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청년회 등이 주축 이뤄 민족주체의식과 항일의식 고취한 역사적 사건”

일제하 영암인의 농민전쟁(3)

-영암농민항쟁의 배경과 의미-

▲조복전 선생 -도포면 목우동 출생 -영암중고, 동국대 법학과 졸업 -법무부 연구관, 대구소년분류심사원장, 청주미평고등학교장, 경기대 겸임교수 역임 -영암 항일독립운동사 연구
◆ 영암군민의 의식성장이 동력이었다
영암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난 것은 일본인들이 다른 지역에서 보다 영암에서 높은 비율의 농지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높은 소작율과 빈번한 소작권이동으로 군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군민들의 생활은 아사지경이었다.

여기에 3.1운동이후 청년회활동, 신간회활동, 소작인회 활동, 영암공산주의협의회 활동 등으로 영암군민들의 반일사상이 고조되고, 반봉건적 啓蒙意識이 꾸준히 성장하였던 결과라 할 수 있다.


■ 청년회의 활동
영암군민들의 의식성장을 주도한 계층은 영암청년회라 할 수 있다. 영암청년회가 공식적으로는 언제 발족하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3.1운동의 경우를 보더라도 영암읍에서는
조극환을, 구림에서는 박규상을 중심으로 많은 보통학교학생들이 참여하였다. 이후, 영암공립보통학교와 구림보통학교 학생들이 “조선역사를 교수하라”는 등으로 동맹휴학을 하면서 항일운동을 끈임 없이 이어갔다.

동아일보 1922.9.19(위) 동아일보 1924.7.4(중간) 동아일보 1925.10.1(아래)
이러한 사건들로 교장 宮下茂輔가 자살한 사건까지 발생했다.(동아일보 1924.7.4) 또, 영암청년회가 동경제국대학을 졸업 한 낭산 김준연 환영회를 1920년 8월 20일에 개최하였다.(동아일보 1920년8월16일) 이러한 기사들을 유추하여 보면 영암청년회가 발족한 것은 1920년 전으로
추정 할 수 있다.

영암청년회의 활동을 영암농민항쟁사건과 관련하여 동아일보가 “영암청년총회 6개 조항결의” 제하로 1925년 10월 1일 보도한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암청년회에서는 지난 23일 하오 4시부터 낭남학원 강당에서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김준오씨 사회로 제반사항을 토의 한 결과 회원의 연령을 30 세로 제한하였으며 관공서 취직자에 대한 자격문제로 2시간여의 의론이 비등하였으나 귀결을 얻지 못하고 위원회에 일임한 후 다음 사항을 결의하고 이날 8시에 폐회하였다.

- 낭남학원에 관한 건

현시 비운에 빠지려하는 同院을 위하여 간부에게 철저한 활동을 하게 할 일

- 낭산 농사조합에 관한 건

낭남학원과의 협정조약을 이행케 하되 불응 할 시는 최후의 수단을 행할 일

- 청년교양의 건

경성등지에서 탁월한 강사를 초빙하여 사상 및 사회문제의 강좌를 개최 할 일

- 소작운동의 건

제1착으로 읍 8리에 소작인회를 조직케 하여 향상발전에 노력할일

- 머슴제도의건

머슴회를 조직하여 인권을 보장케 할 일

- 부인 진흥회의 건

異端團體로 認하고 적극적으로 撲滅할 일

위원회개최, 영암청년회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제반사항을 토의하였다 함은 별항 본 바와 같거니와 동회에서는 다시 위원회를 열고 아래 같이 각 부의 위원을 선정하였다.

서무: 한동석 조병은 한상길, 교양: 김준오 이원우 최희중, 노농: 김동호 최판옥 조사원

■ 신간회 활동
1920년대 중반 이후 영암지방 사회운동은 신간회가 창립되면서 본격화 된다

1920년대 중반 이후 국내 독립운동노선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 두계열은 반목과 대립도 있었으나 민족의 독립이라는 대전제 아래 민족유일당 성격을 가진 신간회를 1927년 4월에 창립하였다.

조선일보 1927.8.24
이때 낭산 김준연은 조선일보사에 재직하면서 사회주의 계열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창립된 후에는 중앙회 상무간사로 활동하였다. 신간회 영암지회는 1927년 8월 20일에 창립하였다.(조선일보, 1927.8.24)

조직을 보면, 회장: 김민규, 부회장: 김상학, 총무간사: 한동석 하헌훈 손길상 조치환, 상무간사: 하헌훈 신민섭 김상실 이순명 최기동, 간사: 김동열 신도일 조만암 외 2명을 선임하였다.

영암사람으로 다른 지방지회 강연회 연사로 활동한 사람으로는 목포지회 창립일인 1927년 7월 17일 목포극장에서 조극환은 “강역과 민족”이라는 주제로, 유혁은 “사회운동과 신간회의 사명” 이라는 주제로, 최판옥은 1928년 2월 15일 군산에서 “신간회의 당면 임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신간회운동, 신용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210P)

신간회 영암지회의 활동을 당시 조선일보가 1927년 9월 8일 보도하였다. 그 내용은
① “신간 <삐라> 영암에서 압수, 결국 삭제산포” 라는 제하로, 신간회 영암지회에서는 신간회 취지를 선전하고자 <삐라>를 인쇄하여 지난 오일인 영암읍내 장날을 이용하여 시장에서 취지 선전 연설을 하려든 차에 돌연 영암경찰은 동 연설을 금지하는 동시에 <삐라>를 압수하였는데, 그 이유는 <삐라>의 문구 중에 불온한 말이 있다고 그와 같이 압수하였는데 회장과 간사가 당국에 교섭한 결과 그의 불온한 문구만 삭제하고 단순하게 그날 장에는 <삐라>만 산포하였다.

조선일보 1927.9.8(위) 조선일보 1927.9.8(아래)
② “영암신간, 제3회 간사회”제하로, 신간회 영암지회에서는 지난 3일 오전 열시부터 본회 사무소에서 제3회 간사회를 열고 김민규씨 사회로 제반 사항을 토의한 결과 아래각항을 결의하고 오전 11시 30분에 산회하였다.

결의사항
- 영암산업조합 분규에 관한 건 - 청년야학에 관한 건
- 목포경찰 폭행사건에 관한 건 - 영암공보 교장ㅇㅇ 사건에 관한 건

또, 신간회 영암지회는 창립 1주년인 1928년 8월 20일 기념식에서 부지회장 한동석이 동양정세보고를 하던 중에 “조선역사를 말하여 암암리에 조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는 이유로 일제는 한동석을 체포하여 징역8개월을 선고하였다.(조선일보, 1929.1.13)

한동석은 불복 상소하였다. 신간회 중앙본부에서는 변호사 허헌과 한국종이 특파되어 자진해서 변론을 담당하였다. 복심공판이 1929년1월 15일 대구에서 열렸을 때 검사는 유죄를 주장하고 변호인들은 무죄를 열변하여 세인의 관심이 집중되었다.(조선일보, 1929.1.15 영암신간사건, 무죄주장, 검사는 유죄논고)

1929년 1월 25일 상고 공판에서 한동석은 무죄로 판정되었다. 영암신간지회사건은 일제의 무리한 탄압에 맞서 신간회변호사들이 쟁취한 승리의 경우였다.

영암신간지회의 활동은 신간회중앙회가 발표한 강령과 당면과제 6개항에 따라 군민들 의 소작권 보호와 야학활동 및 계몽운동 등을 지원하였다.

■ 해방운동 영암중앙부 결성과 활동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준연이 1928.2.5 일제에 의해 검거되고, 제4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세연까지 체포되면서,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0년 영암지방 사회운동은 최헌원과 최기동 등이 당 재건운동을 시작하면서 부터 본격화되었다.

최기동 등은 영암에서 이렇다 할 운동이 없이 침제국면에 있는 것은 중앙당의 지도를 받는 비밀결사단체가 없는데서 비롯되었다는데 인식을 같이하였다. 이에 1930.5.10 영암에서 최기동의 지도아래 최기동, 곽명수 등이 중심이 되어 해방운동 영암중앙부를 결성하였다.

영암중앙부의 활동목적은 농민가운데 전위투사를 획득하여 투쟁을 통한 당의 결성을 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농촌청년 및 부인, 소년들을 농민조합 청년부. 부인부. 소년부조직에 각각 편성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지도하고, 야학과 순회강연 등을 통해 농민들의 계급의식을 고취시키고자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를 받고 있던 최기동이 검거됨으로써 활동은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2, 청계연구소, 1986 재인용)

■ 혁명적 농민조합의 활동
해방운동 영암중앙부가 해체된 후인 1931년 7-8 월경부터 곽명수 등은 김판권 최판옥 등과 함께 영암지방 사회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 같은 해 8월경 비밀결사인 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조직의 활동목적은 농민들의 계급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소작쟁의를 지원하는데 있었다.

이들은 혁명적 농민조합을 결성하기 위하여, 보통학교 동창회와 청년회, 야학, 소작 상부회 등 기존의 합법적인 조직과 시설을 최대한 활용하여 혁명적 농민조합을 결성하고자하였다.

이들은 농민조합을 결성하기에 앞서 각 마을 청년회를 이용하여 청년회와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강연회를 개최하는 한편 야학을 개설하여 이들에게 계급의식과 민족의식을 주입하였다.

이들에게 야학에서 글씨연습으로 “소작단결” 및 “지주대항“등을 쓰도록 하였으며, 음악시간에는 ”적기가“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노래극을 통해 사상을 고취시켰다. 실제로 영보에서는 청년들이 야학시간을 이용해 주민들에게 ”처의 후회“라는 연극을 공연하기도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많은 소작인들의 의식은 급격하게 성장하였다. 덕진면 운암리 청년회에서는 소작권이 이동된 토지를 획득하여 청년회원들이 공동 경작함으로써 경작지를 빼앗긴 농민에게 되찾아주기로 결의하고 3차에 걸쳐 실행하였다.

1932년 영암지방에서 통일된 사회운동을 지향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 그 해4월 영암지방의 사회운동을 통합 하기위한 “영암공산주의자 협의회가 결성되었다. 이 협의회에서는 영암지방의 당면과제였던 소작권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지도함으로써 역량을 축적하였다.

■ 소작인회의 조직과 활동
1920년대 중반 이후 유혁은 영암청년회 계열과는 다른 소작인회를 조직하였다. 그 목적은 영암에서 소작문제가 가장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악덕지주에 의한 빈번한 소작권의 이동과 고율의 소작료 이었다.

그리하여 유혁 등은 지주들의 잦은 소작권이동과 고율의소작료에 대항하기 위하여 소작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박이준, 한국근현대사연구, 2001, 182p)

 

영암농민항쟁의 의미는 항일운동
일제하에서 영암농민항쟁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요, 항일투쟁이었다. 일본인 들은 러일전쟁 이전부터 조선에서 농지를 매입하기 시작하였고, 한일강제병합이후에는 조선총독부의 권력을 배경삼아 헐값으로 농지를 매입하거나, 1개월에 1할 내지는 2할의 고리로 돈을 빌려주고 고의로 채무변재기한을 넘기는 등 악랄한 수법으로 농지를 약탈하였다.

또한 궁방전 등 공공용 농지는 동양척식회사 등에 편입시켰다. 이러한 상황은 영암에서는 더욱 심하였다. 이것은 영암농민구성의 특징이 전남 평균에 비하여 자작농의 비율이 현저하게 낮은 반면 자소작농과 소작농의 비율이 전남 평균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다.

곧 영암지방의 농민계층은 소규모의 자작농과 절대다수의 자소작농 및 소작인의 형태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실태에서 아주 높은 비율의 소작료와 소작권의 잦은 이동은 절대다수의 영암사람들을 불안하게하고 초근목피로 연명하게 하여 반일감정과 악덕지주에 대한 증오심을 증폭시켰다.

여기에 영암의 여러 사회단체들이 조직적인 계몽운동과 농민운동을 전개하여 영암군민의 의식을 성장시켜나갔다. 영암공립보통학교 및 구림보통학교재학생 및 졸업생이 중심이 된 영암청년회에서는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주창하는 등 민족의 주체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해나갔다.

또 영암신간지회, 해방운동영암중앙부, 혁명적 농민조합, 소작인회 등의 활동을 통해 노동자 농민의 계급의식을 고취시키고, 문맹퇴치운동과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악덕지주에 대항할 수 있는 영암군민의 주체의식을 성장시켰다.

그리하여 이를 바탕으로 악덕지주에 대항하고 항일투쟁의 일환인 영암농민항쟁을 일으켰다. 이 항쟁으로 영암의 많은 지사들이 처형을 당했다. 그러나 이 지사들은 이에 개의치 않고 재판과정에서도 의연하게 항거하였다. 이는 영암사람들에게 면면이 이어져오는 기개요, 기상의 표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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