데 일부로 인식된 존재로 마한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마한이 거대한 연맹체 국가였다고 하는 것은 영산강 유역의 셀 수 없는 거대 고분과 금동(왕)관, 정말 신비롭기 짝이 없는 금동 신발과 구슬들, 그리고 주변국과 활발히 교류·융합을 통해 찬란한 문화를 구축한 사실을 증명하는 많은 유물이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마한 연맹체를 형성했다면 당연히 그에 걸맞는 건국 신화 내지는 건국 시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에 주목되는 사료들이 있다. 우선 관련 사료를 살피고, 이에 대한 해석은 다음 호에 자세히 하고자 한다. 

(가) 고려사

“馬韓祖武康王陵 도굴사건과 鄭方吉”(高麗史 巻124 列伝37, 嬖幸 鄭方吉)
(원문)鄭方吉 登第 累官判典校事 転成均大司成 入密直司 忠粛見留于元 方吉与韓宗愈等 会百官旻天寺 為書請還王 又請執送誣訴本国者 後拝僉議政丞 時盗発金馬郡馬韓祖武康王陵 捕繋典法司 盗逸 方吉欲劾典法官 賛成事林仲沇沮之曰 賊繋獄二年 無現贓 死者多矣 方吉曰 吾固知発塚人多金 且云 潜用巨済田租者誰 屡罵辱之 仲沇慚恚移病 人以方吉言為是

(번역)정방길(鄭方吉)은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판전교사(判典校事)가 되었고, 성균관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옮긴 다음 밀직사(密直司)에 들어갔다. 충숙왕이 원에 머물자, (정)방길은 한종유 등과 함께 백관을 민천시(旻天寺)에 모아 글을 작성하여 왕이 돌아올 것을 요청하였고, 또한 우리나라를 무고한 자들을 잡아 압송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뒤에 첨의정승(僉議政丞)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금마군(金馬郡)에 있던 마한(馬韓)의 조상인 무강왕(武康王)의 능을 도굴한 도둑이 체포되어 전법사(典法司)에 수감되어 있다가 탈옥하였다. 정방길이 전법관을 탄핵하려고 하니, 찬성사(賛成事) 임중연이 저지하며 말하기를, “도적들이 2년이나 수감되어 있었지만 장물이 드러나지 않았고 옥사한 자도 많다.”고 하였다. 정방길이 말하기를, “무덤을 도굴한 사람들이 금(金)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진실로 알고 있소.”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거제(巨済)의 전조(田租)를 몰래 쓴 사람이 누구요?”라고 하며 여러 차례 모욕을 주자 임중연이 부끄럽고 화가 나서 병이 났다고 핑계 대고 사직하니, 사람들이 정방길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2)동사강목(東史綱目) 附巻上 上考異 武康王

(원문)武康王 麗人 避恵宗諱 多称虎康王 麗志金馬郡 有後朝鮮武康王妃陵 俗号永通大王陵 一云百済武王小名薯童 輿地勝覧益山古号金馬 永通即薯童之転 又云武康王 与善化夫人 作弥勒寺 新羅真平王 遣百工助之 按此云 武康即武王之誤也 百済武王 与真平王同時 而有善化夫人 則勝覧 未之考也 三国遺事 百済武王名薯童 妃善化夫人 新羅真平王之女云者是也 高麗史忠粛王三十六年 云盗発馬韓祖虎康王陵 又芝峰類説曰 輿地勝覧所謂武康王 即箕準也 二説亦当有拠 故従之

(번역)무강왕은 고려 사람들이 혜종(恵宗 이름은 무(武))의 휘(諱)를 피하여 많이 호강왕(虎康王)이라 일컬었는데, 《고려사》 지리지에, “금마군(金馬郡)에 후조선(後朝鮮) 무강왕비릉(武康王妃陵)이 있어 세속에서 영통대왕릉(永通大王陵)이라 부르는데, 일설에는 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薯童)이라 한다.”하고, 《여지승람》에, “익산의 옛 이름이 금마요, 영통(永通)은 곧 서동(薯童)이 변한 것이다.”하였다. 《여지승람》에 또, “무강왕이 선화 부인(善花夫人)과 더불어 미륵사(弥勒寺)를 지으니, 신라 진평왕(真平王)이 백공(百平)을 보내 도왔다.”하였다.

살피건대, 여기에 말하는 무강(武康)은 곧 무왕(武王)의 오류이다. 백제의 무왕이 진평왕과 같은 시기이고 또 선화 부인이 있었으니, 《여지승람》은 이를 상고하지 않은 것이다. 《삼국유사》에, “백제 무왕의 이름은 서동이고 비는 선화 부인으로 신라 진평왕의 딸이다.”한 것이 이것이다. 《고려사》 충숙왕 36년에 “도적이 마한조(馬韓祖) 호강왕릉(虎康王陵)을 도굴하였다.”하였고, 또 《지봉유설(芝峯類説)》에,“《여지승람》에 말한 무강왕은 곧 기준이다.”하여, 두 설 역시 근거가 있기 때문에 그를 따른다.

(3)성호사설(星湖僿説) 巻20, 経史門 虎康王

(원문)我国前代君王 自檀君箕子歴三国至高麗 各於其地立始祖之廟 三韓則辰弁不知名号 無従追祀也 惟馬韓祖 即太師之四十一世孫 開国於益山 名号都邑至今不泯 而独無祀典聖世之欠闕也 按麗史 忠粛王十六年 盗発金馬郡馬韓祖虎康王墓 此不但有其名 亦有謚矣 輿地勝覧云 世伝武康王既得人心 立国馬韓 与善花夫人幸獅子寺 又云 双陵在五金寺峯西数百歩 後朝鮮武康王及妃陵也 或云 百済武王俗号永通大王陵 其説不根 高麗恵宗名武 麗人諱武為虎 如武帝為虎帝是也 惟虎康之謚明載史O 不可誣也 駕洛之首露王 伝世最遠威霊最著 亦不可不祀也 且赫居世高朱蒙温祚 皆王者之名 不可以祝号也 昔唐太宗加比干謚忠烈 而祭之 盖亦不可称名故也 余謂 如欲祀之赫居世朱蒙温祚 各加美謚 如虎康之例 宜矣

(번역)우리나라 옛 시대 임금은 단군과 기자로부터 삼국을 거쳐 고려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 땅에 시조의 묘당을 세웠는데, 삼한에 있어서는 진한과 변한은 그 시조의 이름을 몰라서 따로 추향(追享)하지 못했었다. 오직 마한의 시조만은 바로 태사(太師)의 41대손으로서 익산에서 개국하여 명호와 도읍이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는데 사전(祀典)이 아직 없었으니 성세(聖世)의 결점이라 할 수 있다. 여사(麗史)를 살펴보니, 충숙왕 16년에 “도둑이 금마군 마한의 시조 호강왕(虎康王)의 무덤을 도굴하였다.”고 했으니, 이는 다만 그 이름 뿐만이 아니라 시호까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지승람』에도, “세상에서 전하기를, ‘무강왕(武康王)은 이미 인심을 얻어 마한에 나라를 세우고 선화부인(善花夫人)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거동하였다.’라고 한다.” 하였고, 또, “두 능이 오금사봉(五金寺峯) 서쪽 수백 보 거리에 있는데 후조선(後朝鮮) 무강왕과 왕비의 능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어떤 이는, “백제 무왕(武王)의 속호인 영통대왕(永通大王)의 능이다.”라고 하였으나, 이런 말은 근거가 없다. 고려 혜종(恵宗)의 이름은 무(武)였는데 고려 사람들이 그 무의 음을 휘하여 호(虎)라 하였으니, 이는 마치 무제(武帝)를 휘해서 호제(虎帝)라 하는 것처럼 되었다. 그러나 오직 이 호강(虎康)이란 시호만은 사책에 밝게 실렸으니 속일 수 없다. 가락(駕洛)의 수로왕은 전해 온 대수가 가장 멀고 신령의 위엄도 가장 나타났으니 또한 향사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혁거세와 고주몽과 온조는 모두 왕자(王者)의 이름이니 이들 이름은 바로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옛날 당 태종은 비간(比干)에게 충렬(忠烈)이란 시호를 더해 주고 제향하였으니, 이도 대개 그의 이름을 바로 부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도 만약 제사를 올리려고 한다면, 혁거세, 주몽, 온조에게는 각각 아름다운 시호를 호(필자, 무)강의 예처럼 더해야 마땅하다 것이다. 

무강왕이 마한의 시조라는 내용이 조선 후기 사서뿐만 아니라 고려사 기록에도 확인되고 있다. 이 기록만 보면 ‘무강왕’이라는 마한의 건국 시조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껏 마한의 시조, ‘무강왕’이라는 말은 생소한 단어가 되었다. 그것은 한국 고대사의 틀을 짰던 이병도(아직도 우리는 그의 인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가 백제는 무강왕이 없으므로 무령왕의 오기(誤記)로 보았고,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은 역시 백제 무왕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곧 일연이나 이병도 모두 무강왕이 마한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 본다. 이들의 역사 인식이 이후 우리의 무강왕 인식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은 마한을 크게 인식하지 않다 보니, ‘마한의 무강왕’이 들어설 공간이 애초에 없었다. 그러나 현재는 마한의 실체는 800년 가까이 실체가 있었다고 확인되고 있다.<계속>
글=박해현(초당대 교수·마한역사문화연구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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