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민간인 집단학살 사례2005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가 엮고, 한울아카데미가 발간한 에 게재된 6.25 사변 후 영암의 민간인 집단 학살 몇 사례를 전재한다. 영암 금정 덤재 보도연맹 학살1950년 7월 20일 국군과 경찰에 의하여 보도연맹원 등 200-300명이 영암군 금정면 덤재 골짜기(송장고개)에서 피살되었다.사건내용을 보면 영암 보도연맹 원들은 1950년 7월 중순 예비 금속되어 군경이 장흥 쪽으로 후퇴하던 7월 20일 경 영암과 장흥의 경계인 덤재 골짜기에서 학살되었다. 한 구덩이에 5-6명씩이 있었으며, 구덩이가 40-50개 정도 됐다고 한다. 200-300명이 피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시민의 소리재
영암 피살자 7.175명 명단 입수6.25사변이 일어 난지 62년이 되었다. 당시 어린소년들이 노년에 들어 선지 오래되었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는데도 영암군단위의 6.25에 대한 진상규명도 없이 유족은 물론 군민들도 가슴에 그 아픔을 안고 살아왔다. 이제나마 당시의 왜곡된 사상과 이념, 사소한 갈등과 원한으로 촉발된 참상의 일부만이라도 규명함으로써 희생된 모든 이들의 원혼을 달래고, 현재를 살아가는 자들 간에는 서로가 화해와 용서로 가슴에 매친 응어리를 풀어가자는 뜻에서 이 글을 다룬다.아내와 자식들 앞에서 남편과 아버지가 학살되고, 형제자매가 학살되었으며, 오순도순 살아가던 이웃이 학살되었다. 열 살도 못된 수많은 어린애들이 처참하게 죽어갔다. 이웃끼리도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좌익이 우익을,
낮최고기온이 30도를 훌쩍넘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들녘의 농민들의 표정엔 가뭄으로 근심이 가득해 보인다. 한낮의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지난 25일 길을 나선 가운데 찾아간 곳은 금정면 용흥리 세흥마을.금정면소재지 방면에서 아크로C.C. 골프장 방면으로 3㎞가량 달리다보면 우측에 돌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표지석에 세흥이라고 쓰여진 표지판이 보인다.표지석에서부터 500m가량을 차량으로 이동하자 커다란 느티나무 한그루와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정자와 오래돼 보이는 정자 2개가 나타났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느티나무는 200여년정도 된 느티나무로 군에서 관리하는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고 한다. 세흥마을이
구제역 파동, 한미FTA 통과 등 많은 악재속에서도 군과 축협이 하나로 뭉쳐 집중투자를 통해 축산업을 살려낸 곳이 있다. 바로 그곳은 함평천지한우로 유명한 함평이다. 함평천지한우는 한 조사기관의 조사에서 축산브랜드중 소비자인지도 부문에서 전국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있는 축산브랜드 중 하나이다. 함평천지라는 브랜드명은 판소리중 하나인 호남가의 가사에서 유래가 됐다. 판소리 호남가는 ‘함평천지 늙은 몸이~’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함평은 위 노랫말처럼 농경지가 많아 평온하고 풍요로운 전형적인 농업군이었다. 그러나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부터 젊은이들이 도시로 도시로 떠나게 되었고 농촌은
조선시대 과거급제자 140여명 달해문(文)씨는 '조선씨족통보'와 '증보문헌비고' 등의 문헌에 156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2000년 인구주택 총조사에서는 45개 본관이 현존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하지만 정선문씨(본래 全씨)와 감천문씨 중 일부(본래 金씨)를 제외한 본관들은 모두 남평문씨에서 분적된 것으로 보아 문(文)씨는 남평문씨 단일본으로 통칭되기도 한다. 남평문씨 시조는 신라 때 인물 무성공 문다성(多省)으로, 여러 고위 벼슬을 거쳐 삼중대광 벽상공신으로 남평백에 봉해졌기에 후손들이 남평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시조의 아들 문탁(倬) 이후의 세계(世系)가 불분명하여 고려중기에 우산기상시, 좌복야 등을 지낸 경절공 문익(翼)을 중시조(1세)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남평문씨는 고려 때 많
한우산업이 벼랑 끝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지난해 최악의 구제역 파동으로 소 값이 폭락하고 사료비마저 크게 올라 심각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는 한우 농가들은 이제 한미FTA 통과라는 거센 파고를 맞이해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이에 한우농가들은 보다 질좋은 고급한우브랜드를 육성해 어려움을 극복해나가고 있다.관내에는 영암의 자체브랜드인 매력한우와 전남도 광역브랜드인 녹색한우가 서로 경쟁관계를 형성하면서 고급육 생산으로 지역주민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갈수록 악화되어가는 축산환경 속에 통합을 통해 보다 집중적인 투자를 통해 전국적인 브랜드로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역 내에서도 커지면서 두차례 통합을 위한
전몽성, 몽진 형제는 임진왜란 때 의병들과 함께 큰 공 세워도시조는 전섭, 천안全씨 시조는 전낙全(전)씨 도시조(都始祖)는 전섭(全聶)인데, 그는 온조가 백제를 건국할 때 10공신(十濟功臣) 중의 한 사람으로 환성군(歡城은 천안)에 봉해졌다. 그 후 全씨는 한국인 문헌에 178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감천 경주 기장 나주 성산 성주 옥산 옥천 완산 용궁 정선 천안 죽산 팔궁 평강 함창 황간 전씨 17본을 제외한 나머지는 미고이다. 모든 전씨는 백제 개국공신 전섭을 도시조로 하고 있다. 전씨시조 단소는 충남 천원군 풍세면 삼태리 태학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매년 양력 10월3일 시향을 모시며 단소 및 제설은 충남지방문화재 제297호로 지정(1987. 12. 30)관리해 오고 있다.全씨의 연원에 대하
■ 송나라에서 귀화한 신수가 시조거창신(愼)씨의 시조는 고려 문종 때 송나라에서 귀화한 신수(愼脩)로서 거창신씨는 중국에 연원을 두고 있는 성씨들 가운데 하나이다. 시조 脩(수)는 학식이 풍부하고 의술에 능했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수사공,우복야,참지정사 등를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안지(安之)가 지수주사(知水州事. 경기도 수원의 관리)가 되었기에 수원신씨라고 한 적도 있었으나, 후손 군기감사 성(成)이 아버지를 여읜 후 경남 거창에 내려가 살면서 거창신씨의 시원이 되었다. 인구조사에서 愼씨는 인구 수백 명의 본관들도 나타나나 '거창' 단일 본이라는 것이 통설이다.거창신씨는 인구수에 비해 인물이 많다. 안지는 병부상서,삼사사,판합문사 등을 지냈는데, 한어에도 능통하여 송나라와 요나라에 보내는 공문
■ 신라 진평왕의 사위 조계룡이 시조 창녕조씨(昌寧曺氏) 시조 조계룡(曺繼龍)은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사위로 전해 오는데, 그의 어머니는 한림학사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禮香)이며, 그의 출생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예향은 창녕현 고암촌 태생으로 그녀가 우연히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龍池)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 날 밤 꿈속에 장부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玉?)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卿相))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가 번영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 아들을 낳으니 겨드랑이 밑에 曺(조)자가 뚜렷하게 씌어져 있었다. 이것을 본 이학사가 왕에게 고하니 왕이 신기하게
남도의 도자기는 영암구림도기를 먼저 이야기한다. 구림도기에 앞서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기에 도기의 발생이 가능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생산된 것이 옹관이다. 입이 넓은 큰 항아리에 시신을 넣어 매장하는 옹관묘 장례풍습은 신석기 시대부터 서해안 일대에서 상당히 많은 양이 분포했다. 이런 옹관은 3세기~5세기 중반까지는 영산강 유역에서 크게 성행했다. 옹관문화가 알려진 것은 지난 1960년 시종면 내동리 고분에서 대형 옹관이 발굴되면서 나타났다. 삼호읍 용암리에서 출토된 U자형 옹관은 2개가 1조를 이루는 함구식 옹관으로 마한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런 옹관을 통해 도기의 기술이 발달했고 영암 구림도기에서 꽃을 피우게 됐다. 구림도기가마터는 8~9세기 대규모 도기 제작
여수의 도요지는 소라면과 율촌면을 중심으로 분포한다. 분청사기 가마터는 소라면 사곡리와 분계동에 분포한다. 백자 가마터는 율촌면 가장리 가장저수지 인근 지역 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현재 여수에서 추정되는 가마터는 분청사기 가마터 4개소, 백자 가마터 6개소 총 10개소가 알려졌다. 여수지역은 신석기시대의 토기를 비롯해 적지 않은 도자역사를 자랑한다. 신석기 시대 토기로는 당시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나뭇잎 토기들이 발견돼 상당한 실력을 갖춘 전문 도공들이 생활했을 가능성이 크다. 청동기 시대의 많은 고인돌을 비롯해 삼국시대에는 백제 토기를 비롯해 소가야, 대가야의 토기도 같이 발견되고 있다. 여수시 화장동 선사유적공원 내에 통일신라시대의 기와 가마터가 자리 잡고 있다. 통일신라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 영암군민의 의식성장이 동력이었다영암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난 것은 일본인들이 다른 지역에서 보다 영암에서 높은 비율의 농지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높은 소작율과 빈번한 소작권이동으로 군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군민들의 생활은 아사지경이었다. 여기에 3.1운동이후 청년회활동, 신간회활동, 소작인회 활동, 영암공산주의협의회 활동 등으로 영암군민들의 반일사상이 고조되고, 반봉건적 啓蒙意識이 꾸준히 성장하였던 결과라 할 수 있다. ■ 청년회의 활동영암군민들의 의식성장을 주도한 계층은 영암청년회라 할 수 있다. 영암청년회가 공식적으로는 언제 발족하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3.1운동의 경우를 보더라도 영암읍에서는 조극환을, 구림에서는 박규상을 중심으로 많은 보통학교학생들이 참여하였다
■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정책은 조선민족 말살과 경제수탈을 목표로 하였고, 경제수탈을 목표로 하는 정책은 그 중점이 농업정책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농업정책을 실행해 나가는 주역은 조선총독부의 권력과 함께 조선농업을 변질시킨 일본자본이었다.한일강제병합 전부터 진출한 일본자본은 낮은 지가와 고율의 소작료, 그리고 개발의 잠재성을 노리고 진출한 “약탈적인 고리대 상업적인 중소 개인자본” 이었다. 일본인 久間健一 (1933년 총독부소작관역임)은 조선재래의 농촌사회가 왜래적인 권력과 자본에 의해 개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농민에게 축복이 아니라 불행이라 보았다.(구간건일, 조선농업의 근대적 양상, 2P, 조선 농업정책의 과제, 71P) 농업정책의 측면에서 일제 식민통
영암구림도기의 시작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보다 앞서 생산된 것이 옹관이다. 영암의 곳곳에서도 옹관이 발견되고 있다. 당시 입이 넓은 큰 항아리에 시신을 넣어 매장하는 옹관묘 장례풍습은 신석기 시대부터 서해안일대에서 상당히 많은 양이 분포했다. 특히 3세기~5세기 중반까지는 영산강 유역에서 크게 성행했다. 옹관문화가 알려진 것은 지난 1960년 시종면 내동리 고분에서 대형 옹관이 발굴되면서 나타났다. 크기가 대형화 되고 집단화를 이루면서 대량생산된 것을 추축하게 만든다. 이런 옹관의 흔적은 영암도기박물관에도 남아있다. 삼호읍 용암리에서 출토된 U자형 옹관은 2개가 1조를 이루는 함구식 옹관으로 마한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런 옹관으로 볼 때 옹관을 통해 당시의 토기의 기술을 알수 있
"일인은 우리의 논과 밭을 내놓아라" "사음(舍音, 마름)의 횡포를 지양하라""일인은 이 땅에서 물러나라"1932년 6월 4일(음력 5월 1일). 일제 치하에서 영암청년 70여명이 덕진면 영보리 형제봉에 모여서 노동절기념식을 갖고 있었다. 이날, 일본인 등의 농민수탈에 항거하는 시위 중에 거센 함성이 형제봉을 메아리쳤다. 기념식에서 최판옥과 김판권이 당시의 일반 정세를 강연하고, 지주들의 횡포에 대항할 것을 결의했다. 이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적기를 선두로 노동가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행렬은 소작권을 새로 받은 소작인의 집에 이르러 소작권 이동의 부당성을 성토하기도 했다.이날 영암농민 투쟁사건은 전남운동협의회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등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 일제는 영
우리 영암군에는 성씨가 몇 개나 될까. 1998년 편찬된 영암군지 자료에 따르면 영암군에는 91개 성씨가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성씨는 91개 였지만 본의 수는 278개에 달했다. 지난 14년 동안 인구이동이 많았기 때문에 성씨의 숫자는 줄어들거나 늘어나거나를 반복해 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우리나라에는 약 258개 성씨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영암에서 우리나라 전체 성씨의 약 30% 정도가 살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258개의 성씨는 중국의 10분의 1수준이다. 일본에는 10만여개의 성씨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암의 성씨중에 본이 가장 많은 곳은 김씨였다. 영암에 살고 있는 김씨의 본은 31개였다. 김씨에 가장 많은 가구를 가지고 있는 성은 김해김씨로 1천636가구가 거주
1967년 9월 16일 경희대학교 박물관팀은 시종면 내동리 초분골 뒷산에서 고분을 발굴하고 있었다. 채병서 교수와 10여명의 경희대 사학과 학생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왠만한 고분은 도굴이 심해서 이들이 발굴중이던 7호 고분도 여기저기가 상처투성이었다. 한참 발굴이 진행중이던 조사자의 삽 끝에서 눈에 익은 토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옹관(甕棺)이었다. 옹관은 토기로 만든 관(棺)을 말한다. 옹관은 이미 우리나라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된 터여서 당시에도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십기가 전시될 정도였다.그러나 옹관 주변을 조심스럽게 파내려 가던 연구원들은 끝이 보이지 않은 옹관의 규모에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까지 발견된 옹관의 규모는 커 봐야 길이가 1m 정도가 전부였다. 중앙박물관에 전시
이번에 고대 일본식 무덤인 전방후원분에서 50여개의 하니와란 일본식 토기가 나온 시종면 태간리 자라봉고분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시종면 옥야리 산 159-2번지에는 장동방대형고분이라 이름 붙여진 큰 무덤이 있다. 방대형고분이란 아랫부분을 정사각형에 가깝게 모양을 잡아 위쪽으로 쌓아가는 기법의 고분을 말한다.2010년 10월 문화재청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한 결과 이곳에서도 분구와 고분 주위를 두르는 도랑에서 하니와(고분 내외부에 열 지어 세워놓는 의식용 토기)로 불리는 원통형 토기가 다량 출토됐다. 학자들은 장동방대형고분의 조성연대를 6세기로 보고 있다. 6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는 태간리 자라봉고분과 조성연대가 비슷한 것이다. 이는 시종면 일대가 6세기를 전후해서 어떤 형태로든
시종면 태간리 자라봉고분 형태인 전방후원분은 서기 3세기 중엽~6세기 후반에 걸친 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에 조성된 독특한 형태의 무덤이다. 장고처럼 생겼다고 해서 장고분이라고 불렀으며 일본 용어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이 무덤은 1983년까지 오직 일본에만 있는 무덤으로 통용됐다. 우리나라에서 이 무덤이 발견된다는 것은 일본이 한반도 지배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당시 역사학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우리학계에서 전방후원분이 처음 보고된 것은 1972년이었다. 모 일간지에 당시 고려대 박물관 주임으로 근무하고 있던 윤세영이 ‘한국속의 전방후원분’이란 제목으로 기고문을 실었다. 당시 주장으로 고고학계는 벌집을 쑤셔 놓은듯 아수라장이 되었다. 긴급히 문화재위원회까지 열렸다. 서기 3세
23일 2차 발굴조사 결과가 나온 시종면 태간리 자라봉고분은 지난 91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굴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었다. 그러나 자라봉고분은 20여년 동안 땅속에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그 이유중의 하나는 전방후원분이 전형적인 왜식(倭式) 고분양식이기 때문이었다. 또 이곳에서 왜식 토기가 출토돼 이 무덤이 일본이 주장하는 임라일본부설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학계의 우려가 컸다.80년대 초반부터 영산강 주변에서 10기 이상이 발견되고 있는 전방후원분은 4세기 후반부터 6세기후반까지 일본이 영산강 일대를 지배한 증거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후 우리나라와 일본학자들은 전방후원분이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