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평공파(兜平公派) 후손들 서호, 군서지역에 집성촌 이뤄

서호면 엄길리 마을회관 앞에 있는 장동사(전라남도 기념물 제109호)는 임진왜란때 공을 세운 전몽성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우(祀宇)다. 이후 전몽진과 전몽태 3형제가 배향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장동마을에 있던 것을 1946년에 옮겼다.

전몽성, 몽진 형제는 임진왜란 때 의병들과 함께 큰 공 세워
도시조는 전섭, 천안全씨 시조는 전낙

全(전)씨 도시조(都始祖)는 전섭(全聶)인데, 그는 온조가 백제를 건국할 때 10공신(十濟功臣) 중의 한 사람으로 환성군(歡城은 천안)에 봉해졌다. 그 후 全씨는 한국인 문헌에 178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감천 경주 기장 나주 성산 성주 옥산 옥천 완산 용궁 정선 천안 죽산 팔궁 평강 함창 황간 전씨 17본을 제외한 나머지는 미고이다.

모든 전씨는 백제 개국공신 전섭을 도시조로 하고 있다. 전씨시조 단소는 충남 천원군 풍세면 삼태리 태학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매년 양력 10월3일 시향을 모시며 단소 및 제설은 충남지방문화재 제297호로 지정(1987. 12. 30)관리해 오고 있다.

全씨의 연원에 대하여 흥미있는 전설이 있다. 중국의 왕몽(王蒙)이란 사람이 공갑의 난 때 기자조선으로 피신했는데, 그 뒤 마한 때 王(왕)씨가 임금이 되리란 소문이 나돌아 왕몽은 화를 입을까 두려운 나머지 몸을 숨기고, 왕(王)자 에 인(人)자을 첨가해 전(全)씨로 성을 바꾸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천안 全씨측은 全씨 속에 고려 왕족 王씨들이 있었을 거라는 얘기를 수긍하지 않는다. 호사가들이 지어낸 말로 여긴다. 시조 낙이 왕건의 고려 건국을 도왔고 이후 고려 왕실에서 큰 벼슬을 한 이가 많은 건 사실이나 고려의 王씨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 의금부도사 왕방연, 정유재란때 의병을 모아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왕득인 등 조선초기에도 왕씨는 존재했다.

물론 왕씨들이 타 성씨에 흡수됐을 가능성은 있다. 태조 3년 4월 26일에 "王씨성을 가진 사람은 비록 고려왕조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성을 바꾸거나 어머니 성을 따르라"는 태조 이성계의 명에 따라 많은 왕씨들이 성을 바꿨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정조 때 개성을 본관으로 왕씨가 다시 성을 찾게 된다.

 

- 全씨는 고려조에 명성을 날렸던 가문 -

여하튼, 全씨관면록에 의하면 全씨는 역사상 봉군 35명, 정승급 12명, 상서,판서급 43명, 참판 4명, 대장 7명, 병사,수사 4명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이는 대부분 고려시대 인물들이다.

천안全씨 시조 충달공(忠達公) 낙은 도시조 환성군(섭)의 26세손으로 고려 개국공신인데, 927년 후백제와의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위기에 몰린 왕건을 구하고 신숭겸 등과 함께 순절하였으며, 좌복야(정2품)에 추증되고 천안부원군에 봉해졌기에 후손들이 천안을 본관으로 삼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천안을 본관으로 가진 성씨(土姓)로 全·河·申·沈·張 5성씨를 들고 있는데, 현재는 사실상 全씨 밖에 없다는 주장이 있다.

천안全씨 인물을 살펴보면, 고려때 낙의 아들 홍술은 문하시중 평장사(정2품)를 지냈고, 홍술의 증손자 인량은 이부성서(정3품) 등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단과 승도 명성을 날렸다. 승은 신(信)의 부친으로 과거시험을 관장하는 벼슬인 지공거를 지냈다. 신은 문과에 급제하고 진현관대제학 등을 지내고 백이정, 이제현 등 당시의 석학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조선시대 들어, 선조 때 상의(尙毅)는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정묘호란 때 구성부사로서 안주성에서 5일간 분전하다 장렬히 순절,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동흘(東屹)은 효종 때 무과에 급제하고 특히 용병에 능하여 이상진(李尙眞), 소두산(蘇斗山)과 함께 삼걸(三傑)이라 불렸으며 병마절도사, 훈련대장 등을 지냈다. 통영에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져 그의 공적을 기렸다. 또 동흘(東屹)은 철산부사 시절에 장화,홍련의 원한을 풀어준 일화로도 유명하다. 몽성(夢星)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순절하였다.

그리고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녹두장군 봉준(琫準)은 이땅에 최초로 자유민주주의의 싹을 트게 한 동학혁명의 지도자이다. 그의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되자 사회개혁을 결심하고 30살 때 동학에 입문하여 고부접주가 된다. 그리고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백성이 고통 받자 보다 못해 동학혁명을 일으켜 백성이 나라의 주인임을 일깨워준다. 처음에는 계속 승전하여 전주를 점령하고 크게 전세를 떨쳤으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들어오고, 천진조약을 빙자해 일본군도 입국하자 이천, 목천, 공주의 혈전에서 패배하고, 현상금을 탐낸 한신현 등의 지방민에 의해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 당했다. 그리고 천안全씨는 조선시대에 30명이 넘는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문과 4명, 무과 10명, 생원진사 17명)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전몽성, 몽진 형제의 충절과 효성을 기리기 위해 왕명으로 세워진 전씨 충효문(전라남도 기념물 제71호)이 서호면 장천리에 있다.
 
- 전국 47,740가구 133,074명 분포 -

천안全씨 집성촌으로는 담양군 남면 연천리, 보성군 벌교읍 영등리, 율어면 문양리, 여수시 월내동,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 군서면 월곡리, 고창군 공음면 신대리, 익산시 용안면 석동리, 임실군 덕치면 일중리,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충남 금산군 군북면 두두리, 천안, 아산일원(주로 문효공파), 경북 경산시 용성면 독죽동 등이 있다.

천안全씨 인구수는 2000년 조사에서 전국 4만740가구 13만3천74명으로, 전국 총인구의 0.3% 미만으로 조사되었으며, 우리 영암지역에 사는 천안全씨는 313가구 759명으로 영암 인구의 1.26%를 차지했다. 한편, 이 조사에서 全씨는 정선전씨(141.380명), 옥천전씨(43.920명), 용궁전씨(27.706명), 전주전씨(16.434명), 옥산전씨(15.659명), 경산전씨(14.742명), 죽산전씨(11.229명), 성산전씨(8.738명), 완산전씨(7.568명), 강릉전씨(6.333명) 등 천안全씨 포함 총 17개 본관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천안全씨의 분파는 크게 시중공파(侍中公派), 문효공파(文孝公派), 두평공파(兜平公派), 삼재공파(三宰公派),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판결사공파(判決事公派)로 나뉘는데, 우리 영암 서호, 군서지역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천안全씨들은 두평공파 후손들로, 이곳 입향조는 이조 연산조10년(1504년) 강진군 태동에서 전승문, 승무 형제가 서호면 엄길촌에 기거지의 터를 닦았다.

 

- 영암지역 천안全씨 충신, 무관 다수 -

호남읍지 기록상 우리 영암지역 인물로, 충신으로는 전몽성, 몽진 형제가 있다. 그들의 아버지는 전방필이고 형은 몽일, 동생은 몽태인데 형제들 모두 무신이다. 몽성은 선조16년(1583)계미 별시 병과 318위(355/500)로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당시 나이 23살이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고경명 아래에서 금산전투에 참전하였고 이후 함평현감을 지냈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아우 몽진, 첨사 김덕흡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경상도 지역에서 활약하였다.

여러차례 왜적을 격퇴하던 중 이듬해 영암의 해암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숙종 때 병조참의에 추증되었고, 영암의 장동서원(長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생년은 1561년(명종 16)이고 몰년은 1597년(선조 30)이다. 아우 몽진도 같은 날 전사하였다. 몽성,몽진 형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서호면에 전씨충효문(전남도 기념물 제71호)이 건립되었다.

 

엄길전씨 문, 무과 급제자로는 전윤이 승문의 장자로 흥양현감과 사헌부 감찰을, 전방필은 충순위사정과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몽일 몽성 몽진 몽태는 방필의 4자(子)로 무과로 국익에 몸을 바쳤다. 전환은 여홍공의 장자로 인조8년 사마시에 급제하고 전광정은 순조 원년 갑술에 문과에 급제했다. 전영택은 순조 27년 정해식년시 문과에 급제하고 전종행은 순조 34년 갑오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소격서령을 제수받았다. 전종태는 고종 24년에 정의현감 겸 제주진영 병마도위를 역임했다.

현대에 들어와 천안全씨 엄길출신으로는 전석홍 전 국가보훈처장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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