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영암인의 농민항쟁(2)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과 항쟁발단-

■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

▲조복전 선생 -도포면 목우동 출생 -영암중고, 동국대 법학과 졸업 -법무부 연구관, 대구소년분류심사원장, 청주미평고등학교장, 경기대 겸임교수 역임 -영암 항일독립운동사 연구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정책은 조선민족 말살과 경제수탈을 목표로 하였고, 경제수탈을 목표로 하는 정책은 그 중점이 농업정책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농업정책을 실행해 나가는 주역은 조선총독부의 권력과 함께 조선농업을 변질시킨 일본자본이었다.

한일강제병합 전부터 진출한 일본자본은 낮은 지가와 고율의 소작료, 그리고 개발의 잠재성을 노리고 진출한 “약탈적인 고리대 상업적인 중소 개인자본” 이었다.

일본인 久間健一 (1933년 총독부소작관역임)은 조선재래의 농촌사회가 왜래적인 권력과 자본에 의해 개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농민에게 축복이 아니라 불행이라 보았다.(구간건일, 조선농업의 근대적 양상, 2P, 조선 농업정책의 과제, 71P)

농업정책의 측면에서 일제 식민통치 기간별로 그 특징을 구분하면 ① 토지조사 사업(1910년대), ② 제1차 산미증식 계획(1920년대 전반기), ③ 제2차 산미증식 계획(1920년대 후반기), ④ 농업 진흥정책 또는 자력갱생운동(1922-1939년), ⑤ 제3차 산미증식계획 및 국가 총동원 체제(1940년대)로 구별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일제가 농업정책을 시기별로 바꿔 나간 것은 그들 본국의 농업정책의 변화 때문이었다는 것에 식민정책상의 본질이 있었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진행되었던 토지조사사업은 그들이 식민통치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정책으로, 세원의 확정 및 확충이라는 측면과 아울러 급속히 확장되고 있는 일본인의 토지소유를 제도적, 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다목적 사업으로 실시되었다.

더욱이 토지조사사업결과 농경지 27만 여 정보를 포함한 광대한 토지가 국유지로 확정되었다. 국유지는 동양척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 토지회사 지주들에게 헐값으로 불하되었다. 이과정은 수많은 소유권 분쟁을 불러일으켰다.

가. 산미증식계획과 일인농장의 확대

영암농민항쟁 당시 구속된 피고인들이 재판정에서 소란이 있었다는 내용의 조선일보 보도(1933.10.1 오른쪽)와 징역 5년을 구형받은 41명에게 공소를 제기했다는 조선일보 신문기사(1933.10.11 왼쪽)
미증식계획은 그들의 식량공급과 그들 본국의 조선농업이민자의 이익을 증대하는데 목표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 본국의 식량사정이 해결된 1930년대에는 산미증식계획을 중단하고 그 미봉책으로 자력갱생운동이라는 것을 내세웠다.

그 이후에는 일제가 대륙침략으로 군수식량이 대량으로 요구되던 1940년대에는 다시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였다. 곧 일제의 조선에서의 농업정책은 일제 본토의 식량정책에 의한 것이었지 조선인을 위한 식량정책이 아니었다.

산미증식계획은 식민지 경제수탈을 목표로 하는 제국주의 본연의 식민농업측면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소작농민 또는 농업노동력의 극대화를 통하여 일제의 지주적 이익을 증대시켜보자는 것이고, 또 하나는, 수리조합설치로 개간지의 확보 및 한국인 농토에 대한 농업 지배를 꾀하자는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노동력의 극대화란 곧 노동력을 최대한 착취한다는 것을 의미 한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이란 실제로 한국농민의 착취계획이었고, 한국농민의 농토를 일본인의 농토로 개편하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식민착취과정을 대표하는 일본인농장으로서 1920년대 동척(동양척식회사) 불이농장 외에 동산 대교 일해 동진 금촌 중시 석천 서수 전남식산농장 등을 들 수 있다.

동양척식회사는 1928년의 통계에 의하면 69,944정보를 보유, 이중에서 11,379 정보는 일본인 농업이민자가 차지한 소작경영이고, 나머지 5만8천여 정보는 직할소작지로 착취하였다. (조선사업론, 柴田長雄, 1928, p226 재인용). 그리하여 한국의 농민은 자작농이 감소되고 소작농이 해마다 증가하여 1920년대 말에는 자소작(自小作) 합쳐서 소작농이 81.6% (자소작 31.4%, 순소작 50.2%)에 이르게 되었다.

1977년도 한국통계연보에 의하면 강원도의 논 면적이 5만7천 정보인데 동양척식회사가 소유한 농지가 강원도의 농지보다 더 많다는 것은 한국 전체적으로 볼 때 일본인의 조선에서의 농지침탈이 얼마나 심각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나. 경제수탈 정책의 실제
일제가 한국농민을 위한다는 산미증식계획의 본질은 한국농민의 착취와 일본인 농장의 확대에 주안을 두었다. 그리고 또 일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경제 불황이 닥쳐오자 그 경제적 상처를 한국에서 보상받고 있었다.

한국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한국경제의 식민지적 착취이고 그것은 곧 한국 농민에 대한 착취로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토지 조사사업을 통하여 약탈한 국유지에서 혹은 일본인 농장에서 한국 소작인을 최대로 착취했다.

그리하여 파산위기에 놓인 한국인의 토지를 헐값으로 매수하여 한국 소작인 수는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하였다. 1930년도를 기준으로 소작료 실태를 보면 대체로 50%를 전후하고 있었는데 지역(地域)과 정조(定租), 집조(執租)에 따라 높게는 70-80%이었다.

소작인의 부담은 소작료 이외에도 많이 있었다. 그래서 소작쟁의나 농민운동이 자주 발생했다. 소작쟁의는 사활을 건 투쟁이었다.

이때 소작인의 항쟁구호로 자주 나타나는 것이 소작료의 인하에 뒤따라 조세 공과금을 지주가 부담 할 것, 사음(舍音)제도를 폐지할 것, 소작료의 운반은 1리(里)이상의 것은 지주가 담당 할 것, 소작인의 사역을 폐지 할 것, 짚의 분배를 폐지 할 것 등이니 소작농민은 몇 겹으로 착취를 당하였다.(독립운동사제10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대중투쟁사 참조 )

그나마 소작권 이동이 잦은 편이었다. 그래서 많은 농민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이른 봄이 되면 유랑 걸식하였다. 이처럼 살길이 막막하여 조상대대로 살아오던 정든 고향산천을 하직하고 만주로, 하와이로, 맥시코로, 연해주로 떠나야했다.

■ 영암농민항쟁의 발단 배경
가. 영암 군민들의 소작농으로 전락
1930년대 영암은 11개 면을 가지고 있으며, 인구는 1928년 현재 총77,428명이었다. 이 가운데 일본인 688명, 중국인 4명이 포함되어 있으며, 일본인 절반가량이 읍내에 거주하였다. 각 면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영암군의 총 인구 가운데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7만1천여 명으로 전체인구의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 1930년 현재 영암지역의 총생산액은 5,665,000원으로 이 가운데 농업생산액이 4,500,000 원을 차지하였다. 전남사정지, 하, 1930, 276~277 재인용)

그 밖에 임업과 수산업이 있었으나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와 같이 농업이 주종을 이루었던 영암의 전남대비 계층별 농민구성은 1928년 현재 다음 <표1>과 같다.

<표1> 전남과 영암지역 계층별 농민구성(1928년 현재) 자료: 전남사정지, 상 1930에서 작성, 재인용

위의 표<1>에서 알 수 있듯이 영암지역 농민구성의 특징은 전남 평균에 비하여 자작농의 비율이 현저하게 낮다는 점과, 그 대신 자소작농과 소작농의 비율이 전남의 평균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다. 영암지방의 농민계층은 소규모의 자작농과 절대 다수의 자소작농과 소작인의 형태로 정리될 수 있다.

1928년 현재 지주(갑을)가 모두 합쳐 204호였으나 1930년대 들어 지주 갑이 증가하면서 소작농이 함께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다음으로 1930년 말 현재, 영암군의 지주와 1931년 현재, 영암지방의 주요 농업자, 농업 경영자를 살펴보면 <표2>와 같다.

 

<표2> 1930년말 현재 영암거주 일본인의 지주 명부(30정보) 자료: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지개혁시 피분배 지주 및 일제하 대지주 명부, 1985. 재인용

<표1>에 나타는 바와 같이 영암지역은 전남의 다른 지역보다 일본인 농장 및 농업회사가 소유한 토지가 많다. 그러나 일본인 지주들이 각 군에 걸쳐 토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표2>으로는 영암군에만 어느 정도의 토지를 소유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1930년 말 현재 30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일본인 지주는 총24명(농업회사 및 농장포함) 이었고 이 가운데는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을 비롯하여 동산농장 겸전산업 등 1,000정보 이상을 소유한 농업회사 혹은 농장들을 비롯하여, 개인적으로 1,000정보 이상을 소유하고 있던 黑住猪太郞 등이 있었다. 물론 이들은 영암을 비롯한 전남지역에 분포한 그들의 토지를 전부 합산한 수치이다.

위의 <표2>에서 순수하게 영암지역에 토지를 소유한 지주로는 藤中米吉, (합)藤中農場, (주)田川農事, 兵斗一雄, 伊藤源太郞, 高橋種夫, 南鮮土地, 小柳農園, 佐木秋生, 長谷六兵衛 등이 있는데 이들이 소유한 토지를 모두 합하면 1,138정보가 된다.

나. 일본인 농사경영자의 영암진출 시기
일본인 농사경영자들이 영암에 회사를 설립하여 진출한 시기를 보면 거의가 1910년 이전 이었으며, 심지어 1905년 러일전쟁이 종료하기 이전에 병두일웅(1903), 중도청태랑(1903.4), 겸전산업(1905.12), 흑주저태랑(1905.5)등이, 1906년 이후 1910년 전에는 우전행차랑(1910.1), 등중미길(1908.11), (주)전천농사(1908.8), 하목삼태랑(1907), 동산농사(1907.1), 동척목포지점(1909.1)이, 또, 1910년 한일강제합방이후를 보면 (합)등중농장(1923.1), 삼주정(1913.6), 삼전태길(1913.6), 전중신장(1918.6), (주)복전농사(1920.9)가 진출하였다(한국농촌경제연구원,1985년).

영암에 진출한 위 일본인 영농회사들 중에서는 한말 영암의병의 공격을 받았다.

그 예를 보면, 영암의 면화채종포가 1909년 3월에 수십 명의 의병들로부터 습격을 받아 사무소와 사무소안의 각종물품이 불타는 등으로 중도에 폐지되었으며, 도포면거주 일본상인도 의병들의 공격을 받았다.(한국 독립운동사 자료13권, 홍순권의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p199)

<표3>영암지역의 한국인 지주 (30정보이상, 1930년말현재)

또한 <표3>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한국인 지주로는 김동곤, 김현재, 김준원, 하대두, 신갑덕, 최현, 현영재 등인데 이들이 소유한 영암지역의 토지면적은 1,016 정보이다.

하지만 전천농사(주)와 좌목추생과 같은 일본인 지주는 영암지방에만 200정보가 넘는 농지를 가지고 있었던 대지주였다.

100정보 이상의 농지를 소유한 한국인 지주로는 현준호를 비롯하여 김성규 박봉래 등은 200정보 이상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밖에 영암지역의 대지주로는 하대두(269), 김현재(252), 신갑덕(128), 현영재(124) 등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영암지역의 농업경영의 형태를 1985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펴낸 “농지개혁시 피분배 지주 및 일제하 대지주명부”를 통해 보면, 1931년 현재 100정보 이상 농업경영자가 총 16명(단체)이었고 이들 대부분은 소작경영을 통한 벼농사를 하였다.

일본인들은 러일전쟁을 전후해서 한국에 진출하여 농장과 농업회사를 설치하여 수익성이 좋은 벼농사에 집중되었다. 영암지방에도 표<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일합병이 되기 전부터 일본인 및 일본회사들이 진출하였다.

일본인 농장과 농업회사들은 한국에 들어온 초기부터 “小作契約證書” 제도를 실시하였고, 대체로 일본인 농장에서 소작계약서가 도입되는 시기는 빠른 경우 1908년 늦어도 1910년대 중반으로 볼 수 있는데, 특히 동척이 들어오면서부터 그것은 일층 더 현대식화하여 일본인 지주의 소작계약, 한국인 지주의 소작계약 할 것 없이 대체로 그것을 모방하였다.

물론 이들 계약증서는 지주 측에게 유리한 편무계약이었다. 이와 같은 지주소작관계는 소작료와 소작권을 둘러싼 분쟁의 여지를 갖고 있었다.

이처럼 영암의 지주는 일본인 및 일본인 농업회사와 한국인지주가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형태였다. 그렇다면 당시 영암지방의 절대다수의 농민들의 처지는 어떠하였을까? 이는 당시 전남지방의 일반적 상황과 다르지 않을 것으로 이해된다.

전남지방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였음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총독부의조사에 의하면 춘궁민이 전국 48.7%에 비하여 전남은 56.4%로 높았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가운데 순 소작농의 경우 81.2%가 춘궁상태였다. 전남지방의 춘궁상태로 미루어보면 영암지방의 춘궁상태는 <표1>에서 본 것과 같이 더욱 심하였을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암에서의 농민항쟁은 항일투쟁이요,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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