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에 기록된 삼한은 고구려와 부여를 합한 것과 같아
대륙 삼한을 한반도 중남부지역으로 축소 왜곡 말아야

월출산 벚꽃 백 리 길[108]
■ 구림마을(17)

<지도 1> 중국 역사서인 후한서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삼한과 주변 나라들의 강역을 대략 표기해 본 지도이다. 삼한은 대방 남쪽에 위치한다. 대방 남쪽에 사방 4천리 면적을 온전하게 그릴 수 있는 지역은 중원 대륙밖에 없다. 이것이 진짜 우리의 역사이다.

<지도 2>는 동서 6백리에 불과한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사방 4천리 강역을 그려본 결과로 삼한과 왜가 모두 바다 속으로 빠지고 만다. 사방 4천리를 한반도 내에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일제 조선총독부는 삼한의 강역을 축소 왜곡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옥저는 동옥저(남옥저)와 북옥저가 있는데, 북옥저는 읍루와 접하고 남옥저는 예와 접한다. 예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옥저와 접하고, 남쪽으로 진한에 접하며 서쪽으로는 낙랑에 이르는 작은 나라이다. 

이전에도 언급했듯이 삼한(三韓)은 사방 4천리 면적을 가진 광대한 나라였다. 고구려(사방 2천리)와 부여(사방 2천리) 두 나라를 합해야 삼한의 면적과 같아진다. 마한의 호수가 10만 호, 진한과 변한의 호수가 4만 호~5만 호에 이른다. 부여 8만 호, 고구려 3만 호를 합해도 마한의 10만 호와 비슷하다. 이렇게 광활한 강역과 인구를 가진 마한은 삼한 중에서도 맹주였다. 백제 온조왕이 황하를 건너왔을 때 마한 왕은 동북쪽 사방 백리의 땅을 떼어줘 살게 했으며, 진(秦)나라로부터 고역(苦役)을 피해 망명해온 사람들에게 동쪽 땅을 떼어 주어 살게 했으니 그곳이 바로 진한이었다. 진한은 나중에 신라로 발전한다. 가야는 삼한·삼국과 항상 관계를 맺으며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왜(倭)는 마한과 변한에 육지로 접하였으며 양자강 이남과 대륙의 동부 해안 남쪽으로 널리 퍼져 살았다. 

대륙 한사군 낙랑군과 한반도 최씨 낙랑국은 완전히 다르다

한편, 이 시기에 한반도에는 고조선 청동기 문화를 향유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계속해서 살고 있었으며 북방으로부터 철기문명을 받아들여 새로운 생활체계를 수립해나갔다. 최씨 낙랑국이 한반도에 자리잡았으나 나중에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고구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 이야기’로 유명한 바로 그 나라이다. 최씨 낙랑국은 중국 하북성 지역에 설치했던 한나라 낙랑군과 전혀 다르다. 최씨 낙랑국을 다스린 사람은 ‘낙랑국왕’이며, 한사군 낙랑군을 다스린 사람은 ‘낙랑태수’였다. 김부식의 삼국사에도 분명하게 낙랑국왕과 낙랑태수로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이 북한지역에 있던 최씨 낙랑국을 한나라 한사군 낙랑군으로 덮어쓰기 한 바람에 우리 고대사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당시 한나라의 강역은 북경 지역에도 못 미쳤는데 일연스님이 <최씨 낙랑국>과 <한나라 한사군 낙랑군>을 구별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한사군 낙랑군이 지금의 북한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제 식민 반도사관에 이바지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다산 정약용도 일연스님의 왜곡된 주장을 받아들여 아방강역고에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조선사 왜곡과 날조에 혈안이 되어있던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일연과 다산의 잘못된 주장을 보고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원래 고구려의 평양은 중원 대륙에 있었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 

옥저(沃沮)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다에 연접하였으며, 북쪽은 읍루(挹婁)·부여(夫餘)와, 남쪽은 예맥(濊貊)과 접하여 있다. 그 지형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긴데, [면적은] 사방 천리의 절반쯤 된다.

또 북옥저(北沃沮)가 있으니 매구루(置溝婁)라고도 하는데, 남옥저(南沃沮)와는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 풍속은 모두 남옥저(南沃沮)와 같으며, 읍루(挹婁)의 남쪽 경계와 접해 있다

읍루(挹婁)

읍루는 옛 숙신(肅愼)의 [지역에 있는] 나라이다.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천여리 밖에 있는데, 동쪽은 큰 바다에 닿고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지역은 산이 많고 험준하다. 사람들의 생김새는 부여 사람들과 흡사하지만 언어는 서로 다르다.

예(濊)

예는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와, 남쪽으로는 진한(辰韓)과 접해 있고, 동쪽은 大海에 닿으며, 서쪽은 낙랑(樂浪)에 이른다.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옛] 조선(朝鮮)의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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