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토기 하니와 곳곳 산재...

나주 영동리 고분선 1천500년전 일본인 추정 인골

5~6세기 영산강세력 활발한 대외교류 증거

1천500여 년 전 유골이 발견된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 고분. DNA분석결과 일본인들과 가까운 것으로 파악됐다.
이번에 고대 일본식 무덤인 전방후원분에서 50여개의 하니와란 일본식 토기가 나온 시종면 태간리 자라봉고분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시종면 옥야리 산 159-2번지에는 장동방대형고분이라 이름 붙여진 큰 무덤이 있다.

방대형고분이란 아랫부분을 정사각형에 가깝게 모양을 잡아 위쪽으로 쌓아가는 기법의 고분을 말한다.

2010년 10월 문화재청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한 결과 이곳에서도 분구와 고분 주위를 두르는 도랑에서 하니와(고분 내외부에 열 지어 세워놓는 의식용 토기)로 불리는 원통형 토기가 다량 출토됐다.

학자들은 장동방대형고분의 조성연대를 6세기로 보고 있다. 6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는 태간리 자라봉고분과 조성연대가 비슷한 것이다. 이는 시종면 일대가 6세기를 전후해서 어떤 형태로든 일본과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영산강 유역 대표적인 고분이면서 금동관 금동신발, 금반지등이 출토된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도 일본식 토기인 하니와가 나왔다. 국보 295호인 신촌리 고분 금동관과 형태가 비슷한 것이 일본 후나야마 고분에서도 출토되었는데 이 고분은 5세기~6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단순한 고깔 모양의 내관과 복잡한 초화형(草花形)의 장식을 한 외관이 세부적인 면에서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그 재질과 형태는 동일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이런 형태의 관은 한반도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나주 영동리 고분에서도 다양한 일본관련 유물들이 쏟아졌다.
원래 신촌리 9호분은 1917년부터 2년 동안 일본인들이 발굴을 시작했었다. 금동관등은 당시 일본인들이 출토한 것이다. 신촌리 9호분은 하니와와 관련성을 찾지 못하다가 1999년 국내학자들의 발굴과정에서 하니와가 나왔다.


하니와(원통형 토기)는 분정 가장자리에서 1점, 분구 사면 성토층에서 31점이 동서 17m, 남북 19m의 범위에서 50-100㎝의 간격으로 배치된 상태로 발견됐다. 원통형 토기가 열을 지어 매장돼 있었다. 고분 내외부에 열 지어 세워놓는 것은 하니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문화재연구소는 당시 원통형토기(하니와)가 신촌리 9호분에서 확인된 것은 대형옹관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는 가장 이른 시기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그러나 하니와의 발견이 일본 문화가 이곳을 평정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전문가들이 지적했듯이 일본 하니와가 인물, 기물 등 다양한 기종을 보여주는데 반해 나주 토기는 단순한 점 등으로 미뤄 문화교류에 있어 주체적 수용사례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시말해 일본의 하니와가 영산강유역으로 직수입된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교류를 통해 이곳에서 직접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1999년 발견을 통해 신촌리 9호고분의 일본 문화 연관성이 보다 확실해진 셈이다.


나주 신촌리 6호 고분은 이번에 시종면 태간리에서 발굴된 고대 일본분묘 형태인 전방후원분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1996년 발굴된 나주 복암리 3호 무덤에서는 장식용 큰 칼이 세자루 출토됐다. 그 모양은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것과 달랐다. 복암리 3호 고분에서 발견된 칼은 일본에서 6세기말~7세기초에 유행했던 규두대도란 칼과 똑 같았다.(김낙중. 영산강유역에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우다 참조).

당시 규두대도는 영산강 주변 세력이 독자적으로 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로 통용됐다.


최근 들어 일본계 고분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가장 가까이 다가온 역사유적이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 고분이다. 2000년 초까지 영동리 고분군은 그 존재조차 알 수 없었다. 2005년 이곳 주민이 자기 소유 대나무 숲을 밭으로 개간하던 중에 석실(石室)이 노출됨으로써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12일 오후 시종 태간리 자라봉고분에서 봉분을 복구하기 위해 빈 공간에 모래주머니를 넣고 있다.
이후 동신대박물관이 2007년초까지 3차에 걸쳐 연차 발굴을 벌였다. 영동리 고분의 여러 가지 특징이 있었지만 가장 놀랄만한 사실은 1천500년전 유골이 무려 23구나 발견됐다는 것이다. 두개골은 형태가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었고 형질분석과 DNA분석이 가능했다.

고분 유골의 DNA을 분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결과는 놀라운 것이였다. 인골의 주인공은 신라, 백제, 가야인과 차이가 있었고 조선인들과도 달랐다. 놀랍게도 유골의 DNA는 현대 일본인들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그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역사의 얼게들을 하나 둘 묶어보면 5~6세기에 걸쳐서 조성된 일본식 무덤인 전방후원분에서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다른 상당수 대형고분에서도 예외없이 일본식 토기가 발견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학계에 함평 신덕고분 발굴 미스테리란 우화가 있다. 함평신덕고분은 시종면 자라봉고분과 함께 대표적인 일본식 전방후원분이다.

이 고분은 1991년 3월 국립광주박물관이 현지 실측조사를 하다가 도굴 구멍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같은 해 6월17일 이후 7월18일까지 약 한달 동안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자라봉고분 1차 발굴시기와 비슷한 시기다.


함평 신덕리 고분은 도굴 피해를 보긴 했지만, 나중에 그 도굴품 중 상당수를 회수한 데다 수습 유물 또한 만만치 않아 조사가 이뤄진 전방후원분 7곳 중 가장 많은 성과를 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신덕고분 발굴성과는 20년이 흐른 지금까지 구체적인 공개가 없다. 다만 광주박물관은 지난 95년 '함평 신덕고분 조사개보'라는 '행정보고서'만을 작성해 관계기관에 배포했을 뿐이며 이조차 '대외비'로 묶어 놓았다.

박물관이 당시 이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일본관련 유물이 지나치게 많이 나와서 그랬을 것게 학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관계자들은 언제든지 보고서를 공개할 수 있다고 맞서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고서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영산강 유역에서 5~6세기에 걸쳐 일본계 문화와 인골이 발견되고 있는 것은 부정할수 없는 현실이다.

문제는 그러한 정황들이 일본의 일부학자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나 한반도 남부지배설을 뒷받침하느냐 하지 않느냐하는 것인데 여러 가지 발굴자료들은 일본이 영산강 유역을 지배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고 있다.


그보다는 백제에 흡수되지 않은 독자적인 마한세력이 6세기 중엽까지 영산강 유역에서 존재했으며, 그들은 일본은 물론 신라, 가야등과도 활발한 인적 ․ 물적 교역을 했던 대외 개방세력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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