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6.25 참상,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영암 피살자 7.175명 명단 입수

6.25사변이 일어 난지 62년이 되었다. 당시 어린소년들이 노년에 들어 선지 오래되었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는데도 영암군단위의 6.25에 대한 진상규명도 없이 유족은 물론 군민들도 가슴에 그 아픔을 안고 살아왔다.

이제나마 당시의 왜곡된 사상과 이념, 사소한 갈등과 원한으로 촉발된 참상의 일부만이라도 규명함으로써 희생된 모든 이들의 원혼을 달래고, 현재를 살아가는 자들 간에는 서로가 화해와 용서로 가슴에 매친 응어리를 풀어가자는 뜻에서 이 글을 다룬다.

아내와 자식들 앞에서 남편과 아버지가 학살되고, 형제자매가 학살되었으며, 오순도순 살아가던 이웃이 학살되었다. 열 살도 못된 수많은 어린애들이 처참하게 죽어갔다. 이웃끼리도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좌익이 우익을, 우익이 좌익을 죽였고, 여기에 성씨들 간에 원한까지 겹쳐 한풀이식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죽창으로 찔러죽이고, 돌로 쳐 죽이고, 산채로 물에 수장하고, 불로 태워 죽였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났어도 부모형제와 이웃이 처참하게 죽어간 것을 어디에 말 할 수 없어 그 슬픔을 가슴에 안고 살아야했다. 이것이 6.25의 참상이요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이다.

이는 일본의 한국식민통치의 산물이요, 후유증이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해방의 날이라고 하는 바로 그 해 8월 15일을 계기로 국토가 분단되어 일본의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국토와 민족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이 분열로 말미암아 6.25라는 민족상잔이 일어났다. 6.25사변이 일어나기 전부터 대구 폭동, 여순반란사건, 제주4.3사건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면서 드디어 6.25라는 민족상잔이 일어났다.

전쟁발발 다음날인 1950년 6월 26일에는 김일성은 방송연설을 통해 “도회에서 반역자들을 처단하며, 인민의 정권기관인 인민위원회를 복구하라”고 남한의 공산주의세력 및 빨치산을 대상으로 지령을 내렸다. 또 이북의 부수상 겸 외상이던 박헌영은 1950년 7월 1일 “반역자들을 체포. 처단하여 인민들의 원한을 풀어 줄 것” 을 선동하였다. (조갑제의 6.25사변 피살자명부1권)

그런가하면, 한국의 이승만 정부는 1950년 7월 1일에 집단학살을 지시했다.(한국전쟁. Ⅱ, 미 국립 문서 기록보관 청사진, 박도엮음, 눈빛)

북한의 김일성과 박헌영의 지령과 선동에 의하여, 한국정부의 지시에 의하여 남한에서는 집단 학살이 도처에서 자행되었다. 9.28 이후에는 상호간에 보복살인으로 이어졌다. 인공치하에서 학살은 북한의 정규군인 인민군에 의한 것 보다는 남한 점령지역을 접수. 통제하기 위하여 북한에서 파견된 내무성 정치보위국과 점령지역에 설치된 내무서 등에서 주도하였다.

한국정부의 군경에 의하여 자행된 민간인 집단학살을 예시하면, 부산 및 대구형무소 재소자 8천명 집단학살 계획, 경북 김천 보도연맹 원 1,200명 예비검속 및 학살, 경북의성 및 인천 보도연맹 원 580명 집단학살 등을 들 수 있고, 거창양민학살은 잘 알려진 사건이다.

영암에서의 여러 집단 학살도 남북한 정권의 지령이나 지시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특히나, 감정적이고 보복적인 집단학살의 경우가 많은 것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해서 전국적으로 죽어간 민간인 학살규모를 경향신문(2010.6.19)이 보도한 자료에 따르면

①<전국 피 학살자 유족회>가 1960년 4월 19이후 정부에 보고한 각 시 도별 민간인 학살규모는 전국적으로 총 113만 명으로 경남(25만 명), 경북(21만 명), 전남(21만 명), 전북(19만 명), 제주(8만 명), 경기(6만 명), 충북(5만 명), 충남(3만 명), 서울(2만 명)순으로 집계 되었고

②<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가 2002년에 발표한 규모는 100만 명이며

③<국방부군사편찬위원회>가 1996년에 발표한 규모는 12만 8396명으로 1952년 대한민국통계연감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영암의 참상 실태

6.25사변 당시 영암에서 일어난 참혹한 현상들은 가옥 학교 관공서 등 시설의 파괴는 물론, 가장 참혹한 것은 인명살상이다.

필자가 입수한 <6.25사변 피살자명부, 월간조선사, 조갑제>에 의하면 당시 영암에서 피살된 민간인은 총 7.175명이다. 이는 군 단위로 보아서는 전국적으로 피살자가 가장 많은 영광군(2만1천여 명) 다음이다.

이 명부는 1952년 3월 대한민국 공보처 통계국에서 작성하였고, 정부기록보존소,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명단을 월간조선사가 최초로 공개한 것이다. 이 명부는 피살자의 성명 성별 연령 직업 피살연월일 피살장소 본적 주소 등 총 8개 항목으로 피살자의 신원을 기록해 놓고 있다. 필자는 이 명부를 입수하여 검토하던 중 여러 가지로 놀랍고 전율을 느끼게 하는 몇 가지 점을 발견하였다.

첫째는, 6.25 사변 전후 기간에 영암에서 피살된 총 인원은 7.100여 명을 훨씬 상회 할 것이다.

명부상에 나타난 7.100 여명의 피살 시기는 1950년 8월부터 1951년 2월(7개월간)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6.25사변 전에도 경찰과 공비 간에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고, 9.28 이후 빨치산이 영암군을 관할하고 있던 [유치지구 유격대사령부]가 존속했던 시기가 전남도당 총사령부가 궤멸되는 1954년 4월까지 이었는데, 그 후에도 빨치산 잔존세력들이 은밀하게 활동했던 것으로 보아 빨치산에 가담하여 살해되었던 사람들과 이들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 상해로 수년 후에 사망 한 사람 등을 합산하면 6.25 전후 전 기간에 피살된 전체 인원은 명부상에 나타난 인원 7.100여 명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둘째는, 금정면 연보리 및 연소리, 학산면 은곡리, 삼호면 용앙리 경우처럼 피살자들 중 거개가 피살시기와 장소가 동일한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보와 피살자들이 마을 단위로 집단 학살을 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셋째는, 피살자들 중 10세 미만의 어린이와 부녀자들이 포함되어 있고, 직업이 거의 모두가 농업인 점으로 보와 피살자들의 사상이나 사건 관련차원이 아닌 감정적이고 보복차원에서 학살을 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부연하면, 영암군민들의 대부분이 농민으로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이념과 사상은 그들에게 크게 의미가 없다.

넷째는, 영암군내 11개 읍면 중 어느 1개면이라도 예외 없이 집단학살이 자행되었고, 7,000 여명의 피살자가 7개월 동안에 집중 학살되었으므로, 1 개월에 1.000여명이 피살되었다. 몸에 소름과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다섯째는, 이 명부는 피살자가 많은 성씨별로 작성되었는데 영암에서는 김 이 박 정 최 조 씨 등의 순으로 어느 성씨 막론하고 피살자가 발생하였다.

 영암의 인민공화국 시작과 영암 빨치산

영암을 점령한 인민군 부대는 조선인민군 제6사단 주력 부대인 제15보병연대로 보인다. 이 연대는 영광으로부터 나주로 진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연대는 7월 23일 저녁 8시에 진격을 개시하여 밤 11시 무렵에 영광 삼학리 지역에 도달하였다. 그곳에서 한국군 1개 대대 병력과 조우하여 7월 24일 아침7시까지 전투가 계속되었다.

7월 24일 연대는 한국군 병사 200여 명을 살상하고 야포 및 박격포 12문을 노획한 후 나주로 진격을 재개하여, 7월24일 오후 늦게 나주를 점령하였다. 이 부대가 계속 진격하여 영암을 점령 한 것으로 보인다.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1)

1950년 7월 27일 정오 경 구림 동북쪽에서 기관총소리와 소총소리, 대포소리가 간간히 뒤섞여 한 시간 가량 계속 들려왔다. 이 총소리는 인민군이 영암에 발을 들여 놓은 신호탄이었다.

인민군이 영암에 들어오기 전인 7월 23일 군수를 비롯한 영암유지와 가족들 약 70여명이 영암호를 이용하여 목포 쪽으로 피난가고, 경찰은 7월 24일 해남 완도 쪽으로 모두 철수하여 군청과 경찰서는 물론 영암읍은 무주공산이 되었다. 해남으로 철수했던 경찰이 7월26일 밤 다시 영암으로 되돌아 왔는데 7월27일 영암으로 밀고 오는 인민군과 이를 방어하는 경찰이 덕진면과 신북면 경계지점에서 교전하는 총소리였다.

27일 오후 경찰은 해남 쪽으로 다시 후퇴하고 인민군이 영암을 점령하니 이것이 영암에서의 인민공화국이 시작이 되어, 9월28일 UN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영암에서도 10월 1일부터 인민군의 기간요원과 남로당간부들이 금정면 국사봉으로 입산하고 극소수의 인원이 남아 뒤처리를 하기까지 인민공화국이 지속되었다.

인민군이 영암의 모든 기관을 접수하고 금정면 국사봉과 장흥 유치 산골짜기에 은신하고 있던 빨치산 이봉천, 황점택, 최양렬 등이 하산하여 이봉천은 도당으로 가고, 황점택은 군당위원장, 최양렬은 인민위원장을 맡고 부위원장 등은 북쪽 출신 인민군이 맡아 실권을 장악하고 실무를 지도하였다.(호남명촌 구림, 구림지 편찬위원회, 리북, 2006, 370)

인공치하에서 이들은 농산물을 3:7의 비율로 인민공화국에 바쳐야한다면서 논에 서 있는 벼 알을 세고 밭에서는 조 이삭을 조사하여 생산량을 책정하였다. 이를 보고농민들은 일제시대 공출을 연상, 민심과는 괴리되었으나 이를 표현 할 수가 없었다.

영암에서의 빨치산활동을 보면, 1946년 6월 이승만이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공언한 이후 좌익세력은 더 조직화되고 활동범위를 넓혀갔으나 1947년 3.1절 주암 집회의 발포사건 이후 탄압이 심해지고 마을에서 조직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1947년 7월경 영암 이봉천 등이 은신처를 월출산으로 옮겨 활동하다가 자연스럽게 무장투쟁의 길을 택하면서 월출산 유격대(빨치산)가 생겨났다.(호남명촌 구림,구림지편찬위원회,리북,2006, 364-373참조)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