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연계한 사찰 연구도 중요

해남의 화원과 산이면 인근에서 발견된 초기청자가마터의 모습
남도의 도자기는 영암구림도기를 먼저 이야기한다. 구림도기에 앞서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기에 도기의 발생이 가능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생산된 것이 옹관이다. 입이 넓은 큰 항아리에 시신을 넣어 매장하는 옹관묘 장례풍습은 신석기 시대부터 서해안 일대에서 상당히 많은 양이 분포했다. 이런 옹관은 3세기~5세기 중반까지는 영산강 유역에서 크게 성행했다.

옹관문화가 알려진 것은 지난 1960년 시종면 내동리 고분에서 대형 옹관이 발굴되면서 나타났다. 삼호읍 용암리에서 출토된 U자형 옹관은 2개가 1조를 이루는 함구식 옹관으로 마한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런 옹관을 통해 도기의 기술이 발달했고 영암 구림도기에서 꽃을 피우게 됐다. 구림도기가마터는 8~9세기 대규모 도기 제작장이 위치한 것으로 나타났다. 10여개의 가마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수많은 생활용기와 처음으로 도기위에 유약을 바르는 시유도기가 발견됐다.

여수 수암산 일대에서 발견된 백자 편들<위> 장흥군 용산면 일대에서 발견된 조선백자의 모습<아래>
구림도기는 나중에 두가지로 변천됐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청자로 발전해 분청사기, 백자로 이어지는 도자기로 길을 이어갔다. 또 하나는 옹기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구림도기는 청자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기술은 해로를 따라 해남 화원과 산이면에 대규모 가마터가 발견되고 있다. 화원 초기청자 60여가마터가 확인되고 있어 우리나라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가마터는 서남해안의 한쪽 끝에 위치하고 있어 도자기의 발전이 육로가 아닌 해상의 물길과 영산강을 중심으로 하는 강상의 물길을 타고 이동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화원면 가마터는 청자로 소형 음식용기인 완, 발, 종지기 등과 함께 중형 저장용기인 청자병, 청자호는 소량 생산되었다. 이런 청자발전상은 그대로 강진으로 유입됐다고 볼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중국의 청자유입설이 설득력을 갖고 있지만 청자로드를 통한 자생적 기술의 발달도 결코 그대로 넘겨서는 안된다. 강진을 거친 청자는 장흥과 여수까지 이어졌다. 장흥지역의 도요지는 총 50여개에 달하고 있다.

산악지역에 21개, 평야지역에 4개, 해안지역에 19개가 몰려 발견되고 있다. 청자가 발견된 곳은 용산면 풍길리와 회진면 회진리 가마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두 곳의 공통점은 주로 해안가에 위치해 당시에는 해상세력을 통한 청자의 유입이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여수지역도 마찬가지다.

여수의 도요지는 소라면과 율촌면을 중심으로 분포한다. 분청사기 가마터는 소라면 사곡리와 분계동에 분포한다.

백자 가마터는 율촌면 가장리 가장저수지 인근 지역 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현재 여수에서 추정되는 가마터는 분청사기 가마터 4개소, 백자 가마터 6개소 총 10개소가 알려졌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륙과 바다의 교통요충지였던 여수에서 상당한 부를 축척했고 곳곳의 섬에서는 고급청자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해로를 따라 강진청자가 깊숙이 침투한 것을 추정하게 한다.

또 남도의 도자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찰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각종 도자기의 생산에는 반드시 수요처가 있었을 것이다.

일반 도자기의 경우 지역주민들의 생활도자기로 사용했지만 고급 도자기로 성장하면서 이를 사용했던 가장 큰 수요처는 대형 사찰에서 사용이 필수적이라고 볼 수가 있다.

3~5세기 중반까지 영산강 유역에서 크게 성행했던 옹관의 모습<위> 옹관을 전통방식으로 재현하고 있는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의 전통 가마터<아래>
이제 남도의 도자기는 하나의 루트를 이루고 있다. 특이한 점은 해로를 통해 모든 도자기가 유입됐고 이를 통해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는 각 지역에 나눠져 있는 도자기를 바탕으로 하나의 문화컨텐츠를 구축해야한다.

영암지역의 구림도기를 가지고서는 한계가 있고 강진의 청자만으로 관광객 유입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영산강 유역을 따라 발전한 도기의 문화에서 이를 바탕으로 다시 발전해 청자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하나의 도자기 로드로 완성 되야 컨텐츠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근 지역과 도자기에 대한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가능해지고 영암의 구림도기가 뿌리가 되고 여기에 해남을 거쳐 강진에 꽃을 피웠다는 시나리오에도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목포대학교 변남주 교수는 “남도의 도자기 역사는 영암 구림도기를 시작해 해남 화원, 산이면을 거쳐 강진으로 흘러와 고려청자를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며 “이런 도자기의 발전에는 해로를 통한 청자로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밝혔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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