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6.25 참상,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영암의 민간인 집단학살 사례
2005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가 엮고, 한울아카데미가 발간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실태보고서>에 게재된 6.25 사변 후 영암의 민간인 집단 학살 몇 사례를 전재한다.

 

영암 금정 덤재 보도연맹 학살
1950년 7월 20일 국군과 경찰에 의하여 보도연맹원 등 200-300명이 영암군 금정면 덤재 골짜기(송장고개)에서 피살되었다.

사건내용을 보면 영암 보도연맹 원들은 1950년 7월 중순 예비 금속되어 군경이 장흥 쪽으로 후퇴하던 7월 20일 경 영암과 장흥의 경계인 덤재 골짜기에서 학살되었다. 한 구덩이에 5-6명씩이 있었으며, 구덩이가 40-50개 정도 됐다고 한다. 200-300명이 피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시민의 소리재인용)

 

영암 금정면 보도연맹 원 학살
1950년 7월부터 8월 사이에 국군과 경찰에 의하여 금정면 남송리, 풀씨고개, 한대리에서 보도연맹 원 다수가 학살되었다.(제보 재인용)

 

영암경찰서 학살
1950년 9월 28일 인민군에 의하여 영암경찰서 뒷뜰에서 국군과 정치인 가족 50여 명이 학살되었다.

 

영암 학산면 은곡리 학살
1950년 10월 6일 인민군에 의하여 학산면 은곡리 당매에서 13명이 피살되었다.

 

영암 군서면 구림 학살
1950년 10월 17일 아침 경찰은 구림을 포위하고 주민들에게 모두 나오라고 명령했다. 죄가 없다고 생각한 주민들이 집에서 나오자 이들에게 사격을 했고, 공포에 떨어 도망가는 주민들을 모두 살해했다.

이때 구림에서 78명이 피살되었다. 정작 경찰이 겨냥한 좌익 활동가는 이 사건의 희생자 속에는 거의 없었다. 일반주민들이 좌익으로 몰려 죽은 것이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경찰은 영암읍으로 후퇴했다.

|1951년 1월 2일 (음력1950년 11월 25일)에도 주민 12명이 학살되어, 구림에서 총 90명이 학살되었다. (정근식의 한국전쟁경험과 공동체적 기억- 영암 구림권을 중심으로- 재인용)

 

영암 금정면 차네동 학살
학살사건의 배경을 보면, 1950년 12월 18일 국군 목포 유달부대, 목포 해병대(대대장 박종옥)가 이날 빨치산 토벌을 위하여 차네동으로 진격하던 중 마을 어귀에 매복하고 있던 빨치산의 기습을 받아 3명의 전사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는다.

토벌대를 안내하던 마을주민 조경석(당시38세, 면사무소 근무)과 해병 2명이 빨치산의 총격으로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하지만 교전이후 빨치산들은 서둘러 마을을 빠져나갔으며 마을 앞산에 진지를 구축한 토벌대들은 3일 동안 대치를 계속하다 12월 18일 학살을 자행했다.

 

사건내용을 보면 학살은 박격포 공격으로부터 시작됐다. 1950년 12월 18일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에 갑자기 앞산 고지에서 날아온 박격포 2발이 마을을 강타했다. 급기야 박격포 소리를 신호로 마을에 들어 닥친 토벌대들이 일제히 총을 쏘며 "집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해 주민들이 나오는 즉시 불을 질렀다.

하지만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방안에서 불에 타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김옥룡(당시40여세)의 경우 일가족 5명이 집안에서 그대로 불에 타죽었다. 임신을 했던 김남수의 처는 아들과 손을 잡고나오다 문 앞에서 토벌대의 총에 맞아 죽었다. 집결한 사람들도 학살당했다.

 

이날 마을 어귀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마을 아래쪽 사람들이었다. 김씨는 다행히 윗마을 사람들과 토벌대를 따라 고지로 올라갔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뒤늦게 나온 윗마을 사람들에게 토벌대 장교는 "산으로 올라가면 살려 주겠다" 며 주민들을 산으로 끌고 갔다.

군인들은 구장이었던 김금석(당시40세)을 불러내 마구 구타했다. 그러자 구장의 모친이 강하게 항의했다. 이틈을 타 구장은 산 아래로 뛰기 시작했고 주민들도 같이 내달렸다. 그때 군인들이 등 뒤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주민들을 학살했다. 결국 산에 올라갔던 사람들 중 단 4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이후 죽은 시체들은 빨치산들이 수습해서 한 구덩이에 묻었고, 마을사람들은 빨치산을 따라 화순 능주의 국사봉 중턱까지 피난 갔다.(시민의 소리 재인용)

주요증언을 보면, “토벌대들이 죽지 않으려면 마을 앞으로 모이라고 해서 신작로에 엎드려 있는데 무조건 학살했다.” “토벌대들이 마을 어귀에 모인사람들을 향해 ‘너희들이 빨갱이를 키워 우리 동료가 죽었다’ 며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게 한 뒤 모두 학살했다.”(유족 김순덕의 증언, 일가 7명 몰살)

또 한 증언을 보면, “군인들이 산으로 올라가면 살려준다고 해서 올라가 보니 기관총이랑을 모두 준비해 놓고 있었다.” “나중에 군인들이 영암에 가서 싹슬이 하고 3-4명만 살려뒀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김남례의 증언)

 

영암 도포면 좌익에 의한 학살
1950년 7월 19일부터 20일 사이에 좌익에 의하여 경찰 및 소방원 공무원 등 60여명이 도포면 구학리 및 영호리에서 피살되었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2, 재인용)

 

영암 금정면 냉촌 마을 학살
1950년 12월 11일(음11월 3일)에 국군에 의하여 금정면 냉촌 마을에서 주민127명이 학살되었다.(증언)

 

6.25전쟁과 남한에서 유격대(빨치산)의 태동
유격대 또는 빨치산이란 “타국의 침략자에 저항하는 무장인민투쟁으로서 적의 후방에서 인원과 기자재를 섬멸하는 한편 통신수단과 그 밖의 것을 파괴하기 위한 독립된 부대” 를 의미한다.

 

유격대라는 말은 빨치산(partisan) 또는 게릴라, 공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프랑스어의 파르티(parti)가 그 어원이다. 빨치산은 볼세비키 혁명을 성공시킨 소련에서, 유격대는 국민당 정부군에 대항하며 중국 공산당을 이끌던 모택동이 빨치산 대신 인민유격대라고 했으며, 인민유격대에 대해 장개석 정부 측에서는 공산주의 비적(共産主義 匪賊, 줄여서 共匪) 이라고 했다.(한국 근현대사연구 2003년 겨울 호 제27집 김영택,126-7)

 

빨갱이란 빨치산이란 개념이 6.25전쟁을 거치면서 남한에서 잔인하게 부모형제를 살해하여 상대 할 수없는 사람이란 뜻으로 정착되었다.(필자)

 

해방 후 한반도에서 인민유격대가 처음 등장 한 것은 남북분단으로 인해 이념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부터다. 1946년 10월 “대구를 비롯한 영남일대를 피로 물들인 좌익폭도들과 그들을 따르는 노동자 농민들 가운데 일부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주변산악으로 숨어들어 이른바 야산활동을 시작 한 것이 효시가 된다. 그리하여 남한의 빨치산들은 10월 폭동에서 4.3사건과 2.7사건, 여순 반란사건 등 6.25에 이르기까지 해방 후의 역사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들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빨치산활동을 주도하였다. 곧, 1946년 10월 폭동 이후 남로당이 불법화되면서 산으로 들어간 야산대가 남쪽에서의 빨치산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쪽은 1949년 7월 남한에서 전개되고 있는 빨치산활동을 일원적으로 지원하고 지휘하기위하여 ”조선인민유격대“를 창설하였다. 그리하여 남로당계의 박헌영, 이승엽이 향후 남쪽 빨치산의 계통적 총 지휘부가 되었다..(앞의 책128-9)

 

영암과 인민유격대 (빨치산) 유치지구

인공시기 합법적으로 광주에 조직되어 있던 조선로동당 전남 도당위원장 박영발은 1950년 9월 25일 지하당으로 개편하라는 중앙당의 지시에 따라 9월 28일 백아산 기슭의 화순군 북면 용곡리 용촌 마을에 당 본부를, 같은 용곡리 약수마을에 당위원장 숙소를 정하였다. 도당 조직위원회는 각 시 군당 및 지역사령부를 원활히 관리하기 위하여 6개 지역에 “지구”를 창설했다. 지구란 각 시 군당과 유격대의 원활한 지도와 연락을 위해 일정한 지역에 설치하는 블록, 즉 도당과 시 군당의 중간에 위치하는 연계조직으로서 당부 조직이 아닌 일정한 거점을 말한다. 전남도당이 독자적으로 일시 채택한 특수조직이다. 책임자는 “지구 책”이라 했다.

 

6개 지구조직은 광주지구, 노령지구, 유치지구, 불갑산지구, 모후산지구, 백운산지구로 영암은 유치지구에 속했다. (김영택의 연구논문, 한국전쟁기 남한 내 빨치산의 재건과 소멸)

 

유치지구와 황점택, 그는 누구였는가?

유치지구는 장흥군 유치, 화순군 이양. 청풍. 도곡, 영암군 금정, 보성군 웅치, 나주군 다도면에 연접해있는 지역으로 빨치산들은 “유치내산(有治內山)“ 이라 불렀다. 이 지역은 비교적 넓고 농산물이 풍부한 지역이면서도 주변이 산으로 쌓여 있어 공격을 받을 경우 방어가 쉽고 이산 저산으로 이동하기가 용이한 곳이다. 이 때문에 유치에는 한국전쟁전의 ”구빨찌“ 시절에도 전라남도 도당본부가 옮겨와 있을 정도로 빨치산투쟁의 요충지였다.(앞의 연구논문)

 

유치지구 본부는 장흥 대천리 강만 마을, 유치지구 유격사령부는 화학산 기슭의 잿밭재에 각각 자리 잡고 있었다. 유치지구 관할은 장흥군, 동 나주, 목포시, 영암군, 강진군, 해남군, 화순군 일부, 진도군, 완도군, 고흥군 등 10개 시군이었다. 유치지구에는 입산해있던 시 군당이 10개나 되고 300여 명의 남해여단과 장흥유격대를 비롯한 10개 시 군당 유격대까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남도내 6개 지구 중 규모가 가장 큰 곳이었다.(전사감실, 공비토벌사, 509쪽 재인용)

 

유치지구에는 당 요원은 물론 그 가족과 동조자 그리고 좌익으로 의심받을 만한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1만여 명이 북적대고 있었다. 심지어 1951년 2월20일 붕괴된 불갑산지구 요원들까지 모여들었다. 1951년 3월 18일,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남해여단이 전멸되고 그 해 4월 24일 대공세를 받아 2,000여명이 희생되는 등 큰 타격을 입지만, 전남도당과 총사령부가 궤멸되는 1954년 4월까지 버티어 냈고 그 후에도 잔존세력이 은밀하게 활동했던 지구다. 유치지구는 “유치빨치산”이라는 신문도 발행했다.

 

이때 유치지구 유격대 사령관은 황점택(일명 황병택)이었다. 황점택은 영암읍 출신으로 6.25전쟁 이전부터 구빨찌로 활동하다 인공 때는 영암군당위원장을 하였다. 9.28 이후 퇴각해서는 유치지구 유격대장, 총사 책임지도원을 하였고, 그 뒤로는 지하로 내려가 당 재건공작을 하다가 금정면 국사봉에 설치한 자신의 비트가 군경에 의해 발각되어 중상을 입고 이송 중 여운재에서 절명하였다.(전남유격투쟁사, 정관호, 선인출판사, 408쪽)

 

 

유치지구의 활동과 영암유격대의 “한청본부” 습격

장흥 유치내산에 사령부를 둔 유치지구 유격대 사령부는1950년 9월 28일부터 1951년 6월10 일까지의 실전 결과를 “종합전과”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전남 유격투쟁사 정관호, 선인출판, 2008, 269쪽)

▲작전횟수: 987회로 동원된 유격대원 연인원 20,898명, 비 무장대 29,158명, 생산유격대 58,001명, 투쟁인민 122.578명,

▲전과: 군경 등 사살 2,412명, 부상 639명, 포로 224명

▲노획: 기관총1정, 소총40정, 기관총탄110발, 소총탄2300발, 지서 및 거점파괴66건, 철도파괴41건, 도로파괴2,922건, 자동차파괴154대, 전주절단17,505건, 군중정치공작 참가 연인원 50,123 명이라고 발표하였다.

 

영암유격대는 1951년 6월 3일 영암읍 부근에 주재하고 있던 멸공대와 한청본부를 습격하였다. 진입한 대원들은 멸공대원 6명과 한청간부6명을 응징하였다.( 앞의 책 266쪽)

 

 

영암이 풀어야 할 과제

영암에서 6.25전쟁의 상흔은 너무나 넓고 깊었다. 살육과 방화, 공포와 불안, 폐허와 절망, 불신과 저주로 가득했던 영암, 왜 그렇게도 혹심한 참상을 겪어야만 했던가? 이 명제(命題) 앞에서 영암사람들은 깊은 고뇌를 했어야했다. 이제라도 하여야한다. 이는 한국사의 일부요, 영암의 역사이다. 역사는 그 국가 사회의 정체성이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다시 그 역사에 얽매이게 된다.”고 했다. 이 경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히틀러가 유태인을 가스로 학살시킨 아우슈비치 수용소 기념관 입구에 적혀있는 문구이다.

 

필자가 주창하는 영암의 6.25전쟁 참상을 가지고 고뇌를 하여야 한다는 것도 바로 여기에 참뜻이 있다. 다시는 영암에 이런 참상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당시의 참상에 대한 진상규명이 선행되어야하고, 이에 대한 원인분석과 향후대책이 있어야 한다.

 

6.25전쟁이후 여러 정치인들이 영암을 대표하겠다고 하면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낭산 김준연선생은 바로 6.25전쟁 당시 법무부장관이었다. 선생의 장관재임기간(1950년 11월 23일- 1951년 4월 24일)에 경남 거창 양민학살사건이 일어났고, 선생은 신성모 국방장관과 내무장관 조병옥과 이 사건을 처리해야 할 주무장관이었다. 선생은 검사들을 대동하고 현장에 내려가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타의에 의하여 법무부장관직을 떠나야 할 정도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거창에서 일어난 사건보다는 더 많은 양민학살이 일어 난 곳인 자신의 고향이요, 국회의원 지역구인 영암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무관심 했던가 납득하기 어렵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유인학 전의원의 노력으로 금정면 연보리 저수지가에 6.25 희생자의 위령비를 세웠다. 좌우를 바라보면서 눈물겹도록 어렵고도 어려운 일을 한듯하다. 그러나 이왕 할 바에는 보다 체계적으로 일을 추진했어야했다. 유인학 선생은 학자출신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에 그런 정도의 절차는 기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웃 인접해있는 함평군에서는 우리 영암보다 피살자가 많지는 않으면서도 이에 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낙연 의원 발의로 함평양민학살사건진상 규명특별법제정을 위하여 국회에 발의를 해놓고 있다. 아울러 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시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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