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과거급제자만 150여명.. 숱한 문사, 효자, 의사 등 배출

■ 송나라에서 귀화한 신수가 시조
거창신(愼)씨의 시조는 고려 문종 때 송나라에서 귀화한 신수(愼脩)로서 거창신씨는 중국에 연원을 두고 있는 성씨들 가운데 하나이다. 시조 脩(수)는 학식이 풍부하고 의술에 능했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수사공,우복야,참지정사 등를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안지(安之)가 지수주사(知水州事. 경기도 수원의 관리)가 되었기에 수원신씨라고 한 적도 있었으나, 후손 군기감사 성(成)이 아버지를 여읜 후 경남 거창에 내려가 살면서 거창신씨의 시원이 되었다.

인구조사에서 愼씨는 인구 수백 명의 본관들도 나타나나 '거창' 단일 본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거창신씨는 인구수에 비해 인물이 많다. 안지는 병부상서,삼사사,판합문사 등을 지냈는데, 한어에도 능통하여 송나라와 요나라에 보내는 공문서가 그의 손에서 많이 작성되었다. 7세손 집평(執平)은 강화도 천도 때 신호위대장군으로 몽골에 대항하다 전사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승선(丞善)은 공신에 책록되고 여러 판서직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며, 그의 딸은 연산군비인 제인원덕왕비(일명 폐비신씨)이다.

승선의 아들 수근(守勤)도 좌의정에 올랐으며 수근의 딸은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의 주인공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이다. 다른 아들 수겸과 수영도 형조판서,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 중기에는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는데 희복(希復)은 홍문관직제학,우참찬 등을 지냈고 대학자로 명성을 떨쳤으며, 이의(爾儀)는 세자시강원시직, 수이(守彛)는 첨지중추, 후담(後聃)은 실학자로 '서학변'(西學辨)의 저자이다.

거관(居寬)은 호조판서,중추부지사를 역임하였고, 희남(喜男)은 시와 글씨로 유명했으며, 천익(天翊)도 문장과 시부(詩賦)에 능했다. 그리고 거창신씨는 조선시대에 150명에 가까운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문과 34명, 무과 9명, 생원진사 93명, 역과 11명)

대전시 뿌리공원에 있는 거창신씨 조형물. 바다에서 해가 뜨고 있음을 형상화 한 것으로 거창신씨 가문이 영원히 번창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 영보 입향조는 참판공파 후손들
거창신씨는 크게 3개 파로 나뉘는데, 우찬성을 지낸 이충(以衷)의 세 아들이 각각 파조(派祖)인 참판공(幾)파, 서령공(言)파, 양간공(詮)파이다.

우리 영암 영보지역 일원에 자자일촌하는 거창신씨는 참판공파 후손들이며, 영보 입향조(入鄕祖)는 전라감사를 지낸 신기의 막내아들인 신후경 선생이다. 그는 연촌 최덕지의 막내 사위이다.

거창신씨 집성촌은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서후리와 파주시 금촌읍 금릉리, 경남 거창군 위천면 대정리,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영보리, 전북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등이 있으며, 거창신씨 인구수는 2000년 조사에서 13,623가구에 43,890명으로 전국 총인구 대비 0.1%미만의 소수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거창신씨 항렬자는 26世: 輔(보), 27세: 九(구), 28세: 炳(병), 29세: 宗(종), 30세: 珹(성), 31세: 範(범), 32세: 鏞(용), 33세: 宰(재), 34세: 重(중), 35세: 揆(규), 36세: 澤(택), 37세: 相(상), 38세: 煥(환), 39세: 基(기), 40세: 鎬(호), 41세: 泳(영), 42세: 根(근), 43세: 然(연), 44세: 圭(규), 45세: 鉉(현), 46세: 源(원), 47세: 東(동), 48세: 榮(영), 49세: 載(재)이다. 천간(甲乙丙..)을 일회전시킨 후 음양오행을 채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 영암에 살고 있는 거창신씨 인구(2000년 조사 때 88가구 211명. 영암 인구의 0.35%)는 소수이나, 과거급제자수와 그외 벼슬한 사람, 호남읍지에 기록된 효자(孝子), 의사(義士), 유현(儒賢)수를 보면 가히 대단한 가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효자, 의사 등 대단한 가문
효자로 기록된 인물을 살펴보면, 신영수(愼榮壽)의 호는 산정(山亭)이며, 우찬성 신이충의 증손이다. 진사에 합격하였고 천성이 침중(沈重)하며 학행이 있었다.

부친상에 시묘살이 3년을 지낸 뒤 모친 봉양에 효도를 극진히 하여 늙은 모친 때문에 과거를 보지 않았다.

김종직이 방백이 되었을 때 행의(行誼)를 조정에 알리고 여러 번 조용(調用)을 명하였으나 친로(親老)를 이유로 벼슬하지 않았다. 모친상을 당해서도 시묘를 살았는데 슬픔이 지나쳐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신성윤(愼聖尹)은 감사 신희남의 현손이다. 진사에 합격하였고 당시 나이 36세였다. 타고난 자질이 온후하였으며 어버이를 섬기는데 효성을 다하였고 집안을 다스릴 때는 법도에 맞게 하였다.

궁핍하게 살면서도 책을 읽어 자기를 다스림에 예를 다하였다. 1660년에는 전라남도 유생 340인이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도록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신성윤이 이 상소문의 처음에 이름을 올렸다. 1681년에 대신들이 그의 의로움을 천거하여 참봉을 제수 받았다.

신성필(愼聖弼)은 참봉 신성윤의 아우이다. 효우가 천성적으로 타고나 어버이 섬기는 정성이 지극하니 고을과 이웃에서 칭송하고 감복하였으며 학문에도 진력하였다.

아버지의 병환에는 대변을 맛보아 증험하였고 아버지의 병환을 자신의 몸으로 대신케 해 달라고 북두칠성에 빌었다.

신경훈(愼慶勛)은 감사 신기의 8세손이다. 어려서부터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 섬기는 정성이 이웃 마을까지 영향을 끼쳤으며 학문을 스스로 연마하여 사표가 되었다.

아버지의 병에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서 3일을 더 연명케 하였고 부모의 상을 당하여 각각 3년의 시묘를 살았으며 낭색이 수척하였고 슬피 우는 모습이 이웃 마을까지 감동케 하였다.

신사준(愼師浚)은 신성윤의 증손이다. 진사에 합격하였고 당시 나이 40세였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어버이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다.

어버이가 병에 걸렸을 때는 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가며 병간호를 하였고, 상을 치름에 있어서는 모든 예를 다하였다.

성리학을 전공하였으며, 궁핍하게 거처하면서도 책을 읽어 경전에 두루 통하였고, 공검한 것을 스스로 지키므로 온 고을 사람들이 공경하고 따랐다. 관직은 정릉직장에 이르렀고 시무(時務) 10개 항을 상소한 바 있다.

■ 신용호, 신승남 각 분야 인물 배출
유현(儒賢)으로 기록된 인물로, 신희남은 신우장의 아들로 진사와 문과에 급제하였고,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병조,예조의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이이, 박순 등과 교유하였고, 동서 붕당이 싫어 자청해서 금산군수로 나갔다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여생을 마쳤다. 성품이 후덕하고 근면,온화하였으며 시와 글씨에 뛰어나 한석봉에게 서예를 가르쳤다.

신여경(愼餘慶)은 신희남의 아들이다. 진산,연산의 원님을 지냈는데 청렴하고 선정을 베풀어 읍민들이 비를 세워 그 덕을 기렸다. 필법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으며 좌승지를 증 받았다.

덕진면 영보리 영보정 앞에 있는 산정 신영수 선생의 유허비.
신함(愼諴)은 신여경의 아들이며 벼슬은 현감에 이르렀다. 세상사를 보니 크게 잘 못되어가므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칩거하면서 가야금을 켜면서 술로 자위하였다.

신천익(愼天翊)은 진사 신인의 아들이며, 21살 때 진사와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을 하던 중 광해군의 실정을 보고 사직한 후 영암에 은거하였다. 나중에 이조참판 등을 지내고 귀향한 뒤로는 정사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문장과 시부(詩賦)에 능하여 송시열도 찬탄한 바 있으며, 아우 신해익과 더불어 크게 문명을 떨쳤다. 영보사(永保祠)에 제향 되었으며, 저서로 '소은유고'가 있다.

신해익(愼海翊)은 신천익의 아우이다. 22살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그 이름이 세상을 진동케 하였다. 시작(詩作)에 뛰어나 일찍이 왕이 탄 수레 앞에서 시를 읊으니 그 단정한 풍채와 낭랑한 음성을 보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 비선(飛仙) 같다고 감탄하였다.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나 홀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몇년 뒤 신병 치료를 위하여 서울로 갔다가 예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에 임명되었으며, 병이 갑자기 악화하여 25세로 요절하였다.

과거 급제자로, 신희남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으며, 그의 아들 신언경도 문과에 급제하였고 마지막 직은 사간이다. 신천익, 신해익 쌍둥이 형제도 위와 같으며, 신몽필의 마지막 직은 군수이다. 무과 급제자로는 신여훈이 있는데 그의 마지막 직은 현감이다.

그외 벼슬한 사람으로는, 감역 신화, 집현전직증좌통례 신후경, 참봉 신우증, 봉사 신원개, 참봉 신여원, 참봉 신여의, 현감 신함, 도사 신영, 참봉 신성윤, 감역 신원만, 참봉 신사준, 진사 신영수, 생원 신형, 진사 신성, 생원 신필휴, 생원 신성거 등이 있다.

그리고 현대의 인물로는 교보생명 설립자 大山 신용호 회장(2003년 작고)과 신승남 전 검찰총장 등 사회 각 분야에 많은 인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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