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남평출신 문다성...명재상 문극겸, 목화씨의 문익점의 가문

조선시대 과거급제자 140여명 달해

문(文)씨는 '조선씨족통보'와 '증보문헌비고' 등의 문헌에 156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2000년 인구주택 총조사에서는 45개 본관이 현존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하지만 정선문씨(본래 全씨)와 감천문씨 중 일부(본래 金씨)를 제외한 본관들은 모두 남평문씨에서 분적된 것으로 보아 문(文)씨는 남평문씨 단일본으로 통칭되기도 한다.

남평문씨 시조는 신라 때 인물 무성공 문다성(多省)으로, 여러 고위 벼슬을 거쳐 삼중대광 벽상공신으로 남평백에 봉해졌기에 후손들이 남평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시조의 아들 문탁(倬) 이후의 세계(世系)가 불분명하여 고려중기에 우산기상시, 좌복야 등을 지낸 경절공 문익(翼)을 중시조(1세)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남평문씨는 고려 때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충숙공 문극겸(克謙)이다. KBS연속극 '무인시대'에도 나왔던 문극겸(克謙)은 무인정권 시절 문신들을 화에서 구하고 무신들의 고사의 자문에 응했으며, 용호대장군·상장군을 겸임하여 문인으로서 문무 겸직의 시초가 되었다. 벼슬은 권판상서이부사등 아상(亞相)에 이르렀으며 문무를 겸비한 현상(賢相)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리고 충의공 문공인(公仁)은 판상서병부사감수국사, 정경공 문공원(公元)은 문하시랑평장사, 경정공 문공유(公裕)는 지문하성사, 특히 문공유는 당대의 명필로 그가 쓴 묘향산 보현사 창사 비문이 남아 있다. 합문지후파(강성군파) 파조인 충렬공 문후식(侯軾)은 동북면지병마사, 순평군파 파조인 효혜공 문유필(惟弼)은 참지정사 판예부사, 충익공 문달한(達漢)은 찬성사를 지내는 등 재신(宰臣) 반열에 오른 인물이 많아 남평문씨는 고려중기 갑족 중의 한 가문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 시기의 남평문씨 인물들은 나주 남평 출신들이다.

남평문씨는 조선시대에는 약간 쇠침하였으나 그래도 사마시 포함 140여 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는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중추원판사 호간공 문효종(孝宗), 불사이군의 충절과 더불어 목화씨로 유명한 충선공 문익점(益漸),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데 기여한 공으로 익대좌명공신이 되고 후에 풍해도첨절제사에 오른 문빈(彬), 물레를 발명한 문래(萊), 임진왜란 때 의병장 문위세(緯世) 등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다.
 

 

영암 입향조는 숙의문씨의 사촌동생

조선시대 후궁 중에는 문씨가 3명 있는데 모두 숙의까지 승차하였다. 그 중에서 정종의 후궁 숙의문씨와 영조의 후궁 숙의문씨는 본관 등 가계에 대하여 전해지지 않는다. 문종 후궁 숙의문씨는 남평문씨로, 순평군파 영암 입향조 직장공 문맹화(孟和)의 사촌누나이다. 즉, 숙의문씨의 부친 첨지사 문민(文敏)과 직장공의 부친 나주목사 문서(文叙)가 형제인 것이다. 5년 전 본 필자가 인천 서구 심곡동에 있는 숙의문씨 묘소를 방문했을 때 안내현판 등에 "문민지의 딸"로 되어 있어서 인천시청 등에 연락하여 숙의문씨의 부친은 "문민(文敏)"이라고 바로 잡아준 바 있다.

묘에서 출토된 묘지명에는 '인후(仁厚).. 공검(恭儉)..' 등의 인물평이 있고, '증조부 문달한, 조부 문효종..'이라는 내용과 함께 "..父敏之拜僉知.."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 만으로는 명확치 않아 번역에 오류가 있었던 것이다. 즉, 之(지)자는 이름의 끝 글자가 아니라 별 의미없는 어조사였던 것이다. 세종실록에는 문민에 대한 기록이 세 번 나오는데 두 번은 숙의문씨 관련 내용이고, 나머지 한 군데는 문효종의 졸기(卒記)인데, 문효종의 아들은 "문민, 문치, 문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남평문씨 집성촌(세거지)으로는 영암읍 장암리(순평군파)가 대표적이며, 시종면 일원에는 합문지후파 후손들이 살고 있다. 그외 전남도내 남평 서산리, 여수 이천리, 영광 진덕리, 광양 원월리 등 전국에 산재해 있으며, 유명한 세거지로 대구 화원읍 본리가 있다.

그리고 지금은 거의 사라져 가지만 서울에도 몇몇 성씨의 세거지가 있는데, 송파구 문정동과 강동구 강일동 가래마을이 있다. 가래마을에 문씨가 세거하게 된 것은 250여 년 전으로 보이며, 현재도 30가구 중 6가구가 문씨이다.

남평문씨 분파는 크게 합문지후파(강성군파)와 순평군파로 구분되나, 남평문씨 대종회(회관: 서울 군자동)에서는 문익점의 다섯 아들을 파조로 하는 분파 등 10개 파로 대별하고 있다. 그중에서 문익점의 둘째 아들 문중성(中誠)이 파조인 순질공파의 인구가 가장 많아 남평문씨의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그리고 남평문씨 항렬자는 합문지후파,순평군파,직장공파가 다르나 모두 오행상생법을 채택하고 있다.

남평문씨 인구는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38만530명으로 나타나 전국민의 0.83%를 차지했으며, 전체 문씨의 89.1%를 차지했다. 영암의 남평문씨는 1천193명으로 영암인구의 2%를 차지했다. 남평문씨의 거주지역별 특징으로는 서울,인천,경기 등 중부지방에 적게 살고 있는 편이며, 호남,영남,충남 등 남부지방에 많이 살고 있는 편이다.
 

 

유학자, 효자, 지사, 청백리 많아

영암지역 입향조(순평군파)는,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패륜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영암에 내려와 정착한 직장공 문맹화 선생으로, 그는 연촌 최덕지의 외손서(外孫胥)이다. 이후 남평문씨는 영암의 유력성씨로 자리잡게 되며, 남평문씨 영암 인물로는 유학자, 효자, 지사, 청백리 등이 많다. 영암 향안(鄕安. 지방 사족(士族) 명단)에 입록된 인물만도 총 151명 가운데 21명을 차지할 정도이다.

영암 인물로, 백련(白蓮) 문익주(益周)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효자와 청렴한 목민관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효행이 뛰어남에 참봉 벼슬이 내려졌으며, 후에 세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올 때 관청에서 사용하던 말을 이용하지 않자 고을사람들이 모두 숙연히 여겼으며, 송덕비를 세워 그 청백성을 기렸다.

부모의 상을 당함에 움막을 지어 시묘를 하면서 효성을 다하니, 집뜰 연못에 피어있던 붉은 연꽃(홍련)이 흰빛(백련)으로 변하였다. 두 사람의 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조판서를 지낸 청련(靑蓮) 이후백과 교의가 깊었으며, 당대의 사론을 이끌던 조헌·유희춘·백광훈·정철 등과도 교의가 깊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김천일·고경명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임진왜란 직후 영암지방의 향안을 중수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애송당(愛松堂) 문익현(益顯)선생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지사(志士)이다. 관상감 훈도를 지냈으며 장암리 입향조이기도 하다. 1591년 진사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형 익신(益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고 명나라 수군대장 진린(陳璘)의 향도관(嚮導官)이 되어 공을 세웠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정유재란 때에도 의병을 일으켜 전라병사 이복남 등과 합세하여 영암 추월교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으며, 전북 율치(밤재)대첩과 남원 등지의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조정에서 이조정랑에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풍애(楓崖) 문팽담(彭聃)선생은 성리학에 밝았으며, 사온직장을 거쳐 정릉참봉을 지냈다. 율곡 이이가 낙향하게 되자 그도 따라서 사직하였으며, 이후 조용히 은거하자 한석봉이 그곳을 효제동(孝悌洞, 영보)이라 써 주었으며, 당대의 시서(詩,書) 명인 옥봉 백광훈은 안선당(安善堂)이라 지어 주었다.

문후소(後素)는 의병활동 및 영암향교 이건 주도, 직은 주부이며, 문사고(師古)는 효자이며 예서(禮書) 저술, 문천두(天斗)는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두루 밝았으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독서당을 지어 일생을 독서, 문약연(躍淵)은 문과에 급제(33/46위)하였으며 직은 전적, 문찬규(粲奎)도 문과에 급제(17/33위)하여 찰방, 참의, 의금부사 역임하였으며,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청빈하게 살아 영조가 그의 인물됨을 알고 비단 한 필을 하사하였다.

무과 급제자로는 훈도 문상소(尙素), 부장 문현(玹)과 문창(瑒), 현감 문헌분(獻賁), 만호 문헌성(獻成), 생원은 문창형(昌炯, 53/100위), 문담(橝, 37/100위), 문상룡(象龍), 진사는 문위택(胃澤, 71/100위), 문명신(命新), 그리고 문익행(益行)은 효자이자 참의, 문명부(命敷)는 사직, 문명견(命堅)은 유학자이자 효자, 문팽로(彭老)와 문윤복(閏福) 문요년(堯年) 문추(樞)는 참봉, 문익시(益時)는 봉사, 문계검(啓儉)은 주부이며, 이밖에도 여기에 적지 못한 인물이 많다.

남평문씨 근현대 인물로는, 최초의 사전인 ‘새국어사전’을 펴낸 문세영, 재야운동가 문익환 목사, 초대문교부 장관 문장욱, 육군대장 문형태, 통일교 문선명, 국회의원 문희상, 문국현, 태권도선수 문대성 등 사회 각 분야에 많은 인물이 있다.

관계의 문홍식 전 국가비상기획위원회 동원기획국장(이사관, 2급), 정계의 문병호 국회의원, 법조계의 문한식 변호사, 학계의 문영호 동덕여대 명예교수, 의학계의 문경래 조선대병원 의과대학장, 언론계의 문영희 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문병호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대리), 재계의 문동완 동도조명 회장 등이 있으며, 그외 교육계, 관계에 많은 인물이 활동하고 있다.

 

 

 

<바로잡습니다>

지난 5월 23일자 낭주최씨 내용 중 안우의 손자 4형제는 6형제, 집성촌의 군서면 항동리는 도포면 항동리, 나주시 왕곡면 왕봉리는 봉황면 왕봉리, 양(洋)은 반(泮)의 오기(誤記)이기에 바로잡습니다. 그리고 검교군기사소감은 검교군기소감으로, 최진하(도 군과에 등과하였고 마지막 직은 병랑이다)는 서당의 선생을 지낸 분으로, 최수일은 최도일씨(전 농림수산부 이사관)이며, 최남호(전 영암군청 기획실장)씨는 해주최씨임을 문중에서 알려왔습니다. 당사자들께 죄송한 말씀 올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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